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육철희 기자] 조선시대에 어른이 되면 처음으로 술 마실 수 있는 자격을 주며 술은 적당히 마시면 맛이 좋고 향기로운 음식이지만 지나쳐서 몸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의 말을 하지만 예전에도 고주망태니 술 먹은 개라는 표현을 했던 것을 보면 술로 인해 일어나는 부작용은 과거에도 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술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이제는 개인차원을 넘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요즘 사람들은 술 마시는 법에 대해 어른들에게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적기 때문에 술 마시는 예절에 대해 잘 모른다. 술 마시는 예절에 대해 조금 배워서 아는 사람들도 실제 술자리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경우는 드물다. 조선시대에는 향촌의 선비와 유생들이 향교나 서원에 모여 예로써 주연(酒宴)을 함께 즐기는 의례인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하였다. 향음주례는 학덕과 연륜이 높은 분을 큰 손님으로 모시고 여러 유생들을 손님으로 모셔서 진행하였다. 향음주례는 주인이 손님을 초청하여 주인과 손님 사이의 예절바른 주연을 통하여 연장자를 존중하고 덕 있는 사람을 높이며, 바른 예법과 풍속을 일으키기 위하여 시행하였다. 《예기(禮記)》 45편 향음주의에 의하면, 향음주란
[그린경제=김호심 기자] 70년대 후반 코미디언 출신 가수로 큰 인기를 얻었던 가수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미성. '아쉬움'과 '먼훗날'이란 노래로 당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녀의 본명은 이청자였다. 70년대 후반 코미디언 고(故) 서영춘과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는 그의 소개와 추천으로 가수로 데뷔하는 행운을 얻었다. 김미성이라는 예명도 사실은 서영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의 꿈을 꾸었던 김미성은 처음에 무용, 사회자, 구봉서ㆍ배삼룡 등과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며 순회 공연단의 멤버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악극단의 멤버들을 소개하는 전단지에 자신의 이름을 가장 처음으로 올리고 싶었던 그녀를 가수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준 이는 그녀의 남편 타미란 유명 제작자겸 매니저였다. 남편 타미가 키워낸 가수로는 태진아 정종숙, 진미령, 문주란, 김씨네, 장옥조 등이 있으며 당시 연예계의 마이다스 손으로 꼽혔다. ▲ 김미성 독집음반(먼훗날, 우리는 서로가) 김미성은 가수 장욱조로부터 '아쉬움'이란 곡을 받아 가요계에 첫 발을 디딘다. 그녀가 불렀던 아쉬움은 37살에 히트가 되었다.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와 온몸으로 부르는 서
[그린경제=김호심 기자]1930년대 중반 서울 청진동 어느 여염집에선 소녀의 앳된 노랫소리가 흘러나와 길을 가던 행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어느 날 이 노래에 매혹된 한 청년이 이 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 사람은 바로 빅터레코드사의 문예부 직원. 그 이튿날로 레코드사에서 만나자는 제의를 받은 목소리의 주인공인 17세의 앳된 소녀가 바로 황금심(黃琴心)이었다. 황금심(黃琴心)의 본명은 黃錦同(황금동)이다. 1936년, 그녀의 나이 18세 때 가수로 발탁되어 데뷔하였다. 데뷔곡은 알뜰한 당신이었다. 그녀의 노래는 당시 구성진 콧소리와 함께 뭇남성의 가슴을 흔들만했다. 그리고 서울 청진동의 목소리 좋은 무명의 소녀를 일약 스타로 군림시킨 노래이기도 하다. ▲ 황금심의 버들피리 음반 1937년 12월에 발표된 알뜰한 당신이 히트하자, 당시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머리까지 깎이고 집에 구금되고 말았다. 18세의 황금심은 단식을 하면서 고집을 꺽지않자 어머니의 간청으로 가수의 길을 계속하게 되면서 본명 황금동과 OK레코드 취입 때의 황금자 대신 작사가 이부풍이 지어준 황금심으로 빅터 전속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오케레코드와 빅터레코드에서 황금심을 먼저 차지하
[그린경제 육철희 기자〕내가 요즘 일과를 정해서 새로 펴낸 《춘추(春秋)》를 읽어 왔는데 오늘에야 겨우 끝났다. 그런데 자궁(慈宮, 조선 시대 임금의 후궁 또는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부터 태어난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 임금의 친어머니를 임금이나 신하들이 부르는 말)께서 내가 어렸을 때 책씻이[冊施時, 우리나라 풍속에 아동이 독서하다가 책을 다 떼면 그 부모가 음식을 차려놓고 기쁨을 표시하는데 그것을 책씻이라고 한다.] 하던 일을 생각하시고 음식상을 마련해 주셨기에 경들과 함께 맛보려고 하는 것이다. 위 글은 정조 23년(1799년) 12월 8일 왕조실록에 정조임금이 책씻이 곧, 어릴 때 세책례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춘추를 읽고 난 후 그것을 기념하여 신하들과 함께 축하한 내용이다. ▲ 전통 세책례 모습 이와 관련한 기록으로 정약용은임금이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음식을 준비하여 세서례를 하셨으니 임금이 시를 짓고 나로 하여금 화답 시를 짓게 하셨다.고 하여 그의 책 여유당전서에서 왕실의 세책례에 대해 밝히고 있다. 정조실록에 보이는 것처럼 왕실에서도 세책례를 했지만 세책례란 보통 조선시대 서당에서 책을 한 권 뗄 때마다 학동이 훈장님에게 감사함을
책을 씻고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만나는 세책례(洗冊禮)새로운 세상을 여는 스승과 제자의 발걸음〔그린경제 육철희 기자〕각신(閣臣)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요즘 일과를 정해서 새로 간행된 《춘추(春秋)》를 읽어 왔는데 오늘에야 겨우 끝났다. 그런데 자궁(慈宮)께서 내가 어렸을 때 책씻이冊施時] 하던 일을 생각하시고 음식상을 마련해 주셨기에 경들과 함께 맛보려고 하는 것이다.하니,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축하하였다. [상이 어제(御製)를 써서 내리며, 입시(入侍)한 신하들 및 《춘추》에 구두를 달거나 감독하며 간행하는 일에 참여한 신하들과 상이 동궁으로 있을 때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춘방(春坊)과 세자를 호위하던 계방(桂坊)의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위 글은 정조 23년(1799년) 12월 8일 왕조실록에 정조임금이 책씻이 곧, 어릴 때 세책례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춘추를 읽고 난 후 그것을 기념하여 신하들과 함께 축하한 내용이다.이와 관련한 기록으로 정약용은임금이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음식을 준비하여 세서례를 하셨으니 임금이 시를 짓고 나로 하여금 화답 시를 짓게 하셨다.고 하여 그의 책 여유당전서에서 왕실의 세책례에 대해 밝
[그린경제=김호심 기자] 바닷가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아- 마지막 한가지 못 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밑에 점 하나 입가의 미소까지 그렸지만 은 아- 마지막 한 가지 못 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 ▲ 방주연 음반 1 이 노래는 김지평 선생이 가사를 쓰고, 김학송 선생이 곡을 붙였다. 당신의 마음은 모래 위에 그리는 여인의 초상이다. 얼굴 모습은 턱밑에 점하나 까지 다 그렸지만 마지막 한 가지 못 그린 그 사람의 마음, 그것은 끝날 수 없는 사모함이며, 영원히 깜박거린 그리움으로 남고 있다. 마치 한 떨기 흰꽃 나도 사프란처럼 소중한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그리움을 담고 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70년대 자주색 가방, 기다리게 해놓고, 꽃과 나비 등 숱한 히트곡으로 20대의 젊은 시절을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으며 화려하게 보냈던 여가수 방주연이다. 그녀의 노래 속에는 특유의 청순하고 우아한 분위기속에, 움트는 그리움을 깊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켜주고 있다. 방주연의 음색은 만나고 가는 썰물이 아니고 만나러 가는 밀물의 목소리를 닳았다. 그리고
[그린경제=김호심 기자] 술잔을 들다말고 우는 사람아 두고 온 님생각에 눈물을 뿌리며 망향가 불러주는 고향 아줌마 동동주 술타령에 밤이 섧구나 밤이 섧구나 들어찬 목로주점 나그네 마다 넉두리 하소연에 푸념도 많아 내고향 사투리에 고향 아줌마 나그네 인생길에 불빛만 섧다 불빛만 섧다.... (1) 1962년 혁명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달성해 나가던 60년대 초! 모두들 잘 살고 싶어 했으나 아직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의 한국이었다. 쌀이 모자라 관에서는 분식을 장려했고 보리쌀을 섞지 않은 도시락을 학교에서 가려내고 있었다. 맨발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등교하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농촌의 사정은 도시보다 더욱 어려웠다. 보릿고개 5월이 오면 쑥을 캐먹는 아낙들이 동네 산야의 쑥을 다 채취한 뒤 먼 고장으로 이동까지 하면서 쑥을 찾아 다녔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쑥총이라고 말했고, 그들이 탄 기차는 저절로 쑥차로 불렸다. 또한 어촌에서는 멸치로 배를 채우는 멸치 고개이기도 했다. 1960년 당시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만 농가에 자식은 보통 7~8명이나 되다보니, 식량사정은 더욱 어려워져, 자식들은 마침내 공장으로 일하러
[그린경제 육철희 기자〕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로는 맹자의 어머니가 단연 으뜸이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 하여 맹자(孟子) 어머니 급씨(伋氏)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하여 맹자가 스스로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자녀교육에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과연 맹자의 어머니가 이사를 다니는 것만으로 맹자에게 깨우침을 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맹자 어머니의 자식을 위한 진정한 교육방법은 베를 잘라 아들을 가르쳤다는 열녀전의 단저교자(斷杼敎子)에서 더 잘 드러난다.집을 떠나 공부하던 맹자가 어느날 갑자기 공부도 싫증나고 부모가 그리워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맹자의 어머니는 마침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돌아온 맹자를 따뜻하게 반겨주기는커녕 맹자를 돌아보지도 않고 오히려 엄하게 맹자에게 물었다.공부를 다 마치고 왔느냐?맹자가 대답하기를 공부를 여전히 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하자, 그런데 어찌하여 중간에 돌아왔느냐?하고 다시 묻자 맹자는 제 물건이 하나 없어져 그 물건을 찾고자 돌아왔습니다.라며 변명을 하였다.이때 맹자의 어머
▲ 조선악극단(주요멤버 남인수, 김정구, 고복수, 이난영, 장세정, 박향림, 이화자 등)사진 ▲ 저고리 씨스터즈(이난영, 장세정, 서봉희, 김능자, 이준희)사진 ▲ 여수야화 신문광고 (1949.7) [그린경제=김호심 기자] 진정한 음악의 향수에 흠뻑 빠지고 싶을 때는 LP음반만큼 좋은 게 없다. 특히 지난 1920년대부터 1970년 때 발매된 음악들을 하나씩 들어본다면 분명 또 다른 새로운 맛일 테다. 퐁키(대표 김광우)는 한국의 유성기 음반과 LP 음반을 복각해 스트리밍 서비스하는 음악 감상 사이트 퐁키(www.ponki.kr)의 문을 열었다. 퐁키에는 한국가수 최초로 지난 1959년 라스베가스에 진출한 김씨스터즈(김숙자김애자이민자)는 물론 걸그룹의 원조인 1940년 저고리 씨스터즈(이난영, 장세정, 서봉희, 김능자, 이준희),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중국과 일본, 만주 등 동아시아에서 인기가 높았던 한류의 원조 조선악극단(남인수김정구고복수이난영장세정박향림이화자 등) 등 한국대중음악의 역사를 통으로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고인이 된 옛 가수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복원해 들을 수 있으며 1920년대부터 발매된 판소리, 민요, 대중가요 등의
[그린경제=김호심 기자] 80년대 초,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학생들에게는 마땅한 놀 공간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는 약속장소는 동네 빵집(큰 가마솥에 찐빵, 만두, 풀빵 등을 삶아 팔던 집)이 대부분이었고 좀 여유가 있는 아이들은 제과점 등에서 만나곤 했다. 그나마 생활지도를 나온 선생님에게 걸리는 날은 양아치나 날라리 취급을 받으며, 재수없으면 다음날 교무실로 불려가 먼지가 나도록 흠씬 두들겨 맞곤 했다. ▲ 추억의 롤라장 학생들에게 숨 쉴 공간조차 정해놓고 정해진 방식대로만 삶을 강요하던 시절.... 사람마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고 돌아가고 싶은 고향으로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은 진절머리가 나는 도려내고 싶은 기억이기도 하다. 1980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한 사람이라면, 더구나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한 사람이라면 대부분은 정치적인 격변과 도시문화의 충격으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시기를 살아야 했다. 너그러운 성격만큼이나 웃음 맑고 붓글씨를 잘 쓰던 어느 선배는 5월의 봄을 뒤로 하고 다시는 올 수 없는 길로 피 흘리며 사라져갔고, 정답던 선생님들 몇은 또 교단에서 쫓겨났다. 또한 거의 씨족의 구성원으로 형성된 촌에서 자라면서 마주칠 때마다 하루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