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소비자 가전 전시회(CES) 소식을 또 들었습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이제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왔음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뉴스에서는 이를 두고 '새로운 시대의 시발점(始發點)'이라거나 '혁신의 계기(契機)'가 마련되었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그 커다란 흐름을 그저 '시작되었다'거나 '계기가 되었다'는 딱딱한 한자어로 나타내고 말기에는 어딘가 아쉬웠습니다. 막막하던 미래가 뻥 뚫리는 듯한 그 벅찬 느낌을 설명하기엔 많이 모자라게 느껴졌다는 것이지요. 이럴 때, 우리네 농부들이 논둑에서 쓰던 토박이말 '물꼬'를 떠올려 봅니다. '물꼬'는 '논에 물이 넘나들도록 만들어 놓은 좁은 통로'를 뜻합니다. '논꼬'라도도 하며 '진전이 없거나 막혀 있는 상태를 푸는 실마리나 계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많이 쓰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 말 속에 들어있는 생명력 넘치는 심상입니다. '시발점'이 기계가 움직이도록 단추를 누르는 듯한 차가운 시작이라면, '물꼬'는 막혀 있던 논둑을 허물어 메마른 땅에 생명의 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게 해 목마름을 가시게 해 주는 뜨거운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인공지능(AI)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추운 겨울, 밖의 찬 공기와 맞닿은 유리창을 보면 하얗게 얼어붙은 무늬들을 보곤 합니다. 과학 시간에는 '수증기의 승화'나 '결빙' 현상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 꼼꼼하고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그저 '유리창에 성에가 끼었다'거나 '얼음이 얼었다'는 말로 퉁치기에는 어딘가 아쉽습니다. 붓으로 세밀하게 그리기도 어려울 듯한 그 모습을 설명하기엔 많이 모자라게 느껴집니다. 이럴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쓰시던 토박이말 '서리꽃'을 떠올려 봅니다. '서리꽃'은 '유리창 따위에 서린 김이 얼어서 꽃처럼 엉긴 무늬'를 뜻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말 속에 들어있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말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꽃은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흙이 키워내지만, 이 꽃만큼은 가장 맵찬 추위와 딱딱한 유리가 키워낸다는 점입니다. "창문에 성에가 잔뜩 꼈네, 춥겠다"라는 걱정 섞인 말보다, "밤새 창문에 서리꽃이 활짝 피었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삭막한 겨울 풍경 속에서도 숨겨진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결빙'이나 '응결'이 과학의 언어라면, '서리꽃'은 차가운 현실조차 시로 승화시켰던 우리네 삶의 말인 셈입니다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대한(大寒)이 소한(小寒)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 소한(小寒)이 그제였는데 옛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기상청 예보대로 온 나라에 영하권의 강추위가 찾아왔고, 밤부터는 눈발까지 날리는 곳도 있을 거라고 합니다. 아침 출근길, 슬기말틀(스마트폰) 날씨 앱을 켰습니다. 곳에 따라 달랐겠지만 '영하 몇 도', '체감 온도 영하 몇 도'와 같은 숫자만으로는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얼굴을 때리는 바람의 느낌을 설명하기엔 어딘가 부족합니다. 단순히 온도가 낮은 것이 아니라, 바람이 마치 날카로운 채찍처럼 살을 파고들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럴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쓰시던 토박이말 '맵차다'를 꺼내 봅니다. '맵차다'는 '(바람이나 날씨가) 맵고 차다'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말 속에 들어있는 촉각적 심상입니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매운 맛처럼, 추위가 단순히 차가운 것을 넘어 살갗이 아릴 정도로 독하고 맵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 날씨 정말 춥네"라는 건조한 말보다, "오늘따라 바람이 참 맵차다"라고 할 때, 우리는 비로소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실감합니다. '강추위'나 '한파' 같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서도좌창으로 전해오는 <장한몽>의 전반부를 소개하였다. 장한몽(長恨夢)은 “긴 시간 잊을 수 없는 꿈같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남녀 사이 애정, 결혼 문제를 다룬 신파조(新派調)의 이야기라는 점, 시작 부분부터 “이수일을 배반하고 김중배를 따라가던 심순애를 아시는가? 금강석(金剛石)에 눈이 어두워 참사랑을 잊었으니 그 마음이 좋을 손가!, 사랑으로 돈을 구해 진정을 잊었으니 그 마음이 좋을 손가?, 목숨같이 사랑하던 심순애가 남의 아내가 되었으니 생각사록 원통하다”라는 등등의 노랫말이 쏟아져 나온다고 이야기했다. 초창기에는 창가(唱歌) 식으로 불러오던 형태였으나, 서도(西道)의 좌창(坐唱) 형식을 빌려 불러오고 있다는 이야기로 그 줄거리는 이수일이라는 남자 주인공이 어려서 부모를 잃고 심순애의 부모 밑에서 친남매같이 지내다가 연인(戀人)의 관계로 발전, 혼인을 약속했으나 이를 심순애가 어기게 된다는 이야기, 그러나 그 배경에는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한 명분이 담겨 있어 동정의 여지도 없지 않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 후반부 이야기로 이어간다. 결과적이지만, 심순애의 처지나 부모의 처지에서도 이수일과의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차가운 금속 부품을 조립한다고 해서 모두가 '혁신'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늘 소비자 가전 전시회(CES) 2025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의 인공지능 로봇 소식을 들으셨나요? 사람들은 그들이 기술을 '개발(開發)'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기술을 '벼려 냈습니다.' ▶ 오늘의 토박이말: [벼리다] 1) 무디어진 연장의 날을 불에 달구어 두드려서 날카롭게 만들다. 2) 마음이나 의지를 가다듬고 단련하여 강하게 하다. '개발'이 책상 위에서 머리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벼리다'는 뜨거운 불 앞에서 수천 번 망치질을 견뎌내는 땀방울입니다. 대장장이가 무딘 쇠를 쓸모있는 칼로 만들기 위해 밤을 지새우듯, 혁신적인 기술 하나를 위해 수없는 실패를 두드리고, 다듬고, 날을 세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미래적인 로봇을 가장 전통적인 우리 토박이말로 나타낼 때, 비로소 그 안에 담긴 '사람의 치열함'이 보입니다. ♥ [깜짝 참여잇기] 당신은 오늘 무엇을 벼리고 있나요? 무뎌진 다짐인가요, 아니면 내일의 실력인가요? 뜨거운 불 앞에서 쇠를 벼리듯, 오늘도 치열하게 자신을 단련하고 있는 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바늘구멍 틈새로 황소바람 들이치니흙벽 사이 한기가 칼날처럼 매섭구나윗목 숭늉 사발은 이미 하얗게 얼었는데 낡은 이불깃 끌어당겨 시린 몸 녹여본다. 글 이윤옥, 그림 이무성 화백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2026년 새해 첫날, 명동 거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고 합니다. 새로운 희망을 외치는 목소리와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열기가 빠져나간 새벽, 텅 빈 거리에는 40톤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만이 덩그러니 남았다고 합니다. 모두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외치며 집으로 돌아갈 때, 영하의 추위 속에서 남들이 버린 양심을 묵묵히 쓸어 담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등을 구부리고 쓰레기를 치우시는 모습을 생각하며 우리말 '뒷갈망'을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이 끝나고 뒤처리를 하는 것을 '뒷정리'나 '마무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토박이말 '뒷갈망'에는 그보다 더 깊고 묵직한 책임감이 배어 있습니다. '갈망'은 어떤 일을 감당하여 수습하고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곧, '뒷갈망'은 단순히 어지러운 것을 치우는 행위를 넘어, 일이 벌어진 뒤의 상황을 책임지고 보살펴서 온전하게 매듭짓는 마음까지를 포함합니다. "저 사람은 일을 참 잘 벌이는데, 뒷갈망이 안 돼." 우리가 흔히 이런 말을 쓸 때, 그것은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뜻일 겁니다. 반대로 "걱정 마,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혹시 오늘 아침, 이불 속에서 나오기 힘들어 떠오르는 해를 놓치셨나요? 아니면 치열한 삶의 현장에 있느라 하늘 한번 볼 여유가 없으셨나요? 그래서 제가 준비했습니다. 오늘 가장 먼저 솟아오른 해의 기운, 그 따끈따끈한 '돋을볕'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진 속 저 붉은 기운이 보이시나요? 아침 해가 막 솟아오를 때 쫙 퍼지는 저 햇볕을 우리말로 '돋을볕'이라고 합니다. 단순한 햇빛이 아닙니다. 어둠을 밀어내고, 얼어붙은 땅을 녹이며 '돋아나는' 힘입니다. 옛사람들은 해가 솟는 것을 보며 그냥 "해 떴다" 하지 않고, "볕이 돋는다"라고 했습니다. 마치 새싹이 땅을 뚫고 돋아나듯, 희망도 힘차게 솟아나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지요. 저는 오늘 이 '돋을볕'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Sunlight'라는 영어 단어에는 없는, 무언가 꿈틀대며 솟구치는 생명력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토박이말' 독자 여러분. 올 한 해, 유독 춥고 어두운 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마다 오늘 제가 보내드린 이 '돋을볕'을 꺼내어 쬐십시오. 당신의 2026년이, 저 돋을볕처럼 힘차게 솟아오르길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토박이말바라기 이창수입니다. 2025년의 마지막 해가 떴고 이 해와 함께 2025년도 저물어갈 것입니다. 저는 오늘, 지난 30년 가까이 이어온 저의 '토박이말 사랑'을 돌아보며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려 합니다. 그동안 저는 "여러분께 이런 토박이말도 있어요." "이 말이 좋으니 써 보세요.", "우리 토박이말을 살리고 지켜야 합니다."라고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새로운 단어를 찾아 밥상 위에 올려드리느라 애면글면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여러분이 그 밥상을 받을 준비가 되셨는지, 입맛에는 맞으신지 깊이 살피지 못했습니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소통이 없는 외침은 그저 소음일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은 어쩌면 저 혼자만의 지독한 '짝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그렇게 이어온 일방적인 짝사랑을 '갈무리'하려 합니다. 오늘의 토박이말 '갈무리'는 단순히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일의 뒤처리를 잘하여 거두거나, 다음을 위해 잘 정돈하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지난 글에 있었던 낡은 버릇들을 깨끗이 갈무리하고, 새해에는 여러분의 가슴에 닿을 수 있는 새로운 글을 쓰는 사람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어부들의 노래, <잦은 배따라기>, 일명 <봉죽타령> 이야기를 하였다. 이 노래는 선창자(先唱者)의 메기는 소리와 선인(船人) 모두의 제창(齊唱)으로 후렴구를 받는 노동요(勞動謠)로 선창자가 본절(本節)을 메기면, 나머지 모두가 후렴구를 제창하는 형태라는 점, 본절 내용은 대체로 돈이나, 재물, 술과 관련된 내용, 또는 풍랑과 무사 귀환, 만선(滿船)과 풍획(豊獲) 등이란 점, 성난 파도와 싸워가며 생업을 이어가는 어부들이 안전하게 귀가하게 된 고마움이나, 풍어(豊漁)에 관한 감사함, 그리고 뱃사공들의 소박한 꿈도 엿보게 한다는 내용들을 소개하였다. 이번 주에는 서도좌창으로 전해오는 <장한몽>을 소개한다. 장한몽(長恨夢)이란 “긴 시간 사무쳐 잊을 수 없는 꿈같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이수일과 심순애>라고도 하는데, 이 노래는 남녀 사이 애정문제, 결혼문제 등을 다룬 신파조(新派調) 이야기로 재미있게 진행되고 있다. 그 주제는 젊은 남녀 당사자들은 물론이려니와 부모 세대에게 있어서도 결혼을 통한 남녀 사이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