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출구전략. 어떤 상황에서 빠져나갈 때 쓰는 전략이다. 전진보다 후퇴가 더 어려울 때가 있듯이,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무사히 탈출하기는 무척 어렵다. 특히 양자관계가 아니라 셋 이상이 얽힌 다자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조선, 명, 일본이 전쟁을 벌인 임진왜란이 그런 상황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며 어차피 확실한 승부를 내기는 어려워졌다. 남은 것은 서로 적당히 체면을 지키며 본국으로 철수하는 것이었지만,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전쟁보다 어려운 것이 강화 협상이었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연구교수인 김경태가 쓴 이 책, 《허세와 타협: 임진왜란을 둘러싼 삼국의 협상》은 이런 딜레마에 처했던 세 나라의 상황을 자세히 보여준다. 협상에서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허세다. 가진 것이 없어도 있는 척해야 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허세만 부릴 수는 없다. 결국 타협을 해야 한다. 책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된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건너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래는 조선에 직접 건너와 일본군을 지휘할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끝내 조선으로 넘어오지 않았고, 현장에 있는 장수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2018년, 향년 82살로 별세한 황병기 명인은 한국 가야금계의 독보적인 장인으로, 대표작 ‘미궁’을 비롯해 신라음악을 되살린 ‘침향무’ 등 많은 실험적인 곡을 작곡해 가야금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런 그가 가장 아끼던 책이 있었으니, 바로 《논어》다. 여러 가지 번역서를 참고해서 《논어》를 정독하고, 보석처럼 마음에 새길 말씀만 100문장을 모아 그만의 ‘논어 명언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외출할 때 품에 지니고 다니며 읽었다. 이 책은 논어 명문장에 이런저런 생각을 곁들여 쓴 수필 모음집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황병기 명인을 만든 철학의 팔 할이 《논어》라는 생각이 든다. 거장에게는 항상 그의 삶과 작품을 추동하는 철학이 있다. 그는 《논어》를 통해 언행을 정제했고, 늘 수양하며 구도하듯 음악을 했다. (p.158) 옛것을 익히어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스승이 될 수 있다. -<위정>편 11장-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작정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 말고 옛것을 충분히 익힌 후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옛것을 모르고 새로운 것만 좇으면 허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황병기 명인의 여정 또한 그랬다. 19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8) 공자의 《시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난 일의 잘못을 주의하여 뒷날에 어려움이 없도록 조심한다.” 이 구절이 바로 《징비록》을 쓴 이유이다. 징계할 징(徵). 삼갈 비(毖). 부끄러운 잘못을 스스로 꾸짖고 앞으로 삼갈 바를 살펴본다는 뜻이다. 승리를 복기하기는 쉬워도, 패배의 자취를 더듬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스럽다. 특히 한 나라의 정승으로, 임금 다음으로 그 패전에 책임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징비록》을 쓴 유성룡의 ‘책임지는 용기’가 대단한 까닭이다. 최지운이 쓴 이 책, 《책임지는 용기, 징비록》은 망국이 눈앞에 닥친 절체절명의 시기, 전쟁을 총지휘하며 이끌었던 한 재상의 ‘전쟁회고록’을 알기 쉽게 풀어쓴 책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전후 사정뿐만 아니라, 최고위급 관료가 아니라면 알기 힘든 세세한 일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훗날 숙종은 책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기도 했다. 전쟁을 총지휘하는 자리에 있었던 유성룡은 모든 사건을 보고받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누구보다 전쟁에 대해 총체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전쟁을 가장 높은 시점으로 조망할 수 있었던 이런 인물이 붓을 들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한류(韓流). 우리 문화가 파도처럼 흘러가 세계를 매료시키는 현상이다. 드라마에서 음악, 그리고 이제는 소설까지, 전 세계로 퍼져나간 우리 문화는 현지에서 변주를 거듭하며 문화 다양성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러한 역동성이 옛날에도 있었을까? 물론이다. 그것도 상당히 먼 옛날에 말이다. 바로 일본에 백제문화를 전파한 아직기와 왕인이 그 처음이다. 이들 덕분에 아직도 일본에는 백제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일찍이 왜는 백제와 가까이 지내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백제 근초고왕은 왜왕에게 ‘칠지도’라는 칼을 내려주기도 했다. 이런 교류의 연장선에서 백제에서 학문으로 이름 높던 박사였던 아직기는 임금의 명으로 왜로 파견되었다. 아직기를 왜로 보낸 임금은 정확한 기록이 없어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근초고왕이나 근수구왕, 아신왕 가운데 아신왕이 가장 유력한 설로 인정받고 있다. 아신왕 때 왜와 교류가 무척 활발했기 때문이다. 아직기는 말 두 필과 칼, 거울을 가지고 왜로 건너갔다. 왜왕에게 말 타는 법과 기르는 법을, 토도치랑자 왕자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건너가 토도치랑자 왕자와 왜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안종약. 이 이름은 아마 모두에게 퍽 낯설 것이다. 안종약은 조선 초부터 인조 임금 때까지의 신비로운 야사(野史)나 일화를 모아 놓은 《대동야승》에 ‘귀신을 알아보고 퇴치한’ 선비로 실려있는 인물이다. 지금도 귀신 이야기는 지나가던 사람까지 솔깃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 알 수 없는 두려움, 공포란 감정에 끌리는 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현실적인’ 일상에, 비현실성을 지닌 비일상적인 이야기는 그 자체로 숨통을 틔워주기도 한다. 박민호가 쓴 이 책, 《귀신보다 더 귀신 같은 안종약》은 《대동야승》에 실린 ‘귀신을 알아보고 퇴치한 안종약’이라는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편집한 책이다. 《대동야승》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쓴 책을 모아 놓은 책 모음으로, 안종약 이야기는 그 가운데 《용재총화》에 실려있다. 《용재총화》는 조선 시대 학자 용재 성현이 지은 책인데, 민간 풍속이나 역사, 지리, 종교, 음악 등 문화 전반을 다룬다. 유명인들의 일화나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아 당대 문화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안종약은 학문이 높아 행동이 떳떳하고 남한테 정직했고, 덕은 깊어 마음이 깨끗하고 자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그림은 시대를 보여준다. 그림이 담아낸 그 시대의 모습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귀히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당대의 미감과 창의성을 고스란히 담아낸 옛 그림들을 보노라면, 오랜 세월을 뒤로하고 그것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퍽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탁현규가 쓴 이 책, 《그림소담》은 월간 <디자인>과 <행복이 가득한 집>에 연재한 그림 가운데 간송미술관 소장품만 가려 뽑아 편집한 것이다. 옛 그림들을 선인들이 그림 소재로 즐겨 사용하였던 일곱 가지 주제인 ‘봄바람’, ‘푸른 솔’, ‘풍류’ 등에 따라 분류해 은은한 감성을 더했다.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문화유산을 보유한 사립 박물관이다. 그 소장품만으로 한국 미술사를 쓸 수 있을 만큼 으뜸 수준의 유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간송 선생은 한국문화가 짓밟히던 참담한 시기에 전 재산 십만 석을 우리 미술품을 지키는 데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렇게 작품을 지켜낸 덕분에 ‘진경 시대’라는 우리 미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탄생할 수 있었다.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세워지면서 합류한 스물여섯살의 신진학자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서울은 유난히 궁궐이 많은 도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그리고 경희궁에 이르기까지 다섯 곳이나 있다. 게다가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세계적으로 의미를 인정받았다. 역사학자 한영우가 쓴 이 책,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전문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책이다. 역사 연구와 교육에서 현장에 관한 관심과 서술이 뜻밖에 모자라 궁궐을 다룬 수준 높은 연구서가 없을뿐더러, 본인을 포함한 역사학도들이 궁궐사를 외면해 온 현실에 일말의 책임을 느껴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자연과 아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창덕궁의 매력을 주목한다. 위압감을 주지 않고 누구나 살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게 하는, 극히 인간적이고 안락한 궁전이라는 것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니, 자연을 듬뿍 담은 자연스러운 궁궐에 끌렸던 것은 역대 임금도 인지상정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조선 임금은 경복궁보다 창덕궁과 창경궁에 훨씬 많이 머물렀다. 경복궁은 태조 말년에 왕자의 난이 벌어진 골육상쟁의 장소이기도 했고, 풍수적으로 불길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래서 즉위식을 하거나 외국 사진을 접대하는 특별한 국가행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궁궐. 임금이 나랏일을 보는 ‘궁(宮)’과 문 쪽에 있었던 망루인 ‘궐(闕)’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구중궁궐’이라 할 만큼 깊었던 이곳에서 무수히 많은 일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인생을 일구었다. 이광렬이 쓴 이 책, 《조선시대 궁궐 사람들의 숨은 이야기》는 온갖 희로애락이 넘실댔을 이곳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 쓴 책이다. 온천욕과 비자금 등 다른 역사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내밀한 이야기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임금의 여가생활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온천욕이었다. 특히 세종과 세조, 현종이 온천을 참 좋아했다. 오늘날에도 유명한 ‘온양온천’은 그 명성이 세종 시절부터 자자했다. 세종이 왕후와 왕세자, 문무 군신 50여 명과 수천 명의 호위 병사와 함께 떠날 때면 그 행렬이 대단했다. 바다와 가까운 온양은 왜구의 침략이 있을 수 있어 경호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이 온양온천으로 행차할 때는 수많은 기병을 온양 10리밖에 배치해 놓기도 했다. 세종은 온양온천에서 씻은 뒤 눈병이 크게 좋아지자, 이곳을 더욱 즐겨 찾았다. (p.73) 세종은 온천욕으로 눈병에 많은 효과를 보았다고 합니다. 하루는 도승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이순신. 이 이름 석 자는 끊임없이 불러낸다. 불멸의 장군, 효자, 그리고 충신 … 어찌 보면 공동체가 배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인물의 전형으로, 일은 물론이고 인격 또한 나무랄 데가 없었던 ‘완벽한 인재’의 본보기다. 무엇이 이러한 완벽한 인간을 가능케 했는가. 그 배경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 책이 《태교신공과 이순신》이다. 성당에서 사목 중인 김일영 신부가 쓴 이 책은 한 인간을 길러낸 뿌리, 곧 정신문화의 지혜를 다룬다. 그 비결은 첫째, 어머니 변 씨의 훌륭한 ‘자녀교육’이었다. 변 씨가 이순신을 낳기 전 꿈을 꾸었는데, 신선의 풍악 소리가 나며 붓과 칼을 든 선녀 두 명이 나타났다. 붓에는 ‘효당갈력(孝當竭力)’, 칼에는 ‘충즉진명(忠卽盡命)’이 쓰여 있었다. 효도는 마땅히 있는 힘을 다해야 하고, 충성은 목숨을 바칠 각오로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버지 이정은 경건한 마음가짐과 태도로 글을 읽고 마음을 수련했고, 어머니 변 씨는 날마다 새벽기도를 드리며 마음을 정갈히 했다. 둘 사이에 낳은 아들 네 명은 모두 복희,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에서 이름을 따 ‘희신’, ‘요신’, ‘순신’, ‘우신’이라 하였다. 네 아들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92) 김덕형은 늘 화원으로 날쌔게 달려간다. 꽃만 바라보고는 하루 종일 꿈쩍도 하지 않는다. 꽃 아래 자리를 마련해 그대로 누워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손님이 와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김덕형이 미쳤거나,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손가락질하고 비웃는다. - 《백화보》 서문 중에서 꽃은 참 아름답다. 보기에도 좋고, 쓰기에도 좋다. 식물이 생명의 절정에서 피워 올린 꽃은 때로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고, 때로는 따뜻한 옷감이 되어준다. 옛사람들도 꽃을 예사로 보아 넘기지 않았다. 꽃을 심고, 관찰하고, 애지중지했다. 설흔이 쓴 이 책, 《따뜻하고 신비로운 역사 속 꽃 이야기》에는 꽃에 심취한 이들이 여럿 나온다. 꽃을 너무 좋아해 ‘꽃에 미쳤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김덕형과 목화씨를 가져와 목화를 대량으로 재배한 문익점이 대표적이다. 김덕형은 실학자이자 《북학의》로 유명한 박제가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김덕형은 꽃 그림을 잘 그리기로 소문난 화가였다. 당대의 이름난 화가였던 표암 강세황도 인정한 실력이었으니 과연 출중했던 듯싶다. 그는 새벽부터 밤까지 꽃만 보며 꽃 그림을 그렸다. 굉장히 세밀하게 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