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동락골 갔을 때에 성주대교로 낙동강을 건넜는데, 육신사(六臣祠)라는 이정표가 보이더군요. 6명의 신하를 모신 사당? 무언가 틀림없이 사연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뭘까? 예전에는 이런 궁금증을 풀려면 집이나 사무실에 들어와 인터넷을 검색했어야 하는데, 요즈음은 슬기전화(스마트폰)가 있으니 즉석에서 궁금증을 풀 수 있지 않습니까? ▲ 성주대교로 낙동강을 건넜을 때 보인 육신사 팻말 찾아보니 육신사는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이었습니다. 사육신을 모신다고?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무덤이 있는 곳에 의절사가 있고, 단종이 죽은 영월에 창절사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이곳은 과연 사육신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것이지? 여기엔 기막힌 사연이 있습니다. 사육신은 세조가 역적으로 몰아 처형한 신하들 입니다. 옛날에는 역적이라면 3족을 멸하여 그 후손들이 이어지지 못하게 하였지요. 여자들은 노비로 만들었구요. 그런데 사육신중 박팽년만은 유일하게 후손을 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요? 지금부터 알아봅시다. 박팽년이 아버지와 아들 모두와 함께 처형될 때,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는 임신 중의 몸으로 대구의 관비(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어제 자야 여사의 내 사랑 백석에 대한 글에서자야 여사의 본명은 김영한이고, 기생으로서의 예명은 진향, 법정스님이 붙여준 법명은 길상화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야(子夜)는 백석 시인이 붙여준 별명이지요. 그런데 제 글을 읽으면서 왜 별명을 자야라고 지었을까 궁금해 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루는 자야가 함흥 시내 백화점에 갔다가 책방에서 평소 애독하던 잡지 《문예춘추》와 《여원》을 사가지고 돌아서는데, 문득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당시선집(唐詩選集)》이 눈에 들어오더랍니다. 자야는 그 타이틀이 너무도 아름답고 또 낭만적인 느낌이 들어서 대뜸 사가지고 와서 백석에게 보였답니다. 백석은 시집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거리며 자야를 바라보더니, 말합니다. 나 당신에게 아호(雅號)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라고 합시다! ▲ 산에는 꽃 피고 ⓒ 운곡 강장원 한국화가 자야는 당시선집에 들어있던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에 나오는 중국 동진 시절의 여인입니다. 당시 중국은 북방에서 중국을 엿보는 북방민족(흉노, 선비 등) 때문에 백성들을 돌아가면서 징병하여 변방을 지키게 하였는데, 자야의 남편도 이렇게 변
▲ 《내 사랑 백석》, 김영한, 문학동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병호사]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나온 《내 사랑 백석》을 읽었습니다. 부제(副題)는 백석 시인과 자야 여사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자야 여사가 백석 시인과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백석 시인(1912~1996)은 80년대 말에 해금될 때까지는 월북시인이라고 하여 우리에게는 잊혔던 시인이나, 소월을 계승하고 오히려 소월을 능가할 수 있는 민속적 감성의 풍부함으로 인하여 지금은 꽤 알려진 시인이라고 하겠지요. 사실 월북시인이란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백석은 해방 전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면서 고향인 평북 정주로 돌아온 것뿐이니 정확하게 말하면 재북(在北)시인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런 시인을 오랜 세월 남한에서는 묻어두었으니,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사상의 질곡 속에 살았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재북시인뿐만 아니라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 시인들 중에도 월북이 아니라 강제로 납북된 시인들이 많은데, 그 동안 우리는 이를 싸잡아 월북시인이라고 하여 경원시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시인이 정지용 시인이라 하겠습니다. 백석 시인까지는 어느 정도 아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자야여사(1916~1999)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 토크 갤러리 강의를 듣느라고 매주 월요일마다 갤러리 두에 갔습니다. 갤러리 두는 청담동 성당 옆에 있기에 강의가 있는 날이면 제 사무실에서 걸어가지요. 그런데 성당 뒤쪽으로 청담 근린공원이라고 조그마한 동산이 있습니다. 건물에 가려 큰 길에서는 뒤에 그런 공원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요. 매번 공부하러 갤러리 두에 가는데, 그래도 한번쯤은 뒤편 공원에도 들러주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지난번에 사무실에서 좀 일찍 출발하여 공원에 들렀습니다. 이 조그만 공원에 뭐 볼 것 있겠느냐 생각하며 공원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래도 제법 숲이 있고, 놀라운 것은 그 조그만 공원에 시냇물도 흐르고 약수터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조에서 직산현감을 지낸 권대균과 사헌부 감찰을 지낸 권옹의 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감탄하면서 숲속 길을 걷는데, 한쪽에 비석이 있습니다. 비석에는 큰 글씨로 홍순언과 강남녀의 전설이라고 쓰여 있네요. 응? 이게 뭘까? 내용을 보니 역관 가운데 드물게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훈되고 당릉군(唐陵君)에까지 봉해진 역관 홍순언(1530~1598)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제 봤더니 홍순언이 청담동 출신이었네요.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삼성병원이 사용하다가 새로 단장하여 시민 품으로 돌아온 경교장을 둘러보았습니다. 경교장은 잘 아시다시피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했을 때부터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이지요. 경교장은 원래 일제강점기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이 김구 선생에게 쓰시라고 제공한 건물입니다.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는데, 일본 냄새가 난다고 김구 선생이 근처에 있던 경교(京橋)의 이름을 따서 경교장이라고 하였지요. ▲ 백범 김구 선생이 귀국한 뒤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무실로 쓰던 경교장 경교장은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 뒤 6. 25. 전쟁 전에는 중국 대사관저로 쓰이다가 6. 25. 전쟁 중에는 잠시 미군 특수부대 및 임시 의료진 주둔처로 사용되었네요. 그리고 1956년부터 12년간은 월남대사관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 삼성이 매입하여 그 후 줄곧 강북 삼성병원으로 쓰였더군요. 저도 예전에 이 병원에 왔을 때 경교장 뒤로 큰 병원 건물이 세워지고, 경교장은 겨우 건물 앞면만 남고 속은 병원으로 사용되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다가 경교장을 복원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삼성이 통 크게 내놓아 지금 다시 예전 모습으로
[그린경제/얼레빗 = 양승국 변호사] 최근 일산을 다녀오면서 서오릉 모퉁이에 있는 창릉 모퉁이공원에 다녀왔습니다. 창릉 모퉁이공원이라는 이름이 재미있네요. 이 공원 뒤쪽에 서오릉 중의 하나인 예종과 그의 계비(繼妃) 안순왕후 한씨의 능인 창릉이 있기에 창릉 모퉁이공원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모퉁이공원에는 임진왜란 때 맹활약한 밥할머니의 석상이 있습니다. 바로 이 석상을 보려고 모퉁이 공원에 온 것이지요. 공원이라고 하니 그럴 듯한 공원이 연상되겠지만, 사실 밥할머니 석상과 3개의 비석이 전부인, 공원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그야말로 작은 모퉁이 공원입니다. ▲ 서오릉 창릉 모퉁이공원에 있는 밥할머니 석상, 목이 떨어진 채다. 밥할머니는 북한산 부근의 대부호 문씨 집안의 며느리인 해주 오씨입니다. 해주 오씨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얘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양반집 며느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밥할머니의 활약상에 대해 알아보지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전황은 역전되어 왜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593년 1월 27일 여기서도 멀지 않은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과 조선의 연합군은 왜군에게 참패하면서 오히려 왜군에게 포
[그린경제/얼레빗 = 양승국 변호사] 공양왕릉에 이어 월산대군 무덤을 찾았습니다. 월산대군 무덤은 저번에 찾은 송강이 사랑한 기생 강아 무덤 인근 지역에 있습니다. 사실 그때 강아 무덤를 보고 난 후, 연이어 인근에 있는 월산대군 무덤도 찾으려 했었는데, 이때도 이정표 부실로 월산대군 사당만 보았지 월산대군의 무덤은 찾지 못하였습니다. 사당은 찾았는데 무덤은 찾지 못하였다는 게 이상하다 생각할 것입니다. 사당과 무덤 사이에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강아 묘 쪽으로 있는 토끼굴로 하여 무덤을 찾아갔는데, 먼저 월산대군 후손들의 무덤이 보이더군요. 무덤들 앞에는 비가 있는데, 이곳에는 월산대군 3세까지 무덤이 있는 것으로 적혀있습니다. 비석 뒷면을 보니 18세 종손 이재달씨는 육군 중장에 국가보훈처 장관을 하였더군요. 2세, 3세의 무덤이 있다면 당연히 그 위로 1세인 월산대군의 무덤도 있을 텐데, 이들 후손들 무덤 위로는 숲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숲을 뚫고 가려는데 길도 없는 숲속을 뚫고 간다는 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양복 입고 구두 신고는 더 쉽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내려와 다른 길을 찾으려고 하는데, 이정표가 없어 헤매다가 결국 포기
[그린경제/얼레빗 = 양승국 변호사] 이성계 일파가 조선을 건국하였을 때, 전 왕조의 임금을 그대로 두면 아무래도 뭔가 목에 걸린 듯 불편하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후환을 없애고자 공양왕을 살해하였다고 합니다. 공양왕뿐만 아니라 고려 왕족들을 거제도로 데려간다며 배에 태워 가다가, 일부러 배에 구멍을 내어 고려 왕족들을 통째로 수장시켰다고도 하지요. 이걸로도 모자라 왕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로 몰아넣고 더 죽이려고 하자, 왕(王)씨들이 성을 전(全)씨, 옥(玉)씨 등으로 바꾸고 산속으로 숨어들어 목숨을 부지했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그리고 조선 건국에 협조를 거부하고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소재 광덕산 서쪽 골짜기의 두문동으로 들어간 고려 유신 72명이 - 정확하게 72명은 아니었을 텐데, 공자의 72 제자에 맞추어 72명으로 한 듯 - 계속 회유해도 나오지 않자 불을 질러 죽었다고 하지요. 일부러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고, 불을 지르면 살려고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 나오고 죽음을 택했답니다. 그래서 여기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이 생겼다고 하지요. 글쎄요, 죽일 생각이 없었다면 이들이 나오지 않을 때 얼른 불을 꺼야 할 텐데, 그대로 불과 연기에 죽게
[그린경제/얼레빗 = 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고양 갔다가 원당동에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의 무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보았습니다. 공양왕릉은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무덤이었습니다. 아무리 쓰러진 왕조의 마지막 임금의 무덤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의 고관대작의 무덤보다 못하다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요? 무덤 앞 안내문의 제목은 공양왕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입니다. 이성계가 압록강의 위하도에서 회군한 이후 고려의 실권은 이미 이성계에게 넘어와 있었지요. 그리하여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 손자로 몰아 쫒아내고는 다시 만만한 인물을 찾다가 제20대 신종의 6대손인 왕요(王瑤)를 왕에 앉히니, 이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입니다. 공양왕은 임금이 될 때에 이미 나이가 45살이었답니다. 안내문에는 왕요가 이런 말을 했다고 적어놓았군요. 나는 평생 동안 먹는 것, 입는 것이 풍족했고 시중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 나이에 왜 내가 이런 큰일을 맡아야 한단 말인가! ▲ 경기도 고양시의 고양왕릉 결국 공양왕은 2년 8개월 만에 이성계에게 임금 자리를 넘깁니다. 그리고 아내 노씨와 세자였던 아들 석(奭)과 세 딸,
[그린경제/얼레빗 = 양승국 변호사] 춘천에 가면 바로 소양강 강가에 우두산(牛頭山)이라고 있습니다. 춘천 사시는 분들이야 잘 아시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춘천 갔다가 우두산에 들렀습니다. 우두산에 들렀다고 하니까 등산했구나 생각하시겠지요? 후후! 겨우 134m 밖에 안 되는 산인데다가, 꼭대기 충렬탑까지 난 길로 차로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제가 그런 산을 갔다는 것은 우두산에 뭔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전에 한림대 전신재 교수의 춘천 우두산 전설과 신화적 성격 논문을 읽고 흥미를 느꼈는데, 마침 춘천을 가게 되어 우두산에도 들른 것입니다. 우두산(牛頭山) - 소머리산이라... 산 이름이 재미있네요. ▲ 우두산 위성 지도 그런데 소머리는 산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춘천의 옛 이름이기도 합니다. 춘천이란 이름은 1413년(태종 13)에 처음 사용된 것이고, 그전에는 춘주, 광해, 수주 등 다양하게 불렸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오래된 이름은 637년에 사용된 것이 보이는 우수/우두입니다. 우수(牛首)나 우두(牛頭)나 둘 다 소머리를 말하는 것이므로, 원래 이름은 소머리인데 이를 한자로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