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기슭에는 족두리 산소라고 불리는 무덤이 있습니다. 효종 때 청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화냥년으로 손가락질 당하다 28살에 병으로 쓸쓸하게 죽은 의순공주의 무덤입니다. 얼마 전에 의정부 교도소에 갔다가 잠시 짬을 내어 의순공주 무덤에 들러보았습니다. 지금부터 비운의 의순공주 삶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참! 그전에 혹시 ‘공녀’와 ‘화냥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잠깐 말씀드려야겠네요.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참패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처녀들을 상납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끌려가는 여자들을 공녀(貢女)라고 하였지요. 그리고 이렇게 공녀로 끌려갔거나 전쟁 직후 포로로 끌려간 여인들 중에 용케 조국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고향에 돌아온 여인이라고 하여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고리타분하게 여자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요구하던 유교국가 아닙니까? 그래서 환향녀를 몸을 더럽히고 돌아온 여인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양반댁에서는 아예 집안에 들여놓지 않으려고 할 정도였지요. 이 환향녀가 음운변화를 일으키면서 화냥년이 된 것인데, 오늘날에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하철 종로3가역 7번 출구로 나오면 직선거리로 100m쯤 떨어져 종묘 담장 쪽으로 대각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아마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아니? 종로에 조계사 말고 또 대각사라는 절이 있었나?”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각사? 샤머니즘과 결합된 그저 그렇고 그런 절이겠지” 하시던가요. 그러나 대각사는 3ㆍ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었던 용성스님이 1911년 창건한 의미 있는 절입니다. 얼마 전에 이윤옥 시인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에 갔다가 근처 대각사에도 가보았습니다. 용성스님(1864~1940)은 16살 때인 1879년 가야산 해인사 극락암에서 출가하였는데,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우리 겨레를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곧 중생 구제이고, 그를 위해 불교 대중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하여 대각교(大覺敎) 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1911년 대각사를 창건합니다. 대각(大覺)이니까 큰 깨달음이란 말씀이네요. 용성스님으로서는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 크나큰 사고의 전환, 큰 깨달음이 있어야 함을 절실히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3ㆍ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곤지암 나들목을 지나게 되지요? 그래서 서울 시민치고 곤지암을 모르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동네 이름이 ‘곤지암’이라고 하니, 좀 특이하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에 ‘곤지암’이라고 하여 “동네 절 이름이 지명이 되었나?”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곤지암이라는 절은 없더군요. 그럼 왜 지명이 ‘곤지암’일까요? 곤지암에는 곤지암(昆池岩)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바위 이름이 동네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뭔가 이 바위가 특별한 바위라는 것이겠지요? 얼마 전에 곤지암을 지나며 일부러 그 바위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길 찾기 앱을 켜고 이를 보면서 다가가니, 시내 한 복판에 크고 작은 두 개의 바위가 가게와 집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큰 바위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바위에 꽂히듯이 박혀 있습니다. 400년 된 나무라는데, 향나무가 척박한 바위틈에서 싹을 내어 저 정도로 크려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을 가졌을까요? 향나무가 좁은 바위틈에서 몸집을 불리며 바위를 쪼개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관심을 끌만한 바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내문을 보니 원래 고양이처럼 생겨 묘(猫)바위로 불리던 곤지바위는
▲ 《아버지의 라듸오》, 김해수 지음, 김진주 엮음, 도서출판 느린걸음,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언제 나온 지 아십니까? 바로 1959년 11월 15일 금성사의 생산과장 김해수 님(1923 ~ 2005)에 의해 처음으로 국산 라디오가 세상의 빛을 보았습니다. 김해수 님이 만든 최초의 라디오는 2013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작년에는 대한민국 광복 70년, 과학기술 70선에 선정되었습니다. 그 김해수 님이 2003년 노환으로 점점 쇠약해지면서 자기의 인생을 글로 남겼고, 이를 딸 김진주 씨가 정리하여 2007년 《아버지의 라듸오》라는 책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올해 《아버지의 라듸오》가 과학의 달 특집으로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전파도 탔네요. 김해수 님의 딸 김진주 씨는 박노해 시인의 아내입니다. 박노해 시인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한때는 얼굴 없는 시인으로 노동자를 대변하더니, 지금은 나눔문화라는 단체로 평화 나눔 활동을 하며 영성이 있는 시를 쓰고 있지요. 김해수 님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산업포장을 수상한 산업화 시대의 주역임에 반하여, 딸 김진주 씨는 사노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경기도 광주시 곧은골[直洞] 영장산 자락에 가면 조선 전기의 청백리 재상 맹사성의 무덤이 있습니다. 여기서 곧은골 고개를 넘어가면 분당 율동공원이 나오지요. 그런데 맹사성의 무덤 근처에는 웬 검은 소의 무덤[黑麒塚]이 있습니다. 왜 조선의 명재상 무덤 옆에 검은 소의 무덤이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 비밀의 무덤을 파헤쳐보기로 하지요. ▲ 경기도 광주시 곧은골[直洞] 영장산 자락에 있는 조선 전기의 청백리 재상 맹사성의 무덤 하루는 맹사성이 온양의 본가 뒤에 있는 설화산 자락에서 산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따라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맹사성이 뭔가? 하여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는데, 거기에선 동네 아이들이 검은 소 한 마리를 놓고 장난을 치며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아이들로서는 평소에 보기 드문 검은 소가 보이니까 호기심에 모여들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한 놈이 장난삼아 돌을 던지자 나머지 놈들도 따라서 돌을 던지며 검은 소를 놀려댄 것이겠지요. 그런데 검은 소는 아직 어려서 많은 아이들이 둘러서서 괴롭히니 어쩔 줄을 모르고 갈팡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관우물이라고 아십니까? 관이 있던 곳의 우물이란 얘기이지요. 관이 있던 곳의 우물이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 지금부터 그 이상한 얘기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안산시 목내동에 가면 일진전기라는 회사가 있는데, 바로 그 회사 정문 오른쪽 울타리 안에 관우물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바다에서 떠내려 온 관이 이 자리에 도착하였는데, 그 후 바닷가는 육지 안쪽이 되고 이곳에서 우물이 생겼답니다. 그래서 이곳이 관이 닿았던 자리라고 하여 관우물이라고 불렀다는군요. ▲ 안산시 목내동 일진전기 정문 오른쪽 울타리 안에 있는 관우물 표석 후후! 이렇게 말하면 성급한 사람은 이것도 설명이라고 하느냐며 화를 내실 것 같군요. 그 관은 문종의 아내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 씨의 관입니다. 현덕왕후가 아직 세자비 시절 단종을 낳았는데, - 그러니까 문종이 임금이 된 뒤에 현덕왕후로 추봉된 것이네요. - 그만 안타깝게도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하여 현덕왕후의 무덤을 일진전기 바로 뒤에 보이는 동산에 쓴 것이지요. 이곳을 능안리라고 부르는데, 현덕왕후의 무덤 소릉(昭陵)이 있던 곳이기에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라 카페 갤러리에서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카슈미르의 봄이 열리고 있습니다. 카슈미르라면 요즘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영토 분쟁이 있는 곳 아닙니까?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할 때, 카슈미르 지도자 하리 싱이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들인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인도에 붙음으로써 분쟁이 시작되었지요. 그 동안 박 시인은 팔레스타인, 쿠르드, 인도네시아 아체 등 분쟁과 슬픔이 있는 땅을 찾아다니며 그곳에 평화와 나눔을 전해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삶을 사진에 담아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는데, 이번에는 카슈미르를 사진에 담아오셨군요. 박 시인은 디지털이 대세인 요즘도 아날로그 사진에 시인의 감성을 담습니다. 그것도 주로 무채색의 흑백 사진으로 담아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박 시인의 무채색 아날로그 사진에서 시인의 감성을 읽어내고, 박 시인의 사진을 빛으로 쓴 시라고 부르곤 합니다. ▲ 히말라야의 눈물, 카슈미르 (사진 박노해 시인) 시인은 무굴제국의 황제 제항기르가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카슈미르가 바로 그곳이다.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땅이 인간의 욕심에 의해 슬픔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신영복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금요일(1. 15) 밤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고 순간 멈칫하였습니다. 그 일주일 전에 선생님의 건강이 위중하셔서 예정된 동계특강이 취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만 하여도, 그래도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줄 알았는데 끝내 머나먼 길을 가셨네요. 아직은 저희 후학들이 선생님께 배워야 할 것이 많은데...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수의 삶을 살다가 1988년 광복절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보신 분, 감옥에 있는 동안 엽서나 휴지에 깨알 같이 쓴 글을 모아 출간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셨던 분. - 신영복 선생님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를 먼저 떠올리실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 신영복 선생의 붓글씨가 내걸린 선생의 분향소 저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작 제가 먼저 선생님의 세계를 접한 것은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책부터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다가 구속되어 20년을 감옥에서 살고 나온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남대문시장에 가면 남대문로에 접하여 복잡한 시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하얀색 12층 건물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4층까지는 새로나 백화점이 들어서 있고, 그 위로는 상동교회지요. 상동교회의 내력을 잘 모르는 분은 왜 이리 복잡한 시장통에 교회가 들어서 있지? 할 수도 있겠습니다. 상동교회는 1888년(고종 25) 스크랜튼 선교사가 세운 교회입니다. 스크랜튼 선교사가 의료선교를 위하여 한성부 회현방 상동(尙洞)에 터를 구입하여 약국과 병원을 차리면서 오늘의 상동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벌써 교회 역사가 127년이나 되었네요. 그러니 남대문시장이 상동교회 보고 왜 남의 구역에 들어와 장사 방해하느냐?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상동교회는 단순히 역사 오랜 개신교 교회라는 것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동교회는 일제의 침략에 당당이 맞서 싸운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당시 상동교회에서 믿음과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전덕기(1875~1914) 목사입니다. 전덕기는 스크랜튼 선교사에게 감화를 받아 1896년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에 입교하였습니다. ▲ 190년대의 상동교회(완쪽), 상동교회를 독립운동의 산실
▲ 《그들이 사는 마을》, 스콧 새비지 엮음, 느린 걸음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이렇게 살지?라고 생각해보신 적 없으십니까? 기계문명의 거대한 흐름에 밀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이 가는 대로 자신도 따라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흠칫 놀라신 적은 없으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느꼈을지라도, 이 거대한 흐름 앞에 한 개인이 뭘 어찌 하겠느냐는 체념 속에 그저 묵묵히 흐름을 따라 갈 것입니다. 아니, 그 흐름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다시금 그 흐름 속에서 경쟁하며 탐욕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그런 흐름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콧 새비지가 엮고 느린 걸음 출판사에서 낸 책 《그들이 사는 마을》이 바로 그런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그들이 사는 마을》은 미국의 비영리단체 소박한 삶을 위한 모임에서 발행하는 잡지 《플레인(Plain)》에 실린 글을 위 잡지의 편집자 스콧 새비지(Scott Savage)가 엮은 책입니다. Plain이란 단어 자체에 소박한의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사는 마을이란 바로 이런 흐름을 떨쳐버리고 나온 사람들이 소박하게 사는 마을을 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