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게가 갈대꽃을 물고 늘어지는 그림 “해탐노화도(蟹貪蘆花圖)”를 보셨나요? 게가 갈대꽃을 먹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단원은 게가 뒤로 발랑 나자빠지면서도 갈대꽃을 놓지 않는 그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단원은 이 그림에 깊은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한자로 갈대는 “로(蘆)”인데 이는 중국 발음으로는 “려”로 그 뜻은 원래 임금이 과거 급제자에게 나누어주는 고기음식을 말하지요. 그러니까 게 두 마리가 갈대꽃을 물은 것은 소과(小科)와 대과(大科) 두 차례 과거시험에 모두 합격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그것도 확실하게 붙으라는 뜻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냥 합격이 아닌 장원급제를 바라는 것이지요. 게는 등에 딱딱한 껍질 곧 “갑(甲)”을 이고 사는 동물로 한자로 갑(甲)을 의미합니다. 이 갑은 천간(天干,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첫 번 째로 장원급제를 뜻하지요. ‘게가 갈대꽃을 탐하는 그림(해탐노화도)’은 이런 뜻을 지녔기에 과거시험을 앞둔 사람에게 선물로 그려주는 대표적인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림 끝에 붙인 그림제
주머니는 자잘구레한 물건이나 돈 등을 넣고 입술에 주름을 잡아 졸라매어 허리에 차거나 손에 들고 다니는 장신구를 말합니다. 비단 헝겊으로 만들어 수를 놓거나 금박을 박기도 하는데, 옛날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지녔지요. 특히 한복에는 대한제국 말기에 서양에서 들어온 조끼를 빼고는 물건을 넣을 만한 호주머니가 없어 실용적인 면에서 더욱 필요하였습니다. 그 주머니 가운데 아래는 둥글고 위는 모진 것인데 입구에 잔주름을 잡아 오므리는 주머니를 두루주머니라 합니다. 두루주머니 가운데서도 특히 오방색 곧 노랑, 파랑, 하양, 빨강, 검정의 5가지 빛깔을 써서 아름답게 만든 것이 오방낭자(五方囊子) 곧 오방 두루주머니입니다. 오방 두루주머니 앞면 가운데는 글자를 금박 하거나 수를 놓았으며, 액을 면하고 한 해를 무사히 지내라는 뜻으로 정월 해일(亥日, 돼지날)에 아이들에게 주머니를 선물했습니다. 여기서 오방색이란 음과 양의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다시 음양의 두 기운이 목(木)ㆍ화(火)ㆍ토(土)ㆍ금(金)ㆍ수(水)의 오행을 생성하였다는 음양오행사상을 기초로 한 것이지요. 오방색은 나쁜 기운을 막고 무병장수를 비손해 돌이나 명절에 어린아이에게 색동저고리를 입히는 것,
경기도 파주시는 지난 6월 25일 임진각에서 백선엽 얼굴을 돋을새김(부조) 한 6·25전쟁참전기념비 제막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위쪽 평화의 종각 마당에서는 '친일인사 백선엽 동상건립 반대 파주시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 소속 회원들이 모여 6·25전쟁참전기념비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파주시는 백선엽을 6·25전쟁 영웅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민단체는 백선엽이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간도특설대 장교인 점을 상기시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에 따르면 간도특설대는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투사를 잡아들이고 무자비한 고문과 살육을 한 악명 높았던 일제의 앞잡이 부대로 항일 독립군의 씨를 말리려 한 부대였다고 합니다. 일본군 장교가 되어 제 겨레에게 총부리를 겨눈 민족 반역자가 마치 영웅이라도 되는 양 시민의 혈세를 받아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고 대책위 회원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이날 기념비반대기자회견장에는 욱일승천기(태평양전쟁 때 일본이 쓴 깃발로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
“조국의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만해 한용운은 영양실조로 쓰러져 숨져갔다. 유해는 제자 박광, 김관호 등이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 만해기념관 누리집에 올라있는 만해 한용운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만해 한용운은 조선 왕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이름은 유천(裕天)으로 6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여 9살이 되던 해에 《서경》에 능통할 정도의 실력을 쌓아 조용한 두메산골에서 신동으로 칭찬이 자자하게 퍼져 나갑니다. 그때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선 등불 같을 때 아버지 한응준은 어린 유천을 불러놓고 세상 형편과 나라 안팎의 돌아가는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여 주지요. “아버지는 역사상 빛나는 훌륭한 사람들의 언행과 국내외 정세를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셨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내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다.”라고 회상합니다. 만해의 올곧은
그윽한 회포가 정히 근심스러워 / 그대로 얽매어 둘 수 없는지라 / 파리하게 병든 몸 애써 부축하여 / 갑자기 높은 언덕을 올라가서 / 손으로는 등나무 지팡이를 끌고 / 앉아서는 소나무 안석에 기대니 / 시골 정취 어이 그리 뜻에 맞는고 / ‘〈사가집(四佳集) 제3권〉’ 19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25살에 관직에 오른 이후 69살의 나이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문장가로서 대문호(大文豪)소리를 듣는 서거정(徐居正 : 1420 ~ 1488) 시에 등장하는 소나무는 의자가 되어 등을 기댈 수 있는 반려자로 나옵니다. 소나무는 푸르르고 올곧은 선비의 상징으로 알려져 예부터 우리겨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이러한 소나무는 목재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관리 감독 또한 철저했지요. 선조실록 17권 16년(1583년) 기록을 보면 소나무 소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나무는 “송목금벌(松木禁伐)”이라 하여 함부로 벨 수 없었는데, 소나무 벤 자를 적발하여 함경북도 맨 끝 경원으로 보낸다는 헛소문에 "소나무로 울타리를 한 자, 혹은 집을 지은 지 얼마 안 된 자들이 너도
전통적으로 남원은 춘향의 고장입니다. 절개의 대명사로 꼽히는 춘향은 남원뿐 아니라 한국 고전문학의 백미를 장식하는 여성이지요.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 열사나 조선시대 시ㆍ서화에 뛰어난 황진이 등은 그 절개와 우국ㆍ충정심을 인정받아 오랫동안 한국인들에게 사랑받아 오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태어나 존경받느냐 아니냐는 신분에 있지 않고 그 행위에 있음에도 남원의 절개 높은 춘향이를 한낮 변사또의 노리개로 전락시킨 발언을 한 사람이 있어 최근 시끄럽습니다. "청백리 따지지 마라! 지금 대한민국 공무원이 얼마나 청백리냐, 역사를 봐라. 춘향전은 변사또가 춘향이 따먹으려는 것 아니냐'라는 말은 경기도지사 김문수 씨가 지난 22일 오전 한국표준협회 초청 최고경영자 조찬회에서 한 말로 이를 두고 춘향이 고장 남원을 비롯하여 고전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배달겨레의 대표적 고전에 대한 폄하요 망발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남원시민들은 영화 “방자전” 문제로 법원에 상영금지가처분 신청까지 낸 상태여서
국악속풀이 이번 주 이야기는 가곡에서 잠시 벗 어나 가야금병창에 대해 얘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가야금병창이란 창자 스스로 가야금을 뜯으며 단가나 민요, 판소리의 눈대목 등을 부르는 연창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기존의 노래뿐 아니라 새롭게 창작된 노래도 가야금을 뜯으며 부른다. 우리의 전통성악 가운데 반주악기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성악은 가곡이 유일하다. 반주악기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 부분이나 간주 부분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음높이를 지정하고 유지해 주는 역할에서부터 선율의 흐름, 빠르기, 음악적 분위기를 반주진이 이끌게 마련이어서 창자가 도움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때로는 이러한 틀이 장애가 되어 오히려 창자의 기량을 발휘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88서울 올림픽 전야제 행사로 고 박동진 명창이 판소리 한 대목을 관현악 협연으로 부른 다음, 무대 뒤로 나와서 “ 나는 다 필요 없어, 북 제대로 치는 놈 하나만 있으면 된단 말이여~” 불평 섞인 실토를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가곡을 제외한 여타의 노래들은 반주가 있으면 좋고 여의치 않으면 장고나 북을 반주 삼아 부르는 노래가 일반적이다
지금은 전통한식점, 전통찻집 등에서 멋으로 둘둘 말아 한쪽 벽을 장식하는 용도로 전락했지만 멍석은 우리 겨레에게 친근한 생활도구였습니다. 멍석은 주로 짚으로 만들었으며 보통 3m × 1.8m 정도의 직사각형이지만 둥근 모양도 더러 있었고, 특히 맷돌질할 때 바닥에 깔아 쓰는 맷방석이라는 둥글고 작은 것도 있습니다. 월여농가(月餘農歌)에는 관도점이라고 했으며 덕석, 덕서기, 턱성, 터서기 등으로 불렀습니다. <개벽 제4호> 1920년 9월 25일 자에 보면 ‘농촌의 밤’에 “저녁을 먹고 나서는 뜰이나 마루에 보리집자리나 멍석가튼 것을 펴고 왼가족이 다 나와 안습니다. 그리고 솔깡이나 겨릅가튼 것으로 우둥불을 놋습니다. 그리고는 내일은 무엇을 하느니 아무 논벼는 몃섬이 나느니 팟종자를 개량한다느니 목화바테 무명이 만히 피엇다느니 하야 한참동안 구수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는 부인네들은 혹 바느칠도하고 혹 삼도 삼고 혹 이야기도 합니다.”라는 글이 보입니다. 정겨운 시골 저녁 마당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멍석은 고추, 깨, 콩, 벼 등 곡식을 널 때도 쓰고 잔치 때나 상을 당했을 때, 굿판 등 큰 행사 때는 마당에 깔아 놓고, 많은 사람이 앉았으며, 명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 번째에 해당하는 하지(夏至)입니다. 하지가 지나면 모심기가 늦어지기 때문에 서둘러 모내기를 해야 했는데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었기에 비가 오지 않아서 농사짓기가 어려워지면 임금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지요. 조선왕조실록에 “기우제”가 무려 3,122건이나 나올 정도입니다. 기우제의 유형은 몇 가지가 있는데 먼저 산 위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놓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산에서 불을 놓으면 타는 소리가 천둥 치는 소리같이 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하며, 연기를 통해 천신에게 기원을 전한다고도 합니다. 또 성물(聖物)이나 성역(聖域)을 더럽히거나 신에게 압력을 넣는 방법도 있지요. 성물(聖物)이나 성역에 더러운 것을 뿌리거나 넣으면 신이 비를 내려 깨끗하게 해주리라 생각했으며, 신을 모독하거나 화나게 하여 강압적으로 비를 오게 하기도 합니다. 부정물은 개, 돼지의 피나 똥오줌이 주로 쓰이지요. 전라도 지방에서는 마을 여인네들이 모두 산에 올라가 일제히 오줌
어머니가 천한 무수리 출신이지만 극진한 효자로 소문난 영조 임금은 계비 정순왕후와의 나이 차이가 무려 51살 차이로도 유명한 임금입니다. 1757년,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하자 영조는 부왕인 숙종의 유언에 따라 후궁 가운데서 새 왕비를 책봉하지 않고 1759년 6월 9일, 김한구의 딸인 정순왕후를 왕비로 간택하여 같은 해 6월 22일,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립니다. 아마도 부왕인 숙종께서 후궁이었다가 폐위된 장희빈과의 골치 아픈 일을 회상하여 절대 계비를 후궁 가운데서 뽑지 말라고 한 모양입니다. 당시 영조임금의 나이는 66살이고 정순왕후는 15살이었지요. 조선 개국 이후 가장 나이 차가 큰 혼인이었고 그녀가 왕비에 책봉될 때 부모는 물론 조부 김선경도 생존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1735년에 태어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보다 10살이나 어린 왕비였습니다. 그럼에도, 정순왕후가 왕비로 간택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간택 당시의 일화로 영조는 간택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는 답을 했지만 유독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