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9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에서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 한기를 이장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이 무덤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무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무덤을 헤쳐나가자 죽은 남편을 향해 애끓는 사랑과 비통함을 토하는 편지가 나왔습니다. 유물들을 통해 밝혀진 것은 무덤에 묻힌 이가 1586년 31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은 이응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응태의 아내 곧 원이엄마는 한지에 한글로 편지를 써서 망자의 가슴에 덮어둔 것입니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하얘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시 이 편지가 발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며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요. 그런데 무덤에서 나온 한글 편지는 1586년에 쓴 원이엄마 편지보다도 앞선 15C중반~16C전반에 쓴 것으로 보이는 군관 나신걸(羅臣傑)의 편지도 있습니다. “분(화장품)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마가 끝나자마자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지요. 더위는 세상을 점령했고 밤새 열대야에 시달리고, 낮에는 에어컨 바람 탓에 냉방병에 걸릴 지경이지요. 이러한 불볕더위 속에서도 코로나19 탓에 휴가도 제대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 하나를 선사합니다. 바로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박연폭포>가 그 그것이지요. 작품의 크기는 세로 119.7㎝, 가로 52.2㎝인데 겸재가 그린 진경산수화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진경산수화의 진수라고 평가되는 그림은 《박연폭포》와 함께 《금강전도》, 《인왕제색도》가 겸재의 3대 명작으로 꼽히지요. 특히 이 《박연폭포》는 보는 그림이 아니라 듣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우렛소리를 거느린 높이 37m 폭포의 물줄기는 단박에 내리그은 정선의 붓끝에서 세차게 귓전을 때립니다. 특히 길게 과장해서 그려진 폭포수는 그림 아래 개미만큼 작게 그려진 선비와 시동 때문에 크게 대비됩니다. 그 대비는 소리의 크기를 인물의 크기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16년 전인 1905년 오늘(7월 29일)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가쓰라-태프트협약(Katsura-Taft Agreement)”이 맺어진 날입니다. “가쓰라-태프트협약”은 그해 7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은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타로가 회담하여, 미국의 대필리핀 권익과 일본의 대조선 권익을 상호 교환 조건으로 승인한 밀약입니다. 그 협약의 중심 내용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일본이 양해하고,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보호권 확립을 양해하는 일입니다. 이후 이 비밀 협정을 바탕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었으며,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 병합해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해 9월 미국은 이를 승인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종은 미 국무부에 “우리는 미국을 형님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하오.”라는 말을 전했을 정도로 미국이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 줄 것을 기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일본에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했으면 좋겠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고 하지요. 또 그의 딸 엘리스가 조선에 와서 조미 우호를 위해 축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월 뉴스엔 “대한체육회가 이른바 '맷값 폭행'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최철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 당선인(마이트앤메인 대표)의 인준을 최종 거부했다.”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보전에는 “이때 본읍 김좌수가 흥부를 불러 하는 말이, ‘돈 삼십 냥을 줄 것이니 내대신 감영에 가서 매를 맞고 오라.’ 흥부 생각하되, ‘삼십 냥을 받아 열냥 어치 양식 사고 닷냥 어치 반찬 사고 닷냥 어치 나무 사고 열 냥이 남거든 매 맞고 와서 몸조섭하리라.’“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매품팔이 대목이죠. 실제 조선시대에 이런 매품팔이가 있었을까요? 《승정원일기》에 “돈을 받고 대신 곤장을 맞는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매품팔이가 있었던 게 분명하지요. 특히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장유승 책임연구원이 쓴 글에 보면 조선후기 문인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나오는 직업적 매품팔이가 소개됩니다. 그런데 아내가 채근하는 바람에 고작 7냥씩 받고 하루 세 번이나 매품을 팔았던 사람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겨우 7냥? 그런데 조선시대 법전에 곤장 백 대는 7냥의 벌금으로 대납할 수 있었기에 흥부전의 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무를 다루어 집 짓는 일이나 가구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목수 또는 목장(木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목장에는 크게 둘로 나누어 대목장과 소목장이 있습니다. 《경국대전》에는 대목장과 소목장의 구별 없이 목장으로만 기록됐으나 고려시대에도 집을 짓고 가구를 짜는 두 분야의 영역은 따로 있었지요. 이 가운데 먼저 대목장(大木匠)은 큰 건물 곧 궁궐이나 절 그리고 집을 짓는 책임자를 말하는데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해 전통을 잇도록 합니다. 목조건물을 짓는 데는 목수 외에 기와장이(蓋匠)ㆍ흙벽장이(이장-泥匠)ㆍ단청장(丹靑匠-가칠장假漆匠)ㆍ석수(石手) 등과 긴밀히 협조해야 하지만, 대목장이 건물을 설계하고 공사의 감리까지 겸하는 까닭에 건축에 있어서 총책임자입니다. 그런가 하면 집 지을 때 문짝ㆍ반자ㆍ난간을 만들고 장롱 따위 가구를 만드는 소목장(小木匠)도 있습니다. 소목장 역시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지요. 예전에는 궁궐이나 절을 짓는 일이 아주 중요했기에 이 목장들에게 벼슬도 내렸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통일신라의 관직을 보면 도시행정을 관장하는 전읍서(典邑署)에 전문직으로서의 목수가 상당하였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판소리학회 회장을 지낸 군산대학교 최동현 교수는 그의 책 《소리꾼, 득음에 바치는 일생》에서 “판소리 창자들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득음’이다.”라고 말합니다. 판소리는 음악적 요소가 가장 중요한 예술이고, 또 판소리에서 사용하는 ‘소리’를 만드는 과정이 길고 험난하기 때문인데, 소리꾼이 훈련하는 과정에서 온갖 고초를 겪는 것이 다 이 득음 때문입니다. ‘득음(得音)’이란 곧 ‘소리를 얻는 것’으로 본래 소리꾼이 가지지 못한 소리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판소리에서 소리꾼들이 쓰는 소리는 매우 독특한 것으로 바로 목쉰 소리를 말합니다. 판소리는 큰 음량으로 길게는 8시간 동안 여러 사람 앞에서 불러야 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소리를 해도 괜찮도록 단련해서 목이 쉰 상태를 만들어 버립니다. 곧 성대에 상처를 내서 흉터투성이인 채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칠고 쉰 목소리를 판소리에서는 ‘수리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수리’란 으뜸이라는 뜻이어서 판소리에서 으뜸가는 성음이라는 뜻인데 다만, 그 거친 소리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맑은소리는 ‘천구성’이라고 해서 더욱 훌륭한 성음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배 롱 나 무 - 김창제 서러워서 붉은 게 아니라 붉어서 서럽다 했지 오래도록 붉어서 오래도록 서러운 여름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은 배롱나무를 일러 “어제저녁에 꽃 한 송이 떨어지고(昨夕一花衰), 오늘 아침에 한 송이가 피어(今朝一花開), 서로 일백일을 바라보니(相看一百日), 너를 대하여 기분 좋게 한잔하리라.”라고 했다고 한다. 옛 선비들은 배롱나무가 나무껍질 없이 매끈한 몸매를 한 모습이 청렴결백한 선비를 상징한다거나 꽃 피는 100일 동안 마음을 정화하고 학문을 갈고닦으라는 뜻으로 서원이나 향교에 배롱나무를 심었다. 작지만 붉은 꽃이 오랫동안 피는 배롱나무는 나무껍질이 미끄럽다고 하여 원숭이도 미끄러지는 나무라고도 하며, 그 붉은 꽃이 100일 동안 핀다고 하여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한 번 핀 붉은꽃이 백일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연달아서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포도송이처럼 한 송이의 꽃이 아래부터 위까지 피는데 한 송이가 며칠씩 피어있으니 전체적으로는 백일동안 붉은 꽃들이 계속해서 피어있음으로 백일동안 화사한 꽃으로 장식하는 것이다. 한 시인은 “눈물 나는 날 고개를 돌리면 저만큼 보이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우리 겨레가 즐겼던 명절 가운데 하나인 유두(流頭 : 음력 6월 15일)입니다. 유두는 '동류두목욕(東流頭沐浴)'의 준말인데 신라 때부터 있었던 풍속이며, 가장 원기가 왕성한 곳인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 날입니다. 이렇게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면 액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졌는데, 유두를 신라 때 이두로 '소두'(머리 빗다), '수두'라고도 썼다고 합니다. 수두란 물마리(마리는 머리의 옛말)로 '물맞이'라는 뜻인데 요즘도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에서는 유두를 '물맞이'라고 부른다지요. 유두의 대표적인 풍속은 유두천신(流頭薦新)입니다. 이는 유두날 아침 유두면, 상화떡, 연병, 수단 등의 음식과, 피, 조, 벼, 콩 따위의 여러 가지 곡식을 참외나 오이, 수박 등과 함께 사당에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하지요. 옛날에는 새 과일이 나도 자기가 먼저 먹지 않고 돌아가신 조상에게 올린 다음에 먹었습니다. 농촌에서는 밀가루로 떡을 만들고 참외나 기다란 생선 따위로 음식을 장만하여 논의 물꼬와 밭 가운데에 차려놓고 농사신에게 풍년을 비는 고사를 지내며, 자기의 논밭 하나, 하나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상엔 온통 더위 천지 광한전(달나라에 있다는 궁전) 월궁으로 달아날 재주 없으니 설악산 폭포 생각나고 풍혈 있는 빙산이 그리워라” 이는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이 시문을 모아 펴낸 《동문선(東文選)》이란 책에 나오는 시입니다. 온통 더위 천지에 설악산 폭포와 풍혈(늘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나오는 바위틈)이 있는 빙산이 그립다고 노래합니다. 이제 무더위가 절정에 올라 어제는 중복(中伏)이었고, 오늘은 24절기의 열두째 대서(大暑)입니다. 이때는 무더위가 가장 심해서 "더위로 염소뿔이 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지요. 그런데 조선시대 선비들은 한여름 지금보다 훨씬 더 무더위와 힘겹게 싸웠습니다. 함부로 의관을 벗어던질 수 없는 법도가 있었으니 겨우 냇가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비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더위를 멀리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대자리 위에서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것입니다. 심지어 남명 조식 같은 사람은 제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에 올랐고, 추사 김정희는 한여름 북한산에 올라 북한산수순비 탁본을 해올 정도였습니다. 어쩌면 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순조 16년(1816년) 7월 된더위가 숨을 헐떡거리게 하는 뜨거운 여름날이었습니다. 금석학과 고증학에 한창 심취하고 있던 31살의 추사 김정희는 동무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있는 수수께끼의 옛 비석을 조사ㆍ판독하기 위하여 가파른 암벽을 기어 올라갔지요. 그동안 이 빗돌은 조선 초 태조의 왕사 무학대사와 관련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끼 속의 비문을 짚어 나가다가 깜짝 놀라게 됩니다. 비문 내용이 무학대사와 전혀 다른 1천 수백 년 전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추사는 빗돌을 확인하고 얼마나 기뻤던지 빗돌 옆에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다. 병자년 7월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어보았다.”라는 발문을 쓰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인 1817년 6월 8일(양력 7월 21일) 조인영과 함께 다시 비봉에 올랐고,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상세하게 살펴보았는데, 남아 있는 글자가 68자였다.”라고 덧붙입니다. 지금이라면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문화재 현상 변경”이란 죄목으로 처벌을 받았겠지만, 당시 두루마기 차림으로 무더운 여름날 북한산 비봉까지 올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