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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문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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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조선신궁에 쫓겨온 인왕산 국사당

중요민속자료 제 28호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국사당은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여러 신을 모신 당집으로 요란한 굿판을 벌이기 쉽도록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세운 굿당에 속한다. 원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던 것을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전을 강요하자 건물을 해제하여 현재의 인왕산 기슭에 옮겨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인왕산을 택한 이유는 이곳이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에 속하고 현재 무속신으로 모셔지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양끝의 2칸은 이곳으로 이전한 후 새로 지은 것이다. 1칸은 4쪽의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내부의 3면에는 무신도가 걸려있고 마루에는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 건물보다 구조는 간단한 편이나 그 규모는 더 크다. 1925년 무렵에 새로 지은 국사당은 영정조때의 건축기법을 바탕으로 한 원래의 국사당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내부 대들보가 아치형으로 된 것이 특이한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목재 짜임새가 튼튼한 것이 목공 솜씨가 돋보인다. 인왕산 국사당은 다

관청사람들이 마시던 종로의 우물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3호

[그린경제 = 이한영 기자]국제도시 서울에 상수도시설이 없었을 때 시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체계적인 물관리로 수도꼭지만 틀면 좔좔 물이 나오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지만 그렇다고 천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지금의 서울이 한양으로 불리던 시절 우물은 백성들의 중요한생활용수 공급원이었다. ▲ 우물 겉 모습으로 화강암 두쪽을 댄 모습이다. 조선시대에 종친부(宗親府)가 있던 터에 자리한 이 우물은 화강암 두 덩이를 원형으로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상부에 네 귀가 조각되어 있다. 내부는 자연석을 둥글게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는 이 우물의 원래의 형태가 아니고 1984년에 기무사에서 뜰 공사 도중 지하 3m에서 우물돌을 발견하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 새로 조성한 것이다. 물받이 돌로 사용되었을 구조물 1점이 현재 이 우물 내부에 놓여 있다. 네 귀가 조각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우물과 같이 화강암 두 덩이를 원형으로 이어 붙인 특징을 갖는 우물은 창경궁과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후원에도 있다. ▲ 우물 안쪽 이 우물은 원위치에서 옮겨져 원형은 잃어 버렸으나 표면 풍화상태로 보건대 개화기 이전에 조성된 상당히 오래된 우물로 판단된다. 또한

[종로문화통신 10]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高宗 御極 40年 稱慶紀念碑)

종로구 세종로 142-3번지 '사적 제171호'

[그린경제 = 최미현기자] 고종(재위 18631907)이 황제가 된지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다.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기로소(耆老所)는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 고려 때의 기영회를 계승한 관제이다.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에 들어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살지 못해 기로소에 들어가는 이가 없자, 숙종과 영조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하여 미리 앞당겨 들어간 것을 본받아 고종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비석은 귀부, 비몸, 이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몸 앞면에는 황태자인 순종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건물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 기념비석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칸에는

[종로문화통신 8] 부귀공명은 썩은 쥐와 같다던 '성수침' 집터

청송당 (聽松堂) 터 : 청운동 89-3 (경기상고 경내)

[그린경제 = 조기태 기자] 청송당은 성혼(1535~1598)의 아버지인 청송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별당이었다.청송당 이란 이름은 눌재 박상 (1474~1530)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가 북악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부친 성세순(1463~1514) 때 부터로 성혼은 조부 성세순 행장인「조고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시사숙공 행장」에서 백악산 아래 집을 정하였는데 숲이 깊고 땅이 외져 자못 산수의 멋이 있었다. 공무를 마치면 지팡이를 들고 신발을 끌며 왕래 하였다. 계곡마다 두루 찾아다니며 시를 읊조리고 돌아갈 줄 몰랐다 라고 사연을 밝혔다. 성수침이 본격적으로 이곳에 기거하게 된 계기는 1519년 기묘사화 때 스승이 처형 되고 선비들이 화를 입자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청송당을 짓고 제자 양성에 힘을 써서 많은 석학들을 배출하였다. 임억령(1496~1568)은「청송당기」에서 성수침의 청송당 생활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의롭지 않은 명성과 공명,부귀 따위는 썩은 쥐나 똥으로 보았다. 고고하게 누워 몸을 일으키지 않고 이곳에서 10년을 살았다 성수침이 죽은 뒤 1668년에 외손 윤순거와 윤선거 등이 다시 중건하여 송시열,남구만 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