亂離袞到白頭年 백발이 성한 나이에 난리 속을 만나니 幾合損生却未然 이 목숨 끊을까 하였지만 그리하지 못하였네 今日眞成無可奈 오늘에는 더 이상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輝輝風燭照蒼天 바람에 날리는 촛불만이 푸른 하늘에 비치도다. 위 시는 조선 후기 우국지사 매천 황현(1855 ~ 1910)이 목숨을 끊기에 앞서 지은 시 4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매천은 일제에 나라가 짓밟히는 꼴을 보고 여러 차례 목숨을 끊으려 하다가 한일강제병합이 되자 목숨을 끊는 시(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였습니다. 그는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때부터 1910년(순종 4)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때까지 47년 동안을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생생히 기록해두었지요. 매천은 28살 때 과거시험에 1등으로 합격했으나 시골 출신이라는 까닭으로 2등으로 떠밀리자 벼슬길을 버렸습니다. 5년 뒤 아버지의 권유로 생원시에 응시해 역시 장원으로 합격했지만 어지러운 시국과 썩은 관리들을 보고 관직에 나갈 마음을 접고 전남 구례에 내려가 제자 기르기에 온 정성을 쏟게 됩니다. 매천이 태어난 곳은
“달 하나가 두 곳을 비추는데 두 사람은 천 리를 떨어져 있네 원컨대 이 달 그림자 따라 밤마다 임의 곁을 비추었으면" 위 노래는 삼의당 김씨가 지은 ‘가을 달밤(秋夜月)’이라는 시입니다. 남편을 과거 시험장에 보내고 그리워하며 지은 시이지요. 진안 마이산 탑사로 오르는 길목에는 삼의당 김씨와 남편 하립을 기념하는 큼지막한 부부 시비(詩碑)가 서 있습니다. 삼의당(三宜堂) 김씨는 1769년(영조 45) 10월 13일 전라북도 남원 누봉방(樓鳳坊)에서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던 담락당(湛樂堂) 하립과 18살에 혼인하게 됩니다. 이들 부부는 나이는 물론 생일과 태어난 시도 같아 하늘이 점지해준 배필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혼인 첫날밤 칠언절구 사랑의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부부금실이 아주 좋았지요. 또 이 부부는 중년 무렵 선영(先塋)을 지키려고 진안 마령면(馬靈面) 방화리(訪花里)로 이사하여 이 마을에서 시문을 쓰면서 일생을 마칩니다. 삼의당은 집안 형편이 어렵자 자신의 머리털을 자르기도 하고 비녀를 팔면서 남편이 과거준비에 전념하게 했으나 남편은 끝내 등과하지 못합니다. 하
이 맘 때가 되면 “ 설악산 단풍인파 혼잡 극심”이라는 말을 뉴스 따위에서 듣게 됩니다. 요즈음 단풍으로 유명한 산을 꼽으라면 설악산을 비롯하여 내장산, 대둔산 같은 산을 들 수 있습니다만 일제강점기에 나온 잡지 별건곤 제33호 (1930년 10월 1일 발행)에 “조선 각지 단풍명소 순례기"라는 기사에는 당시 단풍으로 으뜸은 뭐니뭐니해도 금강산을 꼽고 있습니다. 단풍 명소 4곳 가운데 맨 먼저 나오는 금강산은 "조선의 명산을 구경하는 사람이 만일 금강산을 못 보앗다면 족히 명산을 구경하얏다고 말할 수 업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단풍을 구경하는 사람이 만일 금강산의 단풍을 못 볼 것 가트면 또한 단풍구경을 잘하엿다고 못할 것이다"라고 하여 으뜸으로 칩니다. 이어 전라도의 내장산을 가리켜 “남금강”이라 하면서 “전라도의 제일 명산이 어느 산이냐 하면 누구나 물론하고 구례, 남원방면에 잇는 지리산을 가르치겟지만은 단풍의 명산으로 말하면 아마 정읍의 내장산이 맨 첫손까락으로 곱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밖에 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삼방협곡[三防幽峽]은 “유람객이 업
붉은 잎 노란 잎 어우러진 / 뫼 끝에 올라 / 저무는 북녘을 바라다본다 피붙이 아우 업고 / 손 흔들던 어머니 아! 어머니 / 붉은 피 토하며 / 고개 수그린 너 / 그 잎새에 조용히 얼굴을 묻는다. - 조영주 ‘망향’- 오늘은 상강(霜降)입니다. 만산홍엽의 계절이기도 하지요. 상강은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린다’는 뜻으로 24절기 가운데 열여덟 번째 찾아오는 절기입니다.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에 있으며 보통 양력 10월 23~24일 무렵입니다. 동아일보 1961년 10월 24일 자에 보면 “누렇게 시든 가로수 잎들이 포도 위에 딩굴고, 온기 없는 석양이 삘딩 창문에 길게 비쳐지면 가을도 고비를 넘긴다.”라며 상강을 얘기합니다. 〈농가월령가〉에 보면 “들에는 조, 피더미, 집 근처 콩, 팥가리, 벼 타작 마친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가을걷이할 곡식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 일손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大夫人) 마님이 나막신짝 들고 나선다."라는 말이 있는데,
옛 사람들은 집안 곳곳에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집을 다스리는 성주신을 비롯하여 부엌에 있다는 조왕신, 장독대의 터주신은 물론 심지어 측간(뒷간)에도 신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또한, 문에도 신이 있는데 이 신은 문신(門神)으로 문전(門前) 또는 수문장신(守門將神)이라고도 불렀지요. 특히 제주도 사람들은 이 문신이 늘 문을 지켜서 집안의 모든 일을 수호한다고 생각하여 아주 중요한 신으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문신에게 굿을 할 때 외우는 “문전본풀이”에 따르면 “아버지는 집의 출입로에 대문 대신 가로로 걸쳐놓는 정낭의 신이 되고, 어머니는 부엌의 조왕신이 되고, 계모는 측간신이 되고, 아들 일곱 형제 가운데 첫째에서 다섯째까지는 오방토신(五方土神)이 되어 집터를 지키고, 여섯째아들은 뒷문전이 되고, 똑똑하고 영리한 막내아들은 일문전(마루방 앞문 신)이 되었다.”라고 합니다. 이 “문전본풀이”를 바탕으로 조왕(부엌)과 측간은 멀리 띄어서 지었는데 어머니(부엌신)와 계모(측간신)를 떼어 놓으려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측간의 돌 하나 나무 하나도 부엌에 가져오지 않는
조선은 대부분 공식 문자 생활이 한문으로 이루어졌음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런만큼 당시에는 언문(한글)이 푸대접받았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궁궐 내 대비,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에서는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선조는 공식 문서인 교지에 언문을 사용한 임금으로 꼽힙니다. 선조가 교지를 언문으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임진왜란 때문이었습니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왜군이 7백여 척의 배를 앞세워 부산포로 쳐들어 미처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던 조선은 왜군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속속들이 관군이 무너졌다는 숨막히는 소식을 들으며 선조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은 의병이었습니다. 선조실록 25년 8월 19일 기록을 보면 “언서로 방문을 많이 써서 송언신에게 보내어 민간을 알아듣게 타이르도록 하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한문이 아닌 언서(한글)로 교지를 내린 까닭은 백성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제주도 강정마을에는 구럼비바위가 있습니다. 이 구럼비바위는 제주에서 보기 드문 1.2km 통바위이고, 강정마을 주민들이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왔던 민속신앙의 터전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바위에서 7천여 년 전 겨레 유산이 발굴되었다는 것입니다, 해군으로부터 발굴용역을 맡은 ‘제주문화유산연구원’이 지난 7월부터 제주 해군기지 예정부지인 구럼비바위 일대를 조사한 결과 이곳에는 청동기 후기부터 기원 직후인 탐라국 성립시기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 수혈실 집자리와 주혈식 소토 유구 따위가 확인되었고, 강정포구에서는 조선시대 후기 것으로 보이는 집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전문가들은 이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에 오를만한 대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구럼비바위는 무참히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유적이 발굴된 곳을 지난 9월 2일 기습적으로 펜스를 설치하고 굴착기를 동원해 구럼비바위를 깨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은 해군기지 공사 현장 곳곳에서 문화유적이 발견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에 따라 제주 해군
“뚫으세 뚫으세 펑펑 뚫으세 수정같이 맑은 우물 펑펑 뚫으세 조상대대 자자손손 먹고살고 먹고살고 뚫으세 뚫으세 펑펑 뚫으세” 위 노래는 마을 공동우물에서 우물치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예전 사람들의 식수원은 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옛 사람들은 우물을 그저 물을 퍼서 마시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고마운 우물에서 물이 잘 나오도록 하고, 물이 맑아서 마을 사람들이 배탈 나지 않고 건강하게 살도록 해달라고 빌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물치기”입니다. 마을에서는 동제(마을 공동의 제사)를 올리기 사흘 전 마을 공동우물을 찾아가 샘굿을 합니다. 물론 샘굿을 하기 직전에는 우물에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도록 금줄을 칩니다. 그리고 우물 속에 빠져버린 끊어진 두레박이라든가 줄 따위를 말끔히 치워내고, 깨끗한 자갈을 다시 깔아 둡니다. 그런 다음 풍물패들이 우물에 다다르면 상쇠가 용왕님께 축문을 외웁니다. 축문을 외우고 난 뒤 노래를 부르고 풍물을 치며, 우물을 몇 바퀴 돕니다. 그러면 이 우물은 신성한 생명수의 원천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금
충청남도 금산은 인삼의 고장이다. 매해 인삼축제를 열고 있어서 이 기간 중에는 국내는 물론, 동남아를 비롯하여 세계의 각국에서 많은 사람이 금산을 찾고 있다. 또한, 금산군에서는 축제기간 동안 각 지방의 농악대를 초청하여 대대적인 농악공연을 계획해 놓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농악의 실기뿐 아니라 한국 농악의 미학이란 주제로 전국 국악학 학술대회도 준비하고 있어 이 분야에 관심을 둔 학자나 연구자들, 그리고 전공하는 학생들이나 실기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개최일시는 10월15~16일 양일간 충남 금산의 다락원 소공연장에서 오전 10부터 열릴 예정이다. 그래서 이번 주부터 국악속풀이는 농악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언제 어디서 보고 들어도 한국인을 신명나게 해 주는 농악은 음악적인 요소뿐 아니라, 무용적인 요소와 연희적인 요소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농악이나 농악무는 농사와 관련하여 집단노동을 할 때, 작업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혹은 명절 같은 때에 흥을 돋우기 위해 연주하는 농민들의 음악과 춤인 것은 분명하다. 지방에 따라서는 이를 ‘풍물’ 또는 ‘풍장’이라도 하는데, 풍물(風物)이란 말은 풍악에 쓰이는 기물을 말하는 것
잘못은 못 탄 몸 아쉬운 건 휘파람 하늘 땅 가는 바람 이네는 어디 있고 예순을 다 바쳤어도 모자람은 남는구나 제 힘이 아니고 뜻밖에 행운을 얻어 잘 됐을 때 사람은 천하를 쥔 것처럼 독판친다. 그때일수록 겸손하게 더 겸손하게 되돌아 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인생이란 그런 것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