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조선시대에서 나라에 재앙이 생기거나 국정을 펴는데 필요할 경우, 임금은 현실정치에 대한 잘못과 민폐에 대해 의견을 가감 없이 청취하곤 했습니다. 구언(求言)이란 제도가 그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정사에 필요한 바르고 아름다운 말을 구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나라의 재변(災變)은 하늘로부터 견책을 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임금은 스스로 통치행위의 문제점을 되돌아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상향식 여론수렴제도인 구언을 활용한 것입니다. 재이가 발생하면 우선 임금은 국정 전반에 대해 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한다는 차원에서 관료를 비롯하여 지방의 유림들, 심지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도록 이른바 구언전지를 내립니다. 그러면 응지상소(應旨上疏)라고 하여, 신하와 백성들은 상소를 통해 자신의 뜻과 생각을 개진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응지상소 만큼은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임금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검열과정이 생략된 밀서(密書)인 셈입니다. 임금은 일일이 상소를 읽어보고 내용이 적절하다 싶으면 정책에 반영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습니다. 구언제도는 삼국시대에서부터 그 흔적이 보입니다
[그린경제=이주영 기자] 최근 국립극장은 2013~2014 국립레퍼토리시즌 간담회를 가졌다. 시즌2라고 할 수 있다. 시즌1(2013~2014)은 2012년 9월 5일부터 2013년 6월 29일까지이었다. 국립극장 개관 후 60여년의 역사에 처음으로 대장정을 마친 것이다. 지난 해 시작 당시 우려 반, 기대 반 속에 진행되었다. 하지만 도입 이후, 전년도 대비 국립극장 3개 전속단체의 시즌 관람객 수가 299% 이상이 증가하였고, 작품 수가 평균 2배 이상 증가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아울러 언론보도 건수도 전년도 대비 300% 이상 증가를 보인 바 있다. 국립극장의 전속단체를 중심으로 독립한 국립예술단체들의 협업이 결실을 보인 것이다.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시즌2의 돛이 올랐다. 2013년 8월 14일부터 2014년 6월 28일까지 319일간 7개 국립예술단체 작품 63편이 관객을 만날 채비를 하고 있다. 63편 중 레퍼토리는 14편, 신작은 13편, 상설공연은 36편이다. 이번 시즌에 발표하는 신작의 수는 이전 시즌과 같고, 레퍼토리의 수는 2편 늘었다. 국립극장은 전통예술을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대표 복합문화공간이다. 단순히 전통 공연예술을 공연하
[그린경제=육철희 기자〕우리의 전통적인 밥상예절은 웃어른을 공경한다는 동양이론의 기본적인 사상이며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웃어른께 드린다는 정신이 바탕이었다. 그러나 서양의 생활양식이 들어오고 핵가족화로 인해 일반 가정의 식사풍속이 달라져 밥상 보다는 식탁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전통적인 밥상예절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 예전 사대부는 외상(독상)을 받는 것이 기본이었다. ▲ 1809년(순조 9)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엮은 가정백과 ≪규합총서≫ 조선시대 가정백과사전인 ≪규합총서(1869)≫에 보면 밥을 먹을 때는 첫째, 음식에 들어간 정성을 헤아린다. 둘째, 내가 과연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 성찰한다. 셋째, 입이 즐겁고 배부른 것만으로 일삼지 않는다. 넷째, 음식이 약이 되도록 골고루 먹는다. 다섯째, 인성을 갖춘 후에야 음식을 먹는다는 식시오관(食時五觀) 곧, 밥을 먹을 때 살펴보아야 할 다섯 가지를 들어 밥을 먹을 때도 마음가짐을 바르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우리의 일반적인 식사예절을 간추려보면 첫째, 밥을 먹기 전에 국 국물이나 찌개국물을 먼저 먹는다. 둘째,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손에 들고 먹지 않고 밥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조선시대에서 임금과 신하의 말과 행동을 적는 사관(史官)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먼저 문과 시험 급제자 중에서 젊고 기개가 높아야 하며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기혼자에다 가문이 훌륭해야 가능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인척에 따라 어떤 정치집단에 가입할지 모르므로 직서(直書) 정신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보았고, 훌륭한 가문의 자제는 어떤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존심을 가지고 직필(直筆)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직서과 직필은 사관에게 생명과도 같은 가치였습니다. 사관들이 쓰는 사초는 단순히 왕이나 대신의 말과 행동을 적는데 그치지 않고, 견제하는 기능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하는 유교사회 조선에서 당장의 잘못은 어떻게든 모면할 수 있지만 사초는 나중에 실록이 되어 남으니, 후세의 비판과 평가가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한 마디 말, 하나의 행동도 쉽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요. 그런 점에서 사관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태조도 세종도 실록 보려 했으나 실패하다 태종은 사관과 자주 충돌한 임금 중 한 명입니다. 사사건건 입시하여 왕의 일거수일
[그림경제=육철희 기자] 고래에 따르면 제왕은 하늘을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산천을 제사지내며, 사대부(士大夫)는 조상을 제사지낸다.'고 했다. 제사 지내는 대상에 따라서도 그 이름을 달리했는데 하늘의 귀신(天)에 대한 제사는 사(祀), 땅의 귀신(地)에 대한 제사는 제(祭), 문묘의 공자에 대한 제사는 석전(釋奠), 그리고 사람 귀신(人鬼)에게 지내는 제사는 향(享)이라 하였다. 모시는 대상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장소도 달리했는데 하늘에 대한 제사는 원구단(圓丘壇), 땅과 곡식에 대한 제사는 사직단(社稷壇), 농사를 관장하는 농신(農神)에 대한 제사는 선농단(先農壇), 누에를 관장하는 신에 대한 제사는 선잠단(先蠶壇)에서 지냈다. 왕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宗廟), 공자를 비롯한 선현의 제사는 문묘(文廟)에서 지내고, 일반 백성들은 사당(家廟)이나 대청, 안방 등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 전통제례를 지내는 모습 조상을 제사 지내는 의식절차가 제의례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존재하게 한 근본에 보답해야 할 것이고(報本之禮) 그것이 효도(孝道)이다. 효도란 부모와 조상을 극진한 정성과 공경으로 섬기는 일인데, 살아계신 조상을 지성으로 섬기면서 돌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조선시대 문과 시험문제, 즉 책문은 임금이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적는 시험을 이릅니다. 국가의 비전에 대한 젊은 선비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듣는 소통의 시간입니다. 예컨대 인재쓰기, 경제위기의 해결책, 국정운영의 방책 등을 임금이 물으면 젊은 인재들은 그에 따른 대책을 제시하는 열정적인 대화의 자리인 셈입니다. 태종 7년 4월 태종은 책문을 내리며, 다음과 같은 출제 배경을 밝힙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창업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법제 또한 갖추지 못했다. 또 천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역사(役事)가 그치지 않는다.---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소강(小康)을 이루려고(중략) 정사를 듣는 틈틈이 책을 보고 그 뜻을 강구하지만 힘을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태종의 주문은 소강(小康)을 이루는 방책을 적어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강은 작지만 강한 나라로 태종이 꿈꾸는 조선의 미래상입니다. 따라서 이번 책문은 태종의 고민과 비전이 함께 담긴 시험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나라, 태종이 꿈꾼 조선의 비전 그런데 소강을 이루려면 명나라와의 안정적인 외교관계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태종은 지성사대라는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조선시대 문과 시험문제, 즉 책문은 임금이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적는 시험을 이릅니다. 국가의 비전에 대한 젊은 선비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듣는 소통의 시간입니다. 예컨대 인재쓰기, 경제위기의 해결책, 국정운영의 방책 등을 임금이 물으면 젊은 인재들은 그에 따른 대책을 제시하는 열정적인 대화의 자리인 셈입니다. 태종 7년 4월 태종은 책문을 내리며, 다음과 같은 출제 배경을 밝힙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창업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법제 또한 갖추지 못했다. 또 천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역사(役事)가 그치지 않는다.---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소강(小康)을 이루려고(중략) 정사를 듣는 틈틈이 책을 보고 그 뜻을 강구하지만 힘을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태종의 주문은 소강(小康)을 이루는 방책을 적어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강은 작지만 강한 나라로 태종이 꿈꾸는 조선의 미래상입니다. 따라서 이번 책문은 태종의 고민과 비전이 함께 담긴 시험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나라, 태종이 꿈꾼 조선의 비전 그런데 소강을 이루려면 명나라와의 안정적인 외교관계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태종은 지성사대
[그린경제=육철희 기자] 옛 예서에 보면 소인(小人수양이 덜된 사람)의 죽음은 육신이 죽는 것이기 때문에 사(死)라 하고, 군자(君子수양이 된 사람)의 죽음은 도(道사람노릇) 를 행함이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종(終)이라 하는데, 사와 종의 중간을 택해 없어진다는 뜻인 상(喪)을 써서 상례라 한다.고 했다. 상례란 사람의 죽음을 맞고, 주검(屍)을 갈무리해 땅에 묻고, 근친들이 슬픔으로 근신하는 기간의 의식절차를 정한 예절이다. ▲ 전통 장례행렬(사진작가 송봉화 제공)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언젠가는 죽어 돌아오지 못하는 저승길로 영원히 떠나는 것이니,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가족, 친척, 친지에게 이보다 더 슬프고 비통한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의례 중에서 가장 엄숙하고 정중하여 그 절차가 까다롭고 그 이론이 구구한 것이 바로 상례이다. 중용(中庸)에는,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과 같이 하고, 죽은 사람 섬기기를 있는 사람과 같이 해야 한다'고 했다. 또 예기(禮記)에 보면, 부모를 섬기는 데는 3년 동안 상사(常事)를 치르고, 임금에게는 3년의 복(服)을 입으며, 스승에 대해서는 3년 동안 심상(心喪)을 입는다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인사가 만사라고 합니다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 어느 날 아수라백작처럼 얼굴을 바꾸거나, 국민 편에서 일한다기에 권력을 위임했더니 오히려 국민을 옥죄는 일을 목격할 때 우리는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 세종대왕의 동상 이러한 현상은 과거에도 적지 않았는데, 그래서 선조들은 인재쓰기를 정치의 요체로 삼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조 26년 1월 9일 어전회의의 의제도 인재 쓰기와 양성이었습니다. 당시 이조판서 원경하는 영조에게 인재는 미리 배양해야 위급한 일이 생길 때 대응할 수 있다고 고합니다. 그는 세종과 선조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세종은 절의를 지킨 사육신을 배양했고, 선조 또한 이순신을 발탁한 것 외에 초년에 이미 이항복이덕형윤두수윤근수유성룡이원익 같은 인재를 길러 얻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왕도 두 선대왕과 같이 인재를 미리 배양하기를 힘쓰라고 진언합니다. 화려한 인재풀 자랑하는 선조시대가 세종조보다 못한 이유 그러자 영조가 불쑥 묻습니다. 선조 때는 인재가 매우 많고 성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금 사람들은 매양 영묘죠(英廟朝)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그 까
[그린경제=강은숙 기자] '견오백지천년(絹五百紙千年)' 곧 비단은 오백년을 가지만, 한지는 천년을 간다.는 말이 있다. 수 천 년을 지켜온 우리의 종이문화는 비단보다 한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지작업을 하면서 요즈음 들어 종이를 다루는 사람들의 표정이 부드럽고 얼굴에는 늘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느껴가고 있다. 내 주변에는 평생 동안 닥종이를 만들고 있는 장인에서부터 종이접기, 종이 공예를 하는 작가들이 많은데 이들에게서는 어딘가 모를 천진난만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 무궁정광대다라니경(751년, 국보 제 126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내가 닥종이 인형을 처음 만난 것은 15년 전쯤의 일이다. 닥종이 인형을 처음 접했을 때 다른 미술 전시회에서 볼 수 없었던 소박하면서도 뭔가 크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감동을 느꼈다. 고백하자면 그 순간 평생 함께 하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닥종이를 손에 쥐면 미소가 번져오고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옴을 느낀다. 조상의 손끝에서 마음으로 이어져온 한지의 그 무엇이 이렇게 나를 편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 한지와의 만남이 더욱 소중하다는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