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에는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 곧 아악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인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이 있습니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神位)를 모신 종묘에 제사지낼 때 연주하는 음악을 말하며,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이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연주합니다. 또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은 공자·맹자·증자 등 중국 유학자와 설총·조광조·이황 등을 모시는 제사 때 쓰이는 음악입니다. 그런데 이 제례악들에는 민속악에서 쓰지 않는 특별한 악기들이 있습니다. 먼저 음악을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쓰이는 악기로는 박달나무 여섯 조각을 한쪽에 구멍을 뚫은 후 한데 묶어서 만든 “박(拍)”이 있습니다. 또 네모난 나무통 위에 구멍을 뚫어 나무방망이로 내리치는 “축”은 시작할 때 쓰는 악기이며, 호랑이를 본뜬 모양의 등줄기에 톱날처럼 생긴 톱니가 달린 “어”는 음악을 끝낼 때 쓰는 악기입니다. 어의 연주법은 호랑이 머리를 세 번 치고 꼬리 쪽으로 한 번 훑어 내리데 악기 모양도 생소하고 소리도 독특합니다. 또 ㄱ자 모양의 돌 16개를 두 단으로
오늘은 곡우날입니다. 곡우는 24절기의 여섯번째로 봄의 마지막 절기입니다. 청명과 입하(立夏) 사이에 들며 봄비(春雨)가 내려 백곡(百穀)을 기름지게 한다 하여 붙여진 말이지요. 그래서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가 마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곡우 무렵엔 못자리할 준비로 볍씨를 담그는데 볍씨를 담은 가마니는 솔가지로 덮어둡니다. 예전에는 밖에 나가 부정한 일을 당했거나 부정한 것을 본 사람은 집 앞에 와서 불을 놓아 악귀를 몰아낸 다음에 집안에 들어오고, 들어와서도 볍씨를 볼 수 없게 하였지요. 만일 부정한 사람이 볍씨를 보게 되면 싹이 트지 않고 농사를 망치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이날은 부부가 함께 자는 것을 꺼리는데, 이는 부부가 잠자리를 하면 토신(土神)이 질투하여 쭉정이 농사를 짓게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곡우 무렵엔 나무에 물이 많이 오릅니다. 곡우 물이 많은 나무로는 주로 산 다래, 자작나무, 박달나무 등으로 이들 수액은 몸에 좋다고 해서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에서는 깊은 산 속으로 곡우 물을 마시러 가는 풍속이 있지요. 경칩의 고로쇠 물
충북 보은군 속리산 들머리에 가면 나무 가운데서 유일하게 벼슬을 받은 ‘정이품소나무’가 있고 이웃마을엔 이 소나무의 정실부인인 ‘정부인소나무’가 있습니다. 이 두 소나무는 늙었지만 지난 2002년 충북산림환경연구원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러줘 후손 나무를 만들었습니다. 인공교배로 자식을 낳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암소나무는 어떻게 구분할까요? 보통 소나무는 한 갈래 굵은 줄기로 오르다가 위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숫소나무인데 유독 밑동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자란 소나무가 있습니다. 이를 모양새 때문에 암소나무로 부르는 것입니다. 정부인소나무는 땅 위 80cm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이 소나무는 가지가 낮고 풍성하게 퍼져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선 여인을 연상케 합니다. 물론 소나무 가운데는 땅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채를 펼친 모양으로 자란 반송(盤松)도 있습니다. 반송은 소나무의 운치를 만끽하면서도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조경수로 많이 쓰입니다. 조선다행송(朝鮮多行松), 천지송(千枝松), 만지송(萬枝松)으로도 부르는데 소나무 키의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진달래, 개나리, 산수유 꽃이 온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이때 시골 마을에 들어서서 정겨운 담 길을 걸으면 마음이 편해짐을 느낍니다. 시골 담들은 재료를 자연에서 찾습니다. 돌담, 흙담, 기와 조각담, 화초담, 싸리울타리, 대나무울타리, 탱자나무울타리까지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지요. 이런 담이나 울타리들은 대부분 키가 나지막합니다. 담 안으로 안방 문이 보이고, 팔짝 뛰어넘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들 담은 나와 남 사이에 벽을 만들려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소박한 경계를 표시한 것뿐입니다. 한옥 방문의 문틈에 적당히 바람이 드나들도록 문풍지를 단 것과 같은 이치지요. 또 담은 집안에서 밖을 볼 때 고개를 빼들지 않고도 바로 산과 들을 바라볼 수 있어서 자연과 늘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을 줍니다. 돌담에 쓰인 돌들을 보면 삐뚤삐뚤하고 크기도 들쭉날쭉한 그야말로 제멋대로 돌을 쌓은 느낌이 듭니다. 그냥 놔두면 아무 쓸모가 없을 돌을 모아 담을 쌓음으로써 그 돌들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지요. 억지로 규격화한 벽돌과는 그 차
“한복은 위험한 옷이라 저희 식당 출입을 금합니다.” 2011년 4월 13일 자 경향신문에는 희한한 제목의 기사가 올랐습니다. 내용인즉슨 한국 최고의 호텔 신라 뷔페레스토랑에 약속이 있어 영화 의상 제작으로 유명한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 씨가 한복을 입고 갔다가 “한복은 부피감이 있어 다른 사람들을 훼방할 수 있는 위험한 옷”이라는 말과 함께 식당 출입을 거부당해 발길을 돌려야 했다는 기사입니다. 신라호텔이 들어서 있는 자리는 이등박문을 추모하기 위한 절 박문사(博文寺)가 있었던 곳으로 이 절이 자리한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불렀습니다. 춘무는 이등박문의 호이고 박문사의 박문은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온 이름이지요. 조선의 원흉 이등박문을 위한 기도절은 그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되었습니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와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 친일부역자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정무총감 고다마 (兒玉秀雄)에 의해 세워진 박문사는 "조선 초대통감 이등박문의 뛰어난 업적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
경주에 있는 첨성대는 과연 무엇하던 곳이었을까요? 이를 둘러싸고 그동안 학계에서는 천문관측용이라거나 상징적인 건물, 또는 제단일 것이라는 등 여러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김봉규 한국천문연구원 전파천문연구본부장은 지난 7일 충남대에서 열린 한국천문학회 춘계 학술대회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ㆍ증보문헌비고 등 고서에 수록된 천문관측기록을 분석해 신라 첨성대가 천체를 관측하는 천문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 내용을 보면 첨성대가 세워진 때는 선덕여왕 말기인 640년쯤인데 선덕여왕이 임금에 오른 뒤부터 한동안 천문기록이 없다가 여왕이 죽은 뒤인 647년에 갑자기 천문기록이 많아진 것으로 나옵니다. 또 647년 이후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경주 지방의 별똥별 곧 유성(流星)이 떨어진 관측기록은 다섯 차례인데, 공교롭게도 이 별똥별들이 떨어진 곳은 첨성대에서 반지름 2㎞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541~640년에 3건에 불과하던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은 첨성대가 세워진 뒤인 641~740년에 38건이나 되었습니다. 이에 견주어 이 기간
“교수님 가운데는 영어가 안 되는 분이 분명히 계시거든요. 영어 못하는 교수와 영어에 자신 없어 하는 제자가 영어로 수업을 한다는데…. 학생도 교수도 모두 스트레스입니다.” 경향신문 4월 10일 자 인터넷판에 실린 "자살 대책 과제 뭔가… 전면 영어수업에 숨 막힌다” 기사에 나온 카이스트 학생의 말입니다. 최근 카이스트에서 학생 4명과 세계적 생명공학자인 교수 1명이 자살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자살 뒤에는 영어강의도 한 몫 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카이스트의 한상근 교수는 모든 강의를 우리말로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한 교수가 그런 선언을 한 까닭은 그렇잖아도 교수와 학생 사이의 인간적 접촉이 적은 판에 강의 마저 영어로 하면 삭막한 학생들의 정서를 더 삭막하게 만든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영어강의를 각 교수의 선택에 맡기고 대신 졸업을 위한 일정 학점 이상의 영어 수강을 제안했습니다. 지난해 실력있는 한 국어학박사가 국어과 교수 임용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영어면접이 탈락 원인이었습니다. 그는 임용시험을 보기 위해 비싼 영어특강까지 받았지만 결
"누렁소 허연 침 흘리며 써레질 하고 / 뒷산 뜸부기 해지도록 노래하던 고향 / 모내기 날 받아놓고 가물던 그때 / 앞집 아저씨 뒷집 삼촌 멱살 잡고 싸우셨지 / 논배미 물 대던 아저씨들 싸움소리 사라진 자리 / 밥값 한다고 못단 들어 대주고 / 못줄 잡던 코흘리개들 / 콤바인 이앙기 사가지고 돌아온 고향 / 써레 사라지고 / 기계음 소리 놀라 뜸부기도 가버린 들녘." - 이고야 "써레질 풍경" - 써레는 갈아놓은 논바닥의 흙덩이를 부수거나 바닥을 판판하게 고르는데 쓰는 농사도구입니다. 써레는 긴 나무토막에 둥글고 긴 이[齒] 6~10개를 갈퀴처럼 나란히 박고 위에는 손잡이를 가로로 대었지요. 이 써레는 소 멍에에 잡아 매어 소가 끌도록 했습니다. 몸체는 소나무를 쓰지만 갈퀴부분은 참나무나 박달나무처럼 단단한 나무를 깎아 박기도 했습니다. 흔히 논에서 쓰는 것을 '무논써레', 밭에서 쓰는 것을 '마른써레'라 합니다. 바짓가랭이가 흙범벅이 되면서 농부는 써레질을 합니다. 그러면 어디선가 뜸부기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오고, 소 부리는 농부의 "워~ 워~" 하는 걸쭉한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