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영월 청령포 푸른 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홀로 그곳에 보내져 한양의 하늘을 원망하다 숨을 거둔 열일곱 살 임금 단종! 한순간에 지아비와 헤어져 평생을 한으로 살아야했던 정순왕후! 세조의 부도덕한 정권찬탈에 반기를 들고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육신(死六臣) 등 세상일이 순리대로 되지 않고 역행하는 바람에 생긴 수많은 희생자들의 이름을 어찌 일일이 셀 수 있을까마는 충정공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1408~1456)의 삶 또한 이와 관련되어 목숨을 끊었으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을까? ▲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쇠기마을에 있는 충정공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 선생 무덤(왼쪽 박심문, 오른쪽 부인 청주한씨 무덤) 어제는 충정공 박심문 선생과 부인 청주 한 씨의 무덤이 있는 수억이 마을(일명 쇠기마을)을 다녀왔다. 길찾개(내비게이션)가 있다고는 하지만 무덤까지 길안내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서 원당역 언저리에서 헤매다가 쇠기마을의 약간 외딴 곳에 있는 청재공 재실을 겨우 찾아 무덤에까지 다녀 올 수 있었다. 세조 2년(1456)에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소임을 마치고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의주(義州)의 용만(龍灣)
[그린경제=가람 기자] 남원지역은 선사시대의 유적뿐 아니라, 고인돌 및 고분이 다양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남원시내권 일부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이 선사시대문화산포지 뿐 아니라 고분이 분포되어있던 지역이다. 특히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때(1960년도)만해도 중앙초등학교 주위엔 말무덥이라해서 논 가운데 동산(고분)들이 있었다. 이렇게 우리고장에는 선사시대적부터 많은 기록과 유적이 남겨져 있다. 특히 대산면 봉황대의 암각화(BC 2~4세기) 나 남원관광지의 거북바위 등이 선사시대의 유물로 알려져 있다. 고분은 현재 경작, 민묘 조성 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훼손되고 있어 남원시에서는 2011년 군산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여 40여 기의 고분의 전체적인 배치양상 및 개별고분의 잔존현황을 파악하였다. 그 결과를 토대로 올해 전북대학교 박물관과 함께 정밀발굴조사를 통해 고분군의 성격과 분포범위를 파악하고, 향후 정비방안과 보존 및 활용대책을 마련하고자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된다. 발굴대상은 40여 기 고분군 가운데 32호분에 대한 조사로, 지난 5월 30일 개토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고분의 규모는 직경 15m내외, 잔존높이 4m내외로 확인되었다. 현재 고분에 대한 조사는
[그린경제=가람 기자] 수임졍, 승월대,승월교 , 청허부... 지난 내용은 송강선생이 광한루원을 조성시의 광한루원만을 소개하였다. 해서 이번호에는 광한루원 앞 요천수와 관련한 선조들이 꿈꾸던 이상향을 소개해 본다. 광한루 앞 요천 건너편 바위의 아랫 부위엔 “승월대(昇月臺)”란 표기가 있다. 승월대란 말을 풀이하면 달에 오르는 누대라는 뜻이다. 그 전설의 내용은 팔월 한가위 둥근달이 떠오르면 하늘의 선녀들이 광한루원앞 요천변에 내려와 비파를 타며 춤과 노래로 밤새 노니다가. 새벽닭이 울 때 이곳 승월대에서 금빛 달기둥을 타고 달나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다. ↑승월대 위에자리했다는 기록을 통해 지난해조성한수임정(水臨亭) 승월대는 요천을 사이에 두고 광한루와 마주하고 있는데 그 위에 수임정(水臨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해서 근래 수임정을 복원하였다. 물을 내려다보는 정자라는 뜻의 이 수임정과 광한루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재현코자 건립한 다리가 승월교 이다. ↑승월교(昇月橋) 승월교는 승월대와 천상의 월궁인 청허부를 이어주던 전설의 금빛 달기둥을 상징한다. 선녀들과 요천에서 노니다가 승월대위에서 달기둥을 타고 월궁에 오르듯이 사람들이 승월교를 건너 지상의 월궁
[그린경제=가람 기자] 오는 6월 22일(토요일)춘향전의 배경이 된 남원 광한루원에서 국악 뮤지컬 가인춘향이 오후 8시에 공연이 펼쳐진다. 남원시에서는 명승인 광한루원의 야경과 춘향사랑, 판소리 동편제의 본고장으로서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을 접목시켜 체류형 관광상품으로 특화시키기 위하여 상설 공연으로 기획 준비한 프로그램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전라북도의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의 공모사업으로 선정 국 도비 1억 4천만원을 확보 추진되는 상설공연은 이몽룡이 성춘향을 보고 첫눈에 반한 곳으로 알려진 광한루원에서 야간의 풍광과 함께 펼쳐져 극의 감동을 더할 것으로 보인다. 남원시립국악단이 오는 6월 22일부터 10월 19일까지 4개월동안 매주 토요일 저녁 8시부터 광한루원 특설무대에서 국악 뮤지컬가인춘향을 야간상설로 공연할 예정이다. 특히 여름행락철을 맞아 관광객이 몰리는 7월 19일부터 한 달 동안은 금요일에도 공연을 진행해 더 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남원 국악의 멋을 알릴 계획이다. 창극과 뮤지컬의 장점을 섞어 춘향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국악 뮤지컬 가인 춘향은 젊은 층의 선호도가 높은 뮤지컬의 빠른 전개와 활기찬 율동, 구체적인 서사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
[그린경제=가람 기자] 지금부터 118년 전이었던 1894년 갑오년.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의 가치를 내걸고 동학도와 농민군이 봉기를 일으켰다가 왜군과 관군, 민보군의 반격으로 20~30만 명의 무참한 순절자를 뒤로 한 채 역도, 폭도, 비도가 되어 눈보라 휘몰아친 광야와 산야로 내몰리고 숨어 살아야 하게 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고 막을 내리던 해였다. 100년이 훨씬 넘은 세월도 세월이지만 역도로 몰린 동학도와 농민군, 그리고 그 가족들은 행여나 그 흔적이 남아서 다시 잡혀 갈까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자료들을 없애버렸다. 우리 남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자료를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나 천만다행으로 동학농민전쟁 당시 지휘부의 일원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하며 싸우다가 살아남으신 유태홍 교구장의 구술을 최병헌 후임 교구장이 기록으로 남긴 「남원군 종리원사 부 동학사」 및 순교약력이 보존되어 있어 당시 남원의 참상을 되짚어 볼 수 있게 되었고,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한 연구결과가 전라좌도 농민군의 총 지휘부였던 남원의 동학과 농민혁명 당시의 윤곽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단 1년간 시작되고 막을 내리긴 했지만 그 부침 속에
[그린경제=가람 기자] 춘향전의 배경지로 잘 알려진 광한루원(廣寒樓苑. 명승 제33호)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원래 광한루(보물 제281호)는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라는 작은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26년 (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 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면서부터 광한루가 되었다고 한다. 그후 송강정철에 의해서 이상향의 세계인 월궁을 상상하며, 확장 한 것이 오늘날의 광한루 형태로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광한루에도 걸려있는 편액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철의 전라관찰사시절을 노래한 그의 시, “청풍명월”을 소개한다. 청풍명월속에.... 恢拓銀河弄明月(회척은하농명월) 栽培塢竹挹淸風(재배오죽읍청풍) 一年南國巡宣化(일년남국순선화) 只在淸風明月中(지재청풍명월중) 은하연못 크게 넓혀 밝은 달과 노닐고 둑위에 대를 심어 맑은 바람을 들였네 한해 남녁관찰사로 일할 적에 청풍명월속에서 지냈네.. 정철은 일 년여 동안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밝은 달과 맑은 바람과 더불어 지냈다고 술회한다. 이 시는 정철이 남원
그림경제=가람 기자] 송강 정철과자미(진옥)의 사랑이야기..... (백일홍꽃을 보고 자미라하는데 남원의 시목이기도 하다. 송강이 전라감사로 있을 무렵이라니 정철이 48세 전후의 중년시기였던 것 같다. 남원 관아에 자미(紫薇)라는 동기(童妓)가 있었는데 송강이 자미의머리를 얹어주었다고 한다.(머리를 얹는다는 것은 옛날 처녀들이 결혼을 하면 긴 머리를 돌돌 말아 머리위에 얹고 풀리지 않도록 비녀을 꽂는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당시 송강의 관찰사 시절을 그의 시에서 잠시엿보자. 청풍명월속에.... 恢拓銀河弄明月(회척은하농명월) 은하연못 크게 넓혀 밝은달과 노닐고 栽培塢竹挹淸風(재배오죽읍청풍) 둑위에 대를 심어 맑은 바람을 들였네 一年南國巡宣化(일년남국순선화) 한해남녁관찰사로 일할적에 只在淸風明月中(지재청풍명월중) 청풍명월속에서 지냈네.. 화자는 일년여동안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밝은달과 맑은바람과 더불어 지냈다고 술회한다. 이 시는 정철이 남원의 광한루를 크게 증축(1582년 선조 15년)하고, 쓴시다. 송강은 광한루 연못을 파고,세 개의 섬(삼신산,삼신선도)을만들어동쪽의방장섬에배롱나무를중앙의봉래섬에는대나무를서쪽오작교옆의영주섬에는연정을세웠고호수
[그린경제=가람 기자] 남원문화대학에서는 답사활동을 통하여 호남3대석물로 알려진 윤효손선생, 최상중선생, 최시옹 선생의 묘동을 답사하였다. ○문효공 윤효손(文孝公尹孝孫) 묘동 신도비 규모도 웅장하고 화려하다. -윤효손 신도비(국가보물 584호) 전남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신도비는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 중 위업을 세웠거나, 학문이 뛰어나 후세에 모범이 될 때에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윤효손(1431~1503)은 단종 원년(1453)에 과거에 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성종때에는 경국대전 오례의주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9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효(文孝)' 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돌은 앞발의 형태가 특이한데 보통 머리쪽을 향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앞발을 뒤로 구부려 발톱을 아래의 연꽃받침에 붙이고 있다. 머릿돌이 새겨진 용의 조각은 사실성이 뛰어나며, 꼭대기에는 둥근 돌을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비문에는 윤효손의 평생업적과 자손들의 계보 및 그의 충효와 인품을 기리는 글들이 적혀 있다. 조선 중종 1
우리나라 불교는 통일신라의 귀족중심의 교종불교에서 통일신라말 중국달마대사의 학풍을 이어받은 새로운 선종 9산선문이 도래하면서 남원실상산파의 실상사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이후 남원불교는 전국적으로 유명승려와 불자 일천여명이 몰려들면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되고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사찰들이 추가로 건립되면서 각종 석조문화재가 불사되는 등 새로운 불교문화를 주도하게 되면서 전국적인 불교성지화가 진행된다. 이렇게 남원지역은 그 과정 속에서 남원에 많이 분포되어있는 화강석에 불상부조화 작업의 결과물인 바위부처님 즉 마애불이 많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남원시대산면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우리지역의 마애불은 대부분 통일신라말기와 고려초기의 사회혼란시기에 조성되었다. 이는 마애불의 특성상 통일신라말과 후삼국 그리고 고려로의 재통합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 의미가 부여 되어있다는 것과도 상통한다. 또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하실 때에 하신 손 모양으로 양손을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장지끝을 서로 맞댄 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펴진 마지막 두 손가락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형태로 남원지역 마애불의 대부분이 수인형태에서 설법인(전법
[그린경제=가람 기자] 아막산성은 백제와 신라의 옛 성으로 상호 중요한 요새인데 수도 없는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백제에서는 아막성, 신라에서는 모산성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아막성은 1,500여년전의 산성으로서 성벽을 이루었던 석재들이 무너져 수북이 쌓여 있으며, 산 중턱에는 4~5m 높이의 돌기둥처럼 생긴 돌탑이 서있다. 금방 바람만 불어도 넘어갈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한 세월 넘어가지 않고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돌탑은 성 돌로 쌓은 데다 덩굴들이 탑을 감고 있어오랜 세월 버텨낸 것이다. 이 돌탑을 쌓은 것은아영이 고향인 박철수씨가 1967년 스무 살 새내기 때 아래 문성암에서 여름 한철을 보내면서 쌓은 것으로아침이면 일어나 새로운 대학생활과 삶의 꿈을 하나씩 돌덩이 싣고 쌓고 또 쌓았다고하니 더욱 놀라운일이다. 얼마전 TV 사극에서 삼국의 영토분쟁사를본 뒤 백제와 신라의 모산성(아막성)에 대한 얘기에 눈길이 갔다. 백제 무왕은 4만 병력으로 아막산성을 포위하니 신라왕 진평은 정예 기병을 보내 막아 싸웠다는 대목이다. 백제군은 신라군을 평지로 끌어내기 위해 패한 척 도주하여 매복했는데, 신라 장수 무은이 적의 도주를 쫒아 군사 1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