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이 말은 한평생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자존을 위하여 싸우다 옥고로 순국한 남자현(1872. 12. 7~1933. 8. 22) 여사의 유언입니다.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던 남편 김영주가 왜군과 전투 중 죽고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3월 중국 요녕성 통화현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 가입, 1925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죽이려고 국내에 잠입한 적 있으며, 많은 애국지사 옥바라지를 했고, 병들고 상처받아 고생하는 애국청년들에게 항상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을 파악하려고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흰천에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하여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킨 일화도 있습니다. 여사는 20~30년대 만주 항일무장운동 진영의 유일한 여성대원으로 꼽힙니다. 의열활동,
조선시대는 왕비 ·왕세자 ·왕세자 빈 등을 책봉할 때 교명(敎命)과 책인(冊印)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교명은 책봉할 때 내리는 가르침 문서로 앞에는 그 사람의 재주와 덕을 얘기하고, 중간에는 관직에 임명하는 뜻을 말하며, 마지막에는 열심히 일하고, 바르게 경계하라는 글을 적습니다. 또 책인은 도장을 말하지요. 이렇게 쓴 교명은 두루마리로 만들어 뒤에 종이나 비단 같은 것으로 꾸미게 됩니다. 이것을 지금은 보통 표구(表具)라 하지만 표구는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고, 우리는 장황이라고 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교명은 임진왜란 이후인 인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것으로 모두 32개인데 이 가운데 28개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상설 전시관에서는 장조(사도세자가 죽은 뒤 붙여진 이름) 비인 헌경왕후 것만 볼 수 있습니다. 한 폭의 비단 그림을 보는 듯 화려한 교명을 보면서 조선시대의 장황(표구) 기술의 뛰어남을 느껴봅니다.
“자랑 자랑 왕이 자랑 / 저레 가는 검동 개야 / 이레 오는 검동 개야 / 우리 애기 재와 도라 / 느네 애기 재와 주마 / 아니 아니 재와 주민 / 질긴 질긴 총배로 / 손모가리 발모가리 / 걸려 매곡 걸려 매영 / 짚은 짚은 천지소에 / 뱉난 날은 드리치곡 / 비온 날은 내치키여” 위 노래는 제주도에서 아기를 애기구덕에 눕혀 놓고 부르는 자장가입니다. 노래는 검둥개에게 아기를 재워달라고 합니다. 만일 재워주지 않으면 손발을 묶어서 깊은 천지 연못에 빠뜨린다며 협박하지요. “애기구덕”은 제주에서 아기를 눕혀 재우는 바구니를 말합니다. 보통 아이를 낳아 사흘 뒤부터 구덕에 눕히기 시작하여 3살까지 키웁니다. 예전 제주 여성들은 아기를 낳고 몸조리할 여유도 없이 일터로 나가야 했습니다. 이때 아기를 눕혀놓고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애기구덕은 꼭 필요한 바구니였지요. 한쪽 발로 구덕을 흔들면서 다른 일을 하기도 하고, 구덕을 바닥에 놓아두고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동할 때는 아기를 구덕에 눕힌 채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이제 애기구덕을 짊어진 여성은 보기 어렵지만 애기구덕
삶에서 처음과 끝이 일치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3·1독립선언문을 기초한 33인 가운데 만해 한용운을 빼고는 모두 변절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런 점에서 삶이 일관되었다는 것은 크게 존경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의 하나가 바로 “백의정승”이라 불리는 조선 중기 문신 윤증(尹拯, 1629~1714)이지요. 그는 일생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에서 스무 번이나 벼슬을 내려주려 했지만 86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결코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특히 36살에 공좌좌랑 자리를 마다했으며, 40살에 전라도사, 57살에 이조참판, 68살에 공조판서, 81살에 우의정 자리를 주려 했지만 그는 전혀 벼슬자리를 탐내지 않았지요. 더구나 우의정 자리를 사양하는 상소를 열여덟 번이나 올리는 등 그의 말년은 벼슬과의 싸움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이러한 그를 보고 사람들은 “백의정승”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는 벼슬에 혐오감을 가진 은둔거사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당시 당쟁으로 날이 새던 조정에 나아가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한 때문입니다. 인조, 효종,
"대명천지 밝은 날에 어느 누가 보아줄까? 들어나 가세 들어나 가세 삼밭으로 들어나 가세 적은 삼대는 쓰러지고 굵은 삼대 춤을 춘다." 위 노랫말은 전남 지방에 전하는 “도령타령”입니다. 삼은 높이 자라 숨기에 안성맞춤이지요. 예부터 삼밭이라하면 남녀가 은밀히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 영조 때 김천택이 엮은 ≪청구영언(靑丘永言)≫에도 삼밭에서 벌어진 남녀 성행위를 나타내는 사설시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울 4대문의 하나인 숙정문(肅靖門)은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양주 북한산으로 통하는 숙정문 역시 지금 문을 닫아서 쓰지 않으니 언제부터 막았는지는 알 수 없다. 전하는 바로는 이 성문을 열어 두면 성 안에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 불어댄다 하여 이를 막았다 한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거기에 봉나무가 무성했는데 풍기문란의 온상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애교스런 요즘 시각으로 바꾸자면 우거진 삼밭과 봉밭은 남녀 간의 사랑 나누기 장소인 셈입니다.
“설중매 짓밟고 / 살 속으로 파고들던 바람 / 어느새 꽃샘추위 밀어내고 / 환한 봄바람으로 변신하던 날 / 끝내 하늘도 응고된 기다림 풀어 / 꿈으로 꿈으로 내려온다네 / 그 꿈 대동강 물도 다 녹여 / 흐르게 하나니.” - 박신영 “우수의 꿈” - 오늘은 입춘에 이어 24절기의 두 번째로 우수(雨水) 입니다. 우수는 말 그대로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뜻인데 이때가 되면 추운 북쪽지방의 대동강물도 풀린다고 했지요. 아직 추위가 남아있지만 저 멀리 산모퉁이에는 마파람(남풍:南風)이 향긋한 봄내음을 안고 달려오고 있을 겁니다. 꽁꽁 언 강물도 풀리듯 우수날은 불편했던 이웃과 환하게 웃는 그런 날이 되기를 비손해 봅니다. 예부터 우수 때 나누는 인사에 "꽃샘 잎샘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있으며 "꽃샘 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속담도 있지요. 이 꽃샘추위를 한자말로는 꽃 피는 것을 샘하여 아양을 떤다는 뜻을 담은 말로 화투연(花妬姸)이라고 합니다. 봄꽃이 피어 나기 전 마지막 겨울 추위가 선뜻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쌀쌀하지만 봄은
1937년 3월 충남 부여 규암면 외리 절터로 짐작되는 곳에서 농부가 보리밭을 갈다가 무늬가 있는 벽돌을 발견했습니다. 이 무늬벽돌은 백제 말기인 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정 사각형에 가까우며, 가로 세로 길이가 29cm 안팎, 두께가 4cm입니다. 이 무늬벽돌 표면에는 각각 연화무늬(蓮花紋), 와운무늬(渦雲紋, 소용돌이치는 구름), 반룡무늬(蟠龍紋, 승천하지 못한 용), 산경무늬(山景紋, 산모양 무늬) 등 8종의 무늬가 돋을새김(부조/浮彫) 되었는데, 이 덕에 백제 문화가 삼국시대 세 나라 가운데서 단연 뛰어남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산무늬벽돌은 동글동글한 산 모양이 더 없이 부드러우며, 살짝 두드러진 돋을새김(양각)에 한 겹 얇은 테두리를 둘러 현대적 디자인 감각마저 느끼게 해줍니다. 이러한 무늬 하나하나는 별 의미가 없어 보여도 여럿의 산 모양이 어울리면 우락부락 하지 않은 곡선미가 자연스럽고 완만한 전형적인 한국의 산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게 특징이지요. 이 벽돌은 네 모서리가 각기 홈이 파여 여러 무늬벽돌을 연결하여 깔
오늘은 한해 가운데 보름달이 가장 크고 밝다는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은 예부터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비손하며 점쳐보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동국세시기≫에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운수가 좋다."고 하여 이날은 남녀노소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저마다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날 풍속에 더위팔기'賣暑'라는 것이 있는데 이유원의 ≪임하필기≫에서는 이를 두고 " 당(唐)ㆍ송(宋) 사람들은 어리석음을 팔았으니 이것은 더위팔기와 같은 것이다"라고 그 유래를 밝히고 있으며 ‘다리밟기(踏橋)'는 고려 풍속으로 다리 병을 물리치기 위한 놀이이고, 보름달의 두껍고 엷은 상태를 가지고 그해의 흉,풍년을 점쳤으며, 곡식 이삭 늘어놓기, 부럼 깨물기, 줄다리기 놀이 등은 모두 신라 때부터 이어져온 명절놀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월대보름 먹거리로는 오곡밥과 나물을 들 수 있는데 멥쌀·찹쌀·조·수수·보리 등 여러 가지 곡물을 넣어 지은 밥에 고
“피마자잎 무말랭이 호박오가리 / 갓 짠 들기름 향 머금은 나물 / 거친 기침 몰아쉬는 할배 저녁 밥상에 오르면 / 싸리울 마당 안 / 삽사리 살며시 코를 내밀고 / 작은 오두막은 금새 고소함이라 / 초승달 밤하늘 뭇별들 /이슬처럼 마당에 내려 앉는 밤/ 나주소반 위 나물 한 접시 /할배 기침 걷어주는 막걸리 한잔” - 이영옥 “나물 ” - 해소 기침 해대는 할아버지가 들기름 고소한 나물 한 접시 앞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정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고기 안주가 아니라도 한 겨울 어머니 손끝에서 무쳐 나오는 갖은 나물은 밥반찬으로도 그만이고 할아버지 막걸리 안주로도 으뜸이지요. 지금처럼 사계절 채소가 넘쳐나지 않던 시절 나물은 한겨울 밥상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김장을 마치고나면 무청을 짚으로 엮어 담장 옆에 나란히 걸고 단물 오른 무는 얇게 썰어 채반에 펼쳐 말리지요. 그 밖에도 호박, 가지, 피마자잎사귀, 고구마순, 취나물, 고사리 따위의 나물들을 깨끗이 손질하여 햇볕에 말려두면 겨울 한철 훌륭한 밥상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갖은 나물에 오곡밥을 먹는 보름입니다. 가을 내내 갈무리 해두었던 나물을 꺼내어 고소한 들기름에 갖은 양념을 넣
충청북도 진천군 보련산 자락에는 보탑사(寶塔寺)라는 절이 있고 그 절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3층목탑이 있습니다. 이 목탑은 대목장 신영훈 선생과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기술자들이 황룡사 9층목탑 복원의 꿈을 안고,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탑을 만든 것이지요. 상륜부까지의 높이가 무려 52.7m인 이 목탑은 현대 고층아파트 14층과 맞먹는 크기입니다. 황룡사 9층목탑을 본으로 만든 이 3층목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모두 29개이며, 강원도산 소나무(적송)로 단 한 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전통방식을 고수하여 지었습니다. 목탑 1층의 약사불전, 극락보전, 대웅보전, 적광보전 편액이 부처님을 모신 곳임을 말해주고, 2층의 구장전, 수다라전, 법보전, 보장전 편액은 이곳이 경전을 모시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또 3층의 용화보전, 대자보전, 미륵보전, 도솔타전의 편액은 미륵전임을 말해주는데 결국 탑 속에 여러 절이 있는 것이지요. “뭣 모르고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완성을 보게 됐지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미리 알았다면 시작도 못했을 것입니다. 제 지식과 이 시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