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허홍구 시인] 장충단공원에 하나뿐인 커피와 디저트 파는 가게에는 멋진 한옥에 간판이 영문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 들르는 손님들을 보면 외국인은 별로 눈에 안 띄고 거의 한국인이다. 그런데 멋지게 한옥을 지어놓고 빵집의 이름이 꼭 영문이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것도 ‘haus’로 사전을 찾으니 영어도 아니고 인도네시아어로 “목이 마른‘라는 뜻이라는데 별로 없을 것 같은 인도네시아 손님을 위해 그렇게 쓴 것일까? 아무리 빵집이라 해도 제발 우리말을 쓰는 곳이면 좋겠다.
[우리문화신문=허홍구 시인] 길 가다가 문득 올려다보니 창문에 붙인 글씨가 눈에 띈다. <옷 고치미 수선실> 요즘엔 옷 수선하는 곳도 점차 사라져 가지만, 수선집의 이름도 영어를 써야만 유식하게 보이는지 패션, 수선하우스, 스타일 핏, 리폼, 빈티지리클 같은 이름이 마구 등장한다. 그래도 패션이나 하우스는 뜻이나 짐작할 수 있지만 ‘스타일 핏’이니 ‘리폼’, ‘비티지리클’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제 옷 수선도 영어를 모르면 하지 말라는 얘기인가? <옷 고치미 수선실>란 이름 알아듣기 쉽고 예쁘지 않나? 제발 <옷 고치미 수선실>처럼 우리말을 사랑하는 수선집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우리문화신문=허홍구 시인] 어버이날 일기 - 허 홍 구 아버지 어머니 무덤 앞에 무릎 꿇고 큰절 올렸습니다 이승과 저승이 다른데 아들을 알아보셨겠습니까 먼 산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자 아프게 울다 왔습니다. 이 못난 불효자가 무슨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하염없이 길을 걷다 왔습니다.
[우리문화신문=허홍구 시인] 월간 《시(詩)》 창간호(2014년 1월호)부터 민윤기 시인의 권유로 (허홍구 시인의 100인 100시)를 이어쓰기 시작하여 9년째 2022년 5월호에 마지막 100번째 글로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귀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만 다 귀하고 귀한 것 가운데서도 사람이 그 으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귀한 인연으로 내가 만났던 사람들! 혹 만나지는 못했지만 본받고 싶었던 역사의 인물들! 그리고 이름 없는 풀꽃처럼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삶이 향기로운 사람들! 또 화제가 되었던 여러분들! 그 사람을 찾아 그분의 아름다운 무늬를 읽고 닮으려 했습니다. 일기장처럼 내 삶의 길라잡이처럼 맘에 담아두고자 했었지요 이 이름을 길라잡이로 어두운 길 밝혀 걷고자 했었고 그 이름을 닮고자 했던 내 맘에도 꽃무늬처럼 아름답게 새겨 두고자 했습니다. 오늘은 <북랜드>란 출판사 대표이며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을 지낸 수필가로 멋진 책을 만들고 있는 출판사 대표이며 또 후진 양성에 힘쓰는 장호병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장 호 병* 내가 알고 있는 많고 많은 문학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 함께한 멋쟁이 신사! 우린 나이를 떠나 서로를 존대하
[우리문화신문=허홍구 시인] 파릇한 생명으로 오는 3월을 맞이합니다. 이달 9일은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 날이고, 이어 6월에는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가 있다고 합니다. 문득 50여 년 전부터 형제의 정을 나누고 있는 일흔이 넘은 아우가 생각납니다. 호적엔 없지만, 맘으로 믿고 사랑하는 아우입니다. 경북 군위군 시골 마을에서 4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자라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대구로 나와 혼자 자취하며 꿈을 키우던 아우입니다.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당시 은행 취업은 성공의 길이라 믿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영남대 정외과를 진학하여 일찍부터 국회의원에 도전하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가 대학 졸업 뒤에는 매일신문 기사 생활을 끝내고 30대의 나이에 특정 정당의 작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지역에서 정의감에 불타는 젊음과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고 국회의원에 도전했었지만 내리 3번이나 낙선의 쓴맛을 본 아우입니다. 기득권의 정당과 세력에 맞서 젊음이 내세운 새 정치의 깃발은 끼어들기조차 어려운 도전이었는데 그 꿈은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지요. 그래도 더 많은 청년이 참여하고 도전하는 그 날을 기대한다면서 멋진 노년을 보내고 있는 이수만의 이
[우리문화신문=허홍구 시인] 누가 제주도를 이야기하면 성산포의 채바다 시인을 생각한다. 1996년에 <하멜기념사업회>를 만들어 25년째 활동 중이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멜이 표착한 터에는 <난파 희생자 위령탑>을 세우고 해마다 여러 행사를 해 오고 있다 96년, 97년, 2001년에는 제주에서 뗏목 배를 타고 목숨을 건 항해로 대한해협을 3번이나 건넌 바다의 사나이 해양탐험가다. 채길웅 이란 자신의 이름을 채바다로 바꾸고 제주-강진, 고대 뱃길, 왕인 박사 뱃길, 삼별초 뱃길로 탐험을 이어갔다. 1653년 하멜 일행 64명을 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이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풍랑으로 제주에 표착했을 때 하멜은 그때 나이가 23살이었으며 선원 중에는 15살 전후의 10대도 있었다. 그래서 채바다 시인은 젊은이들의 도전을 기대하며 해양대국을 꿈꾸도록 독려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도전정신을 심어주고, 해양의 역사를 알리고, 왜곡된 일본 역사문화를 일깨워준 공로로 대통령 표창과 해양수산부 장관상인 <장보고상>도 받았다 값어치 있는 일에 흥미를 갖고 일을 한다면 늙음을 치료하는 최고의 처방이라 믿는다는 78살 채바
[우리문화신문=허홍구 시인] 희망의 2022년 새해를 우리 함께 맞이합니다. 코로나 돌림병으로 저마다 힘들어 무너졌던 우리들 마음도 함께 일으켜 세우는 새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방귀희 선생은 외환위기(IMF) 때 그러니까 1997년에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일어서거나 걸어 본 적이 없는 1급 지체 장애인이지만 서울 무학여고를 수석으로 입학했으며 동국대 불교철학과를 수석 졸업한 화제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창간 발행하던 장애인의 문학잡지 <솟대문학>을 차마 폐간할 수 없으니 허 시인의 주변에 후원해 주실 분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요. 하지만, 그 어려운 시기에 누가 손들고 나서서 도와주겠습니까? 그러나 방 회장의 간절함이 이루어졌고 제가 소개한 ㈜놀부의 창업주 오진권 대표가 십수 년 동안 꾸준히 후원해 주었지요.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지듯 넘어져 주저앉은 우리들 마음도 일으켜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방송작가로, 대학 강의와 장애인의 복지 관련 단체에서 열정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방귀희 회장의 이야기입니다. 방 귀 희* 남의 마음을 어찌 읽을 수 있으랴만 태어나서 한 번도 일어서서 걷지 못한 그 절망의 마음
[우리문화신문=허홍구 시인] 이번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채현국 선생의 이력입니다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1961년 한국방송 피디로 입사했으나 권력의 나팔수로 살기 싫다며 입사 3개월 만에 PD를 때려치웠습니다. 그리곤 부친이 운영하던 강원도 삼척 도계로 들어가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광산업자로서 성공했으나 유신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스스로 재산을 정리하여 주변에 나눠주고 말았다고 합니다. 민주화운동을 하며 도피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셋방살이하는 해직 기자들에게는 집을 사 주기도 했던 파격의 행동! 1988년 효암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해서는 무급으로 일을 했습니다. 사업을 접으실 때는 일반적인 퇴직금의 3배를 주었으며 나눠준 게 아니라 돌려준 거라고 하였다네요 10월 유신 이후 이대로 가다간 또 권력과 얽혀 앞잡이가 될 상황이 올까 우려했고, 개인적으론 돈 버는 맛에 중독되어가는 자신을 경계하며 사업을 정리하고 자유인으로 살다가 가셨습니다 오래전 인사동에서 돌아가신 시인 강민 선생님과 걸어가시던 선생을 처음 뵙고 인사를 드렸지만 그땐 선생을 잘 몰랐습니다. 2021년 4월 2일, 노환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향년 86세.
[우리문화신문=허홍구 시인] 이미 신문 방송을 통하여 보신 분 있으리라 믿습니다만 지난 8월 30일 밤. 아프간*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철군 시각에 맞춰 최후 병력 공수사단 5~6백 명이 마지막 수송기에 대기 중이었다. 협의가 이뤄진 철수시한까지도 탈레반과 갈등 관계인 IS의 테러 위험 속 미진한 작업을 처리하다 낙오하는 병사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기체 안팎에서 인원 확인과 주변 점검을 마친 마지막 군인이 활주로를 뚜벅뚜벅 걸어 수송기 트랩에 오르는 모습이 기내 대기 중이던 알렉산더 버넷 상사의 야간 투시경 카메라에 찍혔다. 그가 탑승하자 수송기는 고래의 입 같은 트랩을 닫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무전으로 조종사에게 지시했다. "자, 뜨자! (Flush the force!)“ 수송기 다섯 대가 카불 상공을 날아올랐다. 현지 시각 8월 30일 23시 59분. 바이든 대통령이 "변경은 불가하다."라고 밝힌 철군 시한 8월 31일을 1분 앞둔 순간이었다. 수송기 마지막 탑승자는 기내 무전을 통해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임무는 잘 끝났다.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 * 아프칸 : 정식 이름은 아프가니스탄이슬람공화국이다. 파
[우리문화신문=허홍구 시인] 도시의 모든 길거리에는 누구나가 쉽게 찾을 수 있는 식당이 있다. 그러나 맛있는 식당, 친절한 식당, 부담 없는 값으로 찾을 수 있는 내 맘에 딱 맞는 식당을 찾기란 쉽지 않다. 누구나가 쉬 기억할 수 있는 이름 놀부라는 상호를 앞에 붙이고 놀부보쌈과 놀부부대찌개란 메뉴를 개발하여 또 그들만의 맛과 친절로 전국을 휩쓸었던 창업주 오진권 사장의 지나간 이야기다. 누구보다도 배고픔의 설움을 잘 알고 있었던 그가 노약자, 장애인, 노숙자들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을 지어 여러 해 동안 자신의 손으로 그릇에 밥을 퍼 담아주는 기쁨은 경험해 보지 않고는 정말 아무도 모를 것이라며 행복해했던 사람이다. 이제 일흔이 넘어 일손을 놓고 쉬고 싶었지만 심심해서 못 쉬겠다며 신촌 현대백화점 옆에서 다시 맛깔 부대찌개 집을 열었다는 소문을 듣고 혼자 찾아가 봤더니 입구에 “1인 손님 환영”이라는 알림 글이 먼저 보였고 주 고객 젊은 청년 학생들이 배고프지 않게 밥은 무한 리필이라 적어두었다 아직도 틈틈이 후배들의 창업과 성공 길라잡이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으며 나눔으로 행복을 만들어가고 있다. 오 진 권 놀부보쌈 부대찌개 이름으로 전국을 휩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