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의 진흥을 위해 운영되는 사단법인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서울 세종로 프레스센터 1층 로비에는 커다랗게 확대한 대한매일신보를 배경으로 대한매일신보를 만들었던 양기탁 선생과 배설(베델) 선생 흉상이 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에 창간되어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고 민족의식을 드높여 신교육에 앞장섰으며 애국계몽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던 신문이지요. 83년 전 오늘(4월 19일)은 양기탁 선생이 병을 얻어 중국 강소성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 날입니다. 선생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펼쳐진 국권 회복 운동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중심이 되어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양기탁 선생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 혐의를 조작하여 구속하였고, 구금된 지 64일 만인 1908년 9월 25일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그 새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도 식었고, 친일배의 농간으로 의연금 일부도 빼앗기고 말았지요. 선생은 언론을 통해 배일사상을 드높였으며, 대한제국 당시 독립협회, 신민회 등의 창건에 참여하였고, 1911년 105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울 엄마 - 황선복 울 엄마 누운 무덤가엔 허리 굽은 할미꽃이 짠하다 소쩍새 소리 서러워라 이웃한 제비꽃도 슬프다 이승 떠나신지 이미 오래건만 차마 잊지 못한 자식 그리워 빨간 산딸기 조롱조롱 매달아 산길마다 호롱불 밝히셨나 보다 하얀 찔레꽃 향기가 깊게 퍼진다. 중국 연변 동포 김영자 작가는 ‘우리문화신문’에 장편실화문학집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를 인기리에 연재했고, 드디어 그 문학집을 지지난해 책으로 엮어냈다. 이 작품은 중국 연변의 한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로 중국조선족의 백년이주사와 정착 그리고 번영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이 책의 펴냄에 즈음하여 연변신시학회 안생 회장은 “위대한 모성애는 우리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스며 있으며 가장 부드럽고 가장 여린 곳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어 우리로 하여금 생활에 대한 끈질긴 추구와 고난과 시련에 대한 참고 견딤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했다.”라고 평했다. 그 글에 보면 아버지가 일찍 저 멀리 하늘나라로 떠나갔는데 허약한 엄마는 연 며칠 울다가 크게 수척해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돌도 채 안 되는 어린 아기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굳건한 신념으로 가지고 많은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을 키워낸 이가 오세창 선생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은 아버지 오경석에게 이어받은 골동서화 감식안과 민족정신은 그의 집안뿐만 아니라 전형필 등을 민족문화유산 지킴이로 만들어냈지요. 또 그는 아버지와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펴냈는데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사전입니다. “근래에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서화(珍籍書畵)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 오세창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경하할 일이로다. 십수 년 아래로 고래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는 것이 없을 것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東購西買)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175점에 달하였는데, 그중 150점은 그림이다.” 이는 1915년 1월 13일 치 ‘매일신보’에 ‘별견서화총(瞥見書畵叢)’이라는 제목으로 난 기사 내용인데 선생이 이렇게 동서로 뛰어다니며 골동 서화를 사들인 까닭은 조선왕조가 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처음에 임금이 주야 측후기(晝夜測候器, 밤낮으로 기상의 상태를 알기 위해 천문의 이동이나 천기의 변화를 관측하는 기기)를 만들기를 명하여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는데, 이를 완성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모두 네 벌인데, 하나는 궁궐 안에 둔 것으로 구름과 용으로 장식하였으며, 나머지 셋은 발이 있어 바퀴자루[輪柄]를 받고 기둥을 세워 정극환(定極環, 별의 운동을 관측하는 기구)을 받들게 하였다.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주어 점후(占候, 구름의 모양ㆍ빛ㆍ움직임 등을 보고 길흉을 보는 점)에 쓰게 하고, 둘은 함길ㆍ평안 두 도의 절제사 영에 나눠주어 경비하는 일에 쓰게 하였다.” 이는 《세종실록》 19년(1437년) 4월 15일 기록으로 낮과 밤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천문관측기기 곧 ‘일성정시의’를 만들어 궁궐 안과 서운관에 설치하고, 함길ㆍ평안 절제사 영에 나눠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성정시의’는 해시계의 원리와 북극성을 중심으로 규칙적으로 도는 별의 회전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날씨만 좋다면 밤낮 모두 쓸 수 있는 시계입니다. 지름 68㎝로 구리로 만들어진 일성정시의는 한양의 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오늘은 ‘만주 호랑이’라 불렸던 독립지사 김동삼 선생이 위처럼 유언을 남기고 감옥에서 순국하신 날입니다. 바로 84년 전인 1937년 4월 13일이지요. 평소 그를 존경하던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자신이 머물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장례를 치르고, 주검을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에 뿌렸습니다. 한용운이 일생에 눈물을 흘린 적이 이때 한 번뿐이라는 일화는 김동삼 선생이 어떤 분인지를 잘 말해줍니다. 선생은 1878년 6월 23일, 안동의 내앞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내앞마을(川前)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사에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한 곳으로 무려 한 마을에서 20명이 넘는 인물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은 바 있으며 1910년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사람이 150명에 이를 정도로 독립운동의 산실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대단한 고장입니다. 선생은 만주지방 무장투쟁의 지도자로서 무오독립선언과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주도했습니다. 특히 1911년 만주지역에 독립운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에서 이시애의 반란군과 관군 사이에서 벌어진 1467년의 ‘만령전투’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령전투 당시 반군의 주력이었던 익속군은 처음엔 관군을 압도했다고 하지요. 1467년 5월, 길주에서 시작된 반란은 강원도 철원까지 진출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승기가 반군 쪽으로 기울던 차에 관군은 화차를 등장시켜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결국 이시애는 반란 3달 만에 관군에게 체포되어 8월 12일 효수되었지요. 2008년 영화 <신기전>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한 신기전은 1448년(세종 30년) 고려말 최무선이 만든 로켓형 화기인 ‘주화(走火)’를 개량한 것으로 신기전(大神機箭),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중신기전(中神機箭), 소신기전(小神機箭) 등의 여러 종류가 있었지요. 신기전은 자체 추진력으로 날아가므로 발사장치가 없어도 되지만 문종이 화차를 개발함으로써 발사각도와 방향을 정확히 잡게 되고 한 번에 많은 신기전을 발사할 수 있게 되어 신기전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이 화차가 바로 이시애난을 평정할 수 있었던 신의 한 수였습니다. 이렇게 큰 위세를 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2016년 ‘제주 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올랐고, 2017년 5월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수심 10m 이내의 얕은 바다에서 소라ㆍ전복ㆍ미역ㆍ톳ㆍ우뭇가사리 등을 채취하며, 가끔 작살로 물고기를 잡기도 하는 해녀는 전 세계에서 제주와 울릉도, 일본 일부 지역에만 있다고 하지요. 이 해녀를 옛날에는 잠녀(潛女) 혹은 잠수(潛嫂)라 했는데 300년 전인 1702년의 그림에 잠녀의 모습이 있습니다. 국립제주박물관에 가면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화공 김남길(金南吉)을 시켜 그린 기록화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보물 제652-6호)>가 있는데 18세기 초 제주의 삶과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여기에 수록된 그림 41면 가운데 제주 용연에서의 뱃놀이 모습을 그린 ‘병담범주(屛潭泛舟)’라는 그림에 바로 잠녀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병담범주’의 가운데 오른쪽 부분을 확대해서 보면 용두(龍頭, 용두암)라는 글자가 선명하고, 그 옆에 잠녀(潛女)라는 한자도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잠녀 다섯 5명이 테왁이라는 도구를 물 위에 띄워놓고 물질하는 모습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말뚝이 가라사대 - 이 달 균 어허, 할 말 많은 세상, 그럴수록 더욱 입을 닫으시오. 조목조목 대꾸해봐야 쇠귀에 경 읽기니 침묵이 상수요 대신 이놈 말뚝이 잘난 놈 욕도 좀 하고 못난 놈 편에서 슬쩍 훈수도 두려 했는데 “이놈 말뚝아! 이놈 말뚝아! 이놈 말뚝아!” “예에에. 이 제미를 붙을 양반인지 좆반인지 허리 꺽어 절반인지 개다리 소반인지 꾸레 이전에 백반인지 말뚝아 꼴뚝아 밭 가운데 쇠뚝아 오뉴월에 말뚝아 잔대뚝에 메뚝아 부러진 다리 절뚝아 호도엿 장사 오는데 할애비 찾듯 왜 이리 찾소?” 이는 한국 전통탈춤의 하나인 봉산탈춤 제6과장 <양반과 말뚝이 춤>에서 양반이 말뚝이를 찾자 말뚝이가 양반들을 조롱하는 사설이다. 한국 탈춤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말하라면 당연히 말뚝이다. 말뚝이는 소외당하는 백성의 대변자로 나서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대사로 양반을 거침없이 비꼰다. 특히 말뚝이는 양반을 희화화하는 것을 넘어서서 봉건 질서까지 신랄하게 비판해댄다. 그래서 양반들에게 고통받고도 울분을 배출할 데가 없던 소외당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말뚝이는 탈춤에서 신이 난다. 여기 이달균 시인은 그의 사설시조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아이가 학업에 소홀하여 나무랐는데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잠시 후 일어나 나가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동문 밖에 나갔다. 곧바로 종을 보내 불러오게 했는데 돌아온 뒤 사립문 밖에서 머뭇거리고 들어오지 않았다. (중략) 묵재가 그 불손함을 꾸짖으며 친히 데리고 들어오면서 그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다섯 번 때렸다. 방에 들어오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이에 손자가 엎드려 울었다.” 위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문건(李文楗, 1494∼1547)이 쓴 《양아록(養兒錄)》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문건은 손자를 가르치며,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때렸습니다. 물론 지나친 감정의 체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때린 뒤 손자가 한참을 엎드려 울자 자신도 울고 싶은 마음뿐이라 고백합니다. 이문건은 장조카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귀양살이하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손자를 가르침에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고 부인에게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았습니다. 이문건이 쓴 또 다른 책 《묵재일기(默齋日記)》에 보면 손자가 6살 이전에는 어머니가 사는 안방에서 지냈지만 6살이 되면 자신의 거처에 오게 하여 항상 돌보며 가르쳤고, 이따금 밖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왕실에서 쓰던 도장으로는 국새와 어보가 있습니다. ‘국새는(國璽)’는 외교문서를 비롯한 각종 공공문서에 공적 목적으로 쓰였지요. 이와는 달리 ‘어보(御寶)’는 주로 존호(尊號,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하여 올리던 이름)과 시호(諡號,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이 품계를 높여주던 이름)를 올리는 등 궁중 의식을 치를 때 의례용으로 쓰던 도장입니다. 그런데 국새는 정변이나 전쟁 등으로 대부분 불타거나 없어졌지만 어보는 종묘에 보관했기에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어보와 국새의 모양과 크기, 재료는 거의 비슷합니다. 어보의 높이는 대략 10센티미터, 무게는 2~7킬로그램 정도며, 재료로는 금ㆍ은ㆍ옥 등이 쓰입니다. 대부분 사각 몸체에 거북이나 용 모양의 손잡이에 끈이 달린 모습인데 거북 모양의 손잡이는 임금을 상징하고, 황제의 상징으로는 용이 쓰였습니다. 어보에 새긴 글자는 임금ㆍ왕비ㆍ세자ㆍ세자빈 등의 시호(추증한 이름)나 존호(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하여 올리던 이름), 휘호 등을 새겼는데 적게는 4자에서 많게는 100자가 넘는 것도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조선 왕실의 어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