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강치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바다사자의 하나입니다. 한 때 그런 강치가 독도에 넘실거려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가지도 – 강치를 일명 가지라고도 하였지요– 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강치가 독도에 넘실거렸다? 독도에 강치가 넘실거렸다는 것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독도에 넘실거리던 그 강치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간 거야?”라며 고개를 갸우뚱 하시겠지요. 일본이 1905년 독도를 강제로 자기네 영토로 편입한 후, 일본 어부들이 독도의 강치를 무수히 학살하였습니다. 강치의 가죽이 돈이 되었거든요. 당시 강치 한 마리 값은 황소 열 마리 값에 필적하였다는군요. 1905년 이후 약 8년 동안 일본어부들이 학살하고 잡아간 강치는 무려 14,000여 마리나 된다고 합니다. 일본어부들은 강치가 줄어들자 강치를 확실히 잡기 위해 아기 강치를 먼저 잡기도 합니다. 상대적으로 동작이 굼뜬 아기 강치를 먼저 잡으면 아기를 구하러 어미가 올 테고, 그럼 손쉽게 어미 강치까지 잡는 것이지요. 쪽바리 아니랄까봐 그런 비열한 방법까지 쓰다니... 일제 강점기 이렇게 독도의 강치를 잡아대니 결국 독도의 강치는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남양주 마재마을은 다산 정약용의 생가로서 사람들이 많이 찾습니다. 요즈음 남양주시가 다산을 남양주를 대표하는 역사인물로 집중적으로 띄우고 있지요. 그래서 마재마을에 실학박물관도 만들고 다산에 관련된 학회, 축제 등 다양한 행사도 펼치고 있구요. 그런가 하면 둘레길이 유행하면서 다산길도 만들었네요. 요즈음은 마재마을에 다산생태공원도 들어서 주말에는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헉! 한확 이야기 한다면서 뚱딴지 같이 왜 다산 이야기 하냐고 하시겠군요. 마재마을 입구에 세조 때 좌의정 한확(1400 ~ 1456)의 무덤과 신도비가 있습니다. 저는 마재마을 가면서 여기에 한확의 무덤과 신도비가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았더니 한확에게는 누나 덕분에 출세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네요. 지금부터 그 얘기를 잠깐 풀어보겠습니다. 태종 때 명나라 영락제가 조선에 공녀를 요구합니다. 고려 때 원나라의 요구로 많은 고려의 처녀들이 원나라에 공녀로 바쳐졌는데, 명나라 때까지도 이런 요구가 이어지고 있었군요. 사실 영락제의 어머니는 원나라 때의 조선 공녀 출신입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여진족이라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 우실하 항공대 교수의 <요하문명의 발견과 동북아 상고사의 재편>이라는 강좌가 있었습니다. ‘요하문명의 발견’이라는 제목에 눈이 번적 띄어 참석하였습니다. 전에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앞선 시대의 유물이 계속 출토되면서 중국학자들이 당황해하더니, 이를 중국문명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강의를 들으니 이미 중국에서는 이를 황하문명보다 앞선 요하문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다만 이는 한족과는 상관이 없는 오랑캐의 - 동이족이 되겠지요 - 문명이 아니라 중화문명의 기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요하문명의 건설자는 중국 한족들이 자신의 조상으로 생각하는 황제족의 문명이며, 이곳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중원으로 들어와 하왕조를 정복하고 상왕조를 건설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동이족이나 몽고족을 포함한 동북아의 민족들이 모두 황제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므로 이들 민족들의 역사도 다 중국사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역사도 중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고, 이게 바로 동북공정이지요. 얼마 전에 시진핑이 트럼프와 회견하면서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라고 얘기한 것이 이런 시각에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 7월 26일 문재인 정부 내각 1기가 본격적으로 출범하였지요? 이번에도 새 각료 인선을 위한 청문회에서 많은 후보자들이 크고 작은 흠으로 곤욕을 치렀고, 결국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 조대엽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는 청문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퇴하였네요. 아마 임명된 장관들 중에도 청문회에서 발가벗겨진 자신의 민낯에 마음이 편치 않을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청문회 때마다 자신의 개인 이력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부담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이를 원치 않아 후보로 제청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 동안 대한민국이 짧은 기간 안에 압축 성장을 해오면서 도덕보다는 물질 만능의 사회가 되고, 심지어는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어떠해도 좋다는 의식이 형성된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사회 지도층의 사람들도 노블리스 오블리제 보다는 자기 개인의 욕심 채우기가 우선이 되었기에, 청문회 때마다 이런 사태를 보게 되는 가 봅니다. 더구나 교육에 있어서도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보다는 1등주의 교육을 위주로 한 것이 그런 의식을 더욱 조장한 것이구요. 과거 조선에서는 어떠했을까요? 유학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기슭에는 족두리 산소라고 불리는 무덤이 있습니다. 효종 때 청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화냥년으로 손가락질 당하다 28살에 병으로 쓸쓸하게 죽은 의순공주의 무덤입니다. 얼마 전에 의정부 교도소에 갔다가 잠시 짬을 내어 의순공주 무덤에 들러보았습니다. 지금부터 비운의 의순공주 삶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참! 그전에 혹시 ‘공녀’와 ‘화냥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잠깐 말씀드려야겠네요.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참패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처녀들을 상납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끌려가는 여자들을 공녀(貢女)라고 하였지요. 그리고 이렇게 공녀로 끌려갔거나 전쟁 직후 포로로 끌려간 여인들 중에 용케 조국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고향에 돌아온 여인이라고 하여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고리타분하게 여자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요구하던 유교국가 아닙니까? 그래서 환향녀를 몸을 더럽히고 돌아온 여인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양반댁에서는 아예 집안에 들여놓지 않으려고 할 정도였지요. 이 환향녀가 음운변화를 일으키면서 화냥년이 된 것인데, 오늘날에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하철 종로3가역 7번 출구로 나오면 직선거리로 100m쯤 떨어져 종묘 담장 쪽으로 대각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아마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아니? 종로에 조계사 말고 또 대각사라는 절이 있었나?”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각사? 샤머니즘과 결합된 그저 그렇고 그런 절이겠지” 하시던가요. 그러나 대각사는 3ㆍ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었던 용성스님이 1911년 창건한 의미 있는 절입니다. 얼마 전에 이윤옥 시인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에 갔다가 근처 대각사에도 가보았습니다. 용성스님(1864~1940)은 16살 때인 1879년 가야산 해인사 극락암에서 출가하였는데,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우리 겨레를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곧 중생 구제이고, 그를 위해 불교 대중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하여 대각교(大覺敎) 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1911년 대각사를 창건합니다. 대각(大覺)이니까 큰 깨달음이란 말씀이네요. 용성스님으로서는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 크나큰 사고의 전환, 큰 깨달음이 있어야 함을 절실히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3ㆍ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곤지암 나들목을 지나게 되지요? 그래서 서울 시민치고 곤지암을 모르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동네 이름이 ‘곤지암’이라고 하니, 좀 특이하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에 ‘곤지암’이라고 하여 “동네 절 이름이 지명이 되었나?”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곤지암이라는 절은 없더군요. 그럼 왜 지명이 ‘곤지암’일까요? 곤지암에는 곤지암(昆池岩)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바위 이름이 동네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뭔가 이 바위가 특별한 바위라는 것이겠지요? 얼마 전에 곤지암을 지나며 일부러 그 바위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길 찾기 앱을 켜고 이를 보면서 다가가니, 시내 한 복판에 크고 작은 두 개의 바위가 가게와 집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큰 바위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바위에 꽂히듯이 박혀 있습니다. 400년 된 나무라는데, 향나무가 척박한 바위틈에서 싹을 내어 저 정도로 크려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을 가졌을까요? 향나무가 좁은 바위틈에서 몸집을 불리며 바위를 쪼개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관심을 끌만한 바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내문을 보니 원래 고양이처럼 생겨 묘(猫)바위로 불리던 곤지바위는
▲ 《아버지의 라듸오》, 김해수 지음, 김진주 엮음, 도서출판 느린걸음,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언제 나온 지 아십니까? 바로 1959년 11월 15일 금성사의 생산과장 김해수 님(1923 ~ 2005)에 의해 처음으로 국산 라디오가 세상의 빛을 보았습니다. 김해수 님이 만든 최초의 라디오는 2013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작년에는 대한민국 광복 70년, 과학기술 70선에 선정되었습니다. 그 김해수 님이 2003년 노환으로 점점 쇠약해지면서 자기의 인생을 글로 남겼고, 이를 딸 김진주 씨가 정리하여 2007년 《아버지의 라듸오》라는 책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올해 《아버지의 라듸오》가 과학의 달 특집으로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전파도 탔네요. 김해수 님의 딸 김진주 씨는 박노해 시인의 아내입니다. 박노해 시인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한때는 얼굴 없는 시인으로 노동자를 대변하더니, 지금은 나눔문화라는 단체로 평화 나눔 활동을 하며 영성이 있는 시를 쓰고 있지요. 김해수 님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산업포장을 수상한 산업화 시대의 주역임에 반하여, 딸 김진주 씨는 사노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경기도 광주시 곧은골[直洞] 영장산 자락에 가면 조선 전기의 청백리 재상 맹사성의 무덤이 있습니다. 여기서 곧은골 고개를 넘어가면 분당 율동공원이 나오지요. 그런데 맹사성의 무덤 근처에는 웬 검은 소의 무덤[黑麒塚]이 있습니다. 왜 조선의 명재상 무덤 옆에 검은 소의 무덤이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 비밀의 무덤을 파헤쳐보기로 하지요. ▲ 경기도 광주시 곧은골[直洞] 영장산 자락에 있는 조선 전기의 청백리 재상 맹사성의 무덤 하루는 맹사성이 온양의 본가 뒤에 있는 설화산 자락에서 산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따라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맹사성이 뭔가? 하여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는데, 거기에선 동네 아이들이 검은 소 한 마리를 놓고 장난을 치며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아이들로서는 평소에 보기 드문 검은 소가 보이니까 호기심에 모여들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한 놈이 장난삼아 돌을 던지자 나머지 놈들도 따라서 돌을 던지며 검은 소를 놀려댄 것이겠지요. 그런데 검은 소는 아직 어려서 많은 아이들이 둘러서서 괴롭히니 어쩔 줄을 모르고 갈팡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관우물이라고 아십니까? 관이 있던 곳의 우물이란 얘기이지요. 관이 있던 곳의 우물이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 지금부터 그 이상한 얘기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안산시 목내동에 가면 일진전기라는 회사가 있는데, 바로 그 회사 정문 오른쪽 울타리 안에 관우물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바다에서 떠내려 온 관이 이 자리에 도착하였는데, 그 후 바닷가는 육지 안쪽이 되고 이곳에서 우물이 생겼답니다. 그래서 이곳이 관이 닿았던 자리라고 하여 관우물이라고 불렀다는군요. ▲ 안산시 목내동 일진전기 정문 오른쪽 울타리 안에 있는 관우물 표석 후후! 이렇게 말하면 성급한 사람은 이것도 설명이라고 하느냐며 화를 내실 것 같군요. 그 관은 문종의 아내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 씨의 관입니다. 현덕왕후가 아직 세자비 시절 단종을 낳았는데, - 그러니까 문종이 임금이 된 뒤에 현덕왕후로 추봉된 것이네요. - 그만 안타깝게도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하여 현덕왕후의 무덤을 일진전기 바로 뒤에 보이는 동산에 쓴 것이지요. 이곳을 능안리라고 부르는데, 현덕왕후의 무덤 소릉(昭陵)이 있던 곳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