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40여 년 전인 80년대로 기억된다. 《단(丹)》이라는 한 권의 책이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일이 있었다. 요즘의 한강(韓江) 증후군에는 못 미치겠지만 얼추 그에 버금갈 정도의 법석을 떨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저 어느 국수주의 재야사학자가 쓴 그야말로 ‘소설’ 같은 소설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렇게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사회적 반향이 대단히 컸다. 대중매체 가운데 가장 전파력이 크다는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라디오, 신문, 잡지 할 것 없이 온통 “단”으로 도배질이 된 것이다. 상황이 그쯤 되다 보니 필자도 가만있을 수 없어 한 권 사들었다. 도가(道家) 용어를 제목으로 한 소설 《단(丹)》은 봉우(鳳宇) 권태훈이 구술한 예언을, 시인이며 소설가인 김정빈이 첨삭 정리하여 펴낸 소설이다. 권태훈은 대종교의 총전교(總典敎)*를 두 번이나 지낸한 인물로 ‘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원불교에서 주최한 국내 종교지도자들과의 “평화선언 단합대회”에 교황과 함께 초청되기도 하였다. 소설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 보면, 소련이 사분오열되고 중국도 양분되며 세계질서는 한국, 중국, 인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원주역의 겨울밤은 유난히 차가웠다. 한 편에서 조개탄난로가 타고 있었지만 텅 빈 대합실을 데우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몇 안 되는 승객들은 난로를 껴 안 듯 오골오골 몰려 들었다. 막차가 도착하려면 아직도 한 시간 이상 남아 있었다. 동수는 느닷없이 코끝이 찡해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천장엔 거미줄이 잔뜩 쳐진 선풍기만 매달려 있을 뿐 고향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너른 마당으로 나오니 황소바람이 기어코 난로에 누른 돕바* 틈을 헤집고 들어왔다. 눈에는 다른 때보다 밝게 빛나는 남쪽 하늘의 별빛이 들어왔고 귀에는 멀리서 다가오는 기차 소리가 들어왔다. (저 기차를 타면 고향으로 갈 수 있다.) 할머니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냥 확 가버릴까? 아니지 내가 가버리면 몸져누운 엄마는 어쩌나. 이 막차에서도 공을 치면 열 입이 끼니를 걸러야 한다.) 구렁이 기어 오듯 천천히 플랫폼에 들어온 밤 열차는 알 까듯 승객 몇을 옆구리에서 슬어놓았다. “아저씨 주무시고 가세요. 네?” “예쁜 누나 있어요. 주무시고 가세요.” 동수는 남자 손님이 나올 때마다 쫓아가 옷소매를 붙들고 호객을 했다. 더럽다는 듯 손을 뿌리치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조용필이 새 음반을 낸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스무 번째 노래집이라 한다. 그 소식을 들으니 반갑기는 한데 고개가 갸우뚱해지며 체한 듯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정규앨범이 스무 장밖에 안 되나?’ 그가 음반 활동한 세월이 오십 년이 넘었다. 외국의 사례에 비추더라도 그 경력에 스무 장의 독집은 결코 많은 게 아니다. 더군다나 그는 경력 가운데 사십 년이 넘는 세월을 “가왕”으로 추존되어 대중가수의 상징이 되었고, 이십여 년 동안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적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판꽂이에서 그의 음반들을 꺼내 세어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스무 장이 넘고, 내가 알고 있는 것까지 보태면 얼추 서른 장은 더 될 것 같은데 말이다. ‘비정규집이 그렇게 많았나?’ 기억을 더듬고 자료들을 꺼내 확인해 보니 정말 그렇다. 알게 모르게 독집이 아니면서 조용필의 이름으로 나온 게 열 장이 넘었다. 설령 독집이라 하더라도 외국곡을 개사하거나 번안한 노래를 섞어서 낸 음반은 정규독집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준도 비정규 집 양산의 한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기준 때문에 그의 첫 번째 노래집도 비정규 앨범 판정을 받았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또다시 가뭄 걱정이다. 개울이 마르고 마당가 도랑물도 말라간다. 물이 마르니 땅이 마르고, 땅이 마르니 작물도 마르고 작물이 마르니 마음마저 말라간다. 그나마 며칠 전 내린 단비 덕분에 작물들이 푸르름을 되찾는 듯했으나 그것도 이삼일 뿐, 다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다. 요즘은 날씨 검색으로 하루를 열고, 잠들 때도 한 번 더 확인한 뒤 하루를 닫는다. 우리 고장은 해마다 이맘때면 가뭄 때문에 속을 썩였던 것 같다. 보이저 우주선이 태양권계면*을 벗어나 성간우주로 나가고, 제임스 웹 망원경이 백몇십억 광년 떨어진 곳의 별들도 들여다보는 세상에 아직도 하늘을 바라보며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게 좀 의아하기도 하다. 문득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미래에는 1. 꿈을 찍는 영화 2. 냄새가 전달되는 사진과 영화 3. 서로 얼굴을 보며 통화하는 전화기 4. 필요에 따라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하는 기술 이 개발될 것이라는 말씀 말이다. 이 네 가지 신기술 가운데 1과 2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지, 않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감감무소식이고, 3은 실용화하여 우리가 혜택을 아주 잘 누리고 있는 분야다. 나머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삐띠기”라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마을 사람들 아무도 모릅니다. 이사 올 때부터 벌써 그렇게 부르더랍니다. 커서 생각해 보니 우리 마을은 참 이사도 많이 오고 많이 가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몇 대를 진득하니 눌러사는 집안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나루터가 있어 오기도 쉽고 가기도 쉬워 그런지, 언덕배기 강마을이라 논이 없어 그런지 우리 집안을 비롯해 서너 집안만이 4~5대 이어 살 뿐이었습니다. 삐띠기는 나보다 서너 살 위였던 것 같습니다. “배텃거리”와 “웃배기미” 다해서 스무나믄 집 정도 되는 곳이라 또래가 드물어 서너 살 차이는 그냥 동무로 지냈었지요. 삐띠기는 나의 두 번째 색시였습니다. 첫 번째 색시인 언년이도 나보다 세 살 많았지요. 차분하게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프다는 얘기가 들리고 몇 달 뒤 언년이 엄마가 딸을 가슴에 묻었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삐띠기는 학교를 안 다녔습니다. 동갑내기 금복이와 장표가 학교에 가고 나면 마을에 어린애라곤 우리 둘밖엔 안 남았지요. 나이에 비해 덩치도 크고 힘이 센 삐띠기에겐 소꿉장난은 이미 시시한 놀이였는지도 모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중국 당나라 때 동방규라는 시인이 살았다지요. 그는 전한(前漢)의 효원황제(孝元皇帝)때 왕소군(王昭君)이라는 궁녀가 흉노족의 우두머리 호한야에게 공물에 끼워져 시집간 것이 못내 아쉬워 <소군원(昭君怨)>이란 시를 지었다네요. 왕소군은 하늘의 기러기도 그 미모에 넋이 나가 날갯짓을 잊고 떨어질 정도였대요. 그래서 낙안(落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전해 오지요. 동방규는 그게 어지간히도 배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칠백 년이나 지난 일을 다시 끄집어냈으니까요. 그런데 그 <소군원>이란 시가 천삼백여 년이나 흐른 이십 세기말에 때아니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지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 그랬었지요. <소군원>의 한 구절처럼 1980년 신군부 시절, 이 땅의 봄은 그랬답니다.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로다! 그 봄의 어느 날 나는 경원선 열차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이라는 명사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봄이었지요. 그렇게 봄 같지 않은 봄도 처음이었고, 경원선 열차도, 동두천이라는 도시도 처음이었답니다. 망월사역을 지나고 의정부를 지날 때까지는 서울처럼 개나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배달부에 불과하다 한다. 학문 여러 분야를 깊이 연구한 그가 생명의 기원을 “우주 도래설”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가장 전투적인 무신론자”라는 평을 듣는 그는 생명체의 탄생이 지구 안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졌거나 창조에 의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견해와 신념은 찰스 다윈이 《종(種)의 기원》을 펴냈을 때보다 격렬한 비난과 저항을 견뎌야 했다. 창조론적 신앙의 시작은 인류에게 자의식이 생길 때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몇 만 년 동안 그렇게 믿어 온 그 신념은 굳을 대로 굳어 그 어떤 모순도 덮어버릴 만큼 공고(鞏固)해졌고 또한 세상 사람들 절대다수가 그렇게 믿고 산다. 아직은 세상의 흐름이 이러할 진데 그는 창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도 모자라 무신론의 확산까지 외치고 나섰다. 사실 무신론이 이론적 체계를 갖추고 조목조목 창조론에 맞설 수 있게 된 건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라는 구도자를 내세워 기존의 창조주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보리밥이나 잡곡밥은 먹지 않고 쌀밥만 먹었으니 그렇지.” “지적질” 전문가인 아내가 탁배기잔을 내려놓으며 일갈(一喝)했다. 우리는 종종 아내가 빚은 탁주 한 잔과 음악으로 산골살이의 고단함을 달래곤 하는데, 음악을 자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만 골라 듣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목록(레퍼토리)이 뻔하다. 추리고 추리기 때문이다. “판이 천장이나 만장이나 들을 게 없기는 매한가지”라 투덜대니까 아내가 놓칠새라 비수를 꽂은 것이다. 씹던 안주가 목에 걸리는 듯했다. 가슴에서 덜컥 소리가 나고 머리에서 “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랬나? 내가 그렇게 되었나? 혈당을 낮춘답시고 현미밥을 주식으로 삼고 매식을 할 때도 보리밥집을 찾아 뒤지면서도 정작 음악은 “쌀밥”만 골라 들었구나. “이눔아야! 전깃세 생각도 쫌 하그라.” 음악실에는 이미 빈 소줏병 몇이 나뒹굴고 있었고 시각은 벌써 새벽 두 시를 넘고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음악 없이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 대폿집에서 마시는 날에도 마지막은 늘 음악실에서 술자리를 마쳤다. 어느 업소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그건 불문율이었다. 그러니 가는데 마다 주인들 인상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의 어깨는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저 가녀린 허리가 버텨낼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희뿌연 하늘에 눌려서도 아닌 것 같고, 둘러매고 있는 전기기타의 무게 때문도 아닌 것 같았다. 워낙 비실비실한 체질이란 게 한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제 연락하지 마라. 네 마음 안다. 고맙다. 그저 바람 따라 떠다니다 때 되면 갈란다.“ 금방이라도 양회가루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낮은 구름에 온갖 매연까지 뒤섞인 바람이 빛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가 골목 끝자락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그의 실루엣은 대기에 스며들고 말았다. 태민호! 어쩌면 그에게는 태민호라는 이름을 얻기 전, 그러니까 장효민이라는 이름으로 살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집은 비록 서울의 사대문 안은 아니었지만, 문안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번듯한 양옥은 아니지만 여섯 식구 궁둥이 붙이기엔 부족함이 없을 정도에다 문간채의 방 두 개는 세를 놓을 정도의 살림은 되었다. 대학도 그가 음악에 빠져 안 간다고 버텨 그렇지, 돈이 없어 못 보낸 것도 아니었으니 60년대의 가정치곤 중류 이상은 되었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강원도 산골로 들어온 지 이제 세 해째를 맞는다. 깡촌의 강마을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때 서울로 간 나는 음악을 좇아 이십여 년의 서울살이를 접고 30대 시절에 그곳을 떠났었다. 몇몇 지방도시를 전전한 끝에 강릉에다 짐을 풀고 이십 년 가까이 살다가 다시 서울로 가서 십여 년을 또 살고 이곳으로 왔으니 고향에서 보낸 기간보다 타향살이 기간이 몇 곱절은 길다. 그런 까닭인지 고향보다는 타관에 대한 기억이 더 많고 특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서울에서의 추억이 가장 많이 새겨져 있다. 감수성이 한창인 청소년기를 보낸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은 늘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청계천! 우리 가족은 이 개천가에서 첫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청계천은 지금의 광교 쪽 일부 구간을 뺀 나머지는 복개되기 전이었고 한국전쟁 직후 빈곤의 그림자가 꽤 많이 남아있었다. 동대문을 지나 하류 쪽으로 둑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도 무허가 판잣집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늘어서 있었고, 창신동과 숭인동 일대는 서울의 대표적 판자촌이었다. 판잣집은 말이 집이지 그저 비, 바람이나 근근이 가리는 정도의 공간이라 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