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역사 속 대결에서 패한 자는 왜곡되고, 묵살당하며, 잊혀간다. 지금이야 대권을 잡지 못하거나 정권창출에 실패했다고 해서 목숨이 위태롭진 않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임금이 되지 못하거나 권력 투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가문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내가 살려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 살벌한 시절이었다. 그런 냉혹한 시대, 한 인간이 온 힘을 다해 투쟁에 임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역사 속 악인이 되지 않기 위한 자연스러운 방어본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승자와 패자의 길은 나뉘는 법, 결국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을 아름답고 정의롭게 묘사했고, 약자는 곧 ‘악한 자’로 폄하되어 갖은 오명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이 책, 《소설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나쁜 남자편(최문정, 창해)》은 그런 약육강식의 서사구조에 반기를 든다. 과학교사였던 저자는 불합리한 인사 조치에 우울증을 얻어 휴직의 시간을 가졌다. 약자의 설움을 느끼던 그 시절, 평소 관심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보며 시름을 달랬다. 《조선왕조실록》 속 약자들의 모습은 ‘약하다는 이유로 악한 인간으로 몰렸던’ 자신의 모습과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노해 시인이 《걷는 독서》라는 책을 냈습니다. 걷는 독서라니? 걸으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인가? 그렇기도 하겠지만, 꼭 책을 들어야만 하는 건 아니겠지요. 걸으면서 묵상하고, 주위 자연과 교감하며 깨달음을 얻는 것도 걷는 독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박 시인은 어린 날 마을 언덕길이나 바닷가 방죽에서 풀 뜯는 소의 고삐를 쥐고 책을 읽었고, 학교가 끝나면 진달래꽃, 조팝꽃, 산수국꽃 핀 산길을 걸으며 책을 읽었답니다. 그러다보면 책 속의 활자와 길의 풍경들 사이로 어떤 전언(傳言)이 들려오곤 했답니다. 감옥 독방에 있을 때에도 박 시인은 ‘걷는 독서’를 계속합니다. 비록 세상 맨 밑바닥 끝자리에 놓인 두 걸음 반짜리 길의 반복이었으나, ‘걷는 독서’를 하는 동안은 박시인의 정신 공간은 그 어떤 탐험가나 정복자보다 광활했다고 합니다. 그 시절을 박시인은 감탄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철저히 고립되고 감시받는 감옥 독방의 그 짧고도 기나긴 길에서 아, 나는 얼마나 많은 인물과 사상을 마주하고 얼마나 깊은 시간과 차원의 신비를 여행했던가!” 자유의 몸이 된 뒤, 박 시인의 걷는 독서는 국경 너머 눈물 흐르는 지구의 골목길에서도 계속 되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안동에 가면, 누가 봐도 이상한 집 한 채가 있다. 분명 양반가의 기품이 서린 유서 깊은 고택이건만, 앞마당에 웬 철길이 가로지르고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이 살았던 고성 이씨 종택 임청각(臨淸閣) 얘기다.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주인으로 둔 탓에 아흔아홉 칸 종택이었던 임청각도 갖은 수모를 겪었다. 일제에 순종하지 않는 불량한 조선인, 곧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집으로 낙인찍혀 절반가량이 헐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철길이 놓였다. 일제는 부러 먼 길을 돌아가면서까지 임청각 앞마당에 철길을 내어 독립운동의 도도한 기상을 꺾으려 했다. 그러나 그 기상이 쉬 꺾일 것이던가. 정종영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은 바로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에 관한 책이다.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였으나 어른이 읽어도 좋을 책이다. 안동의 존경받는 유림이었던 이상룡 선생, 그가 경술국치 이후 어떤 삶을 택했는지 따라가다 보면 상류층의 책임을 실천한 또 하나의 훌륭한 사례를 만나게 된다. 그는 본디 안동의 존경받는 유림으로, 성리학을 공부한 유학자이자 고성 이씨 종파를 이끄는 대지주였다. 1519년 임청각을 지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영석 이석영(穎石 李石營). 그 이름을 세간에 묻거든 십중팔구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할 것이다. 그만큼 이석영 선생은 역사에 기록 몇 줄 남기지 않은 채 조용히 스러져갔다. 한때는 조선을 주름잡는 권문세족의 후계자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재산은 조선 팔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엄청났고 벼슬은 고종을 지척에서 보좌할 만큼 높았으며, 집안 또한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삼한갑족이라 불리는 명문가였다. 그러나 망국은 오고야 말았다. 나라의 녹을 받던 이들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협력할 것인가, 묵인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아도 됐다. 그저 묵인만 하면, 그때까지 누리던 것을 그대로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이석영과 그의 형제들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다시 없을 선택을 한다. 누대에 걸쳐 쌓은 재산과 지위,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가 전체가 만주로 떠난 것이다.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다. 올해 6월 남산예장공원에 개관한 ‘이회영기념관’의 주인공인 우당 이회영 선생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형이 바로 이석영 선생이다. 그러나 이석영 선생의 존재는 아는 이도 적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항공대 항공운항학과 장조원 교수가 이번에 《하늘의 과학》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하늘에 도전하다》, 《비행의 시대》에 이어 3번째 책을 냈군요. 이번 책 제목에는 ‘과학’이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 비행기는 온통 과학, 그중에서도 수학과 물리학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장 교수는 이 책을 쓰면서 첨단 과학을 대표하는 항공우주 과학에 수학과 물리학을 접목해 설명하고 싶었고, 학생을 비롯한 독자들이 이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스스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랬답니다. 그래서 장 교수는 시작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항상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물리 법칙들을 파헤치기 위해 수학이라는 언어로 표현했으며, 이를 통해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모든 것을 마스터할 수 있도록 했다. 《하늘의 과학》에서는 중ㆍ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포함된 수학과 물리학이 항공 우주 분야에 어떻게 응용되는지를 다뤘다. 어떤 함수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비교적 최근 학문적 진전을 보인 확률 이론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미분과 적분을 비롯해 벡터와 행렬, 로그함수, 삼각 함수 등이 비행기에 응용된 사례를 다룬다. 특히 수학과 물리학이 항공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전하! 종묘사직을 생각하시어 부디 옥체를 보전하소서!” 사극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사다. 지금도 대통령의 건강은 일급비밀에 해당하지만, 왕조시대 한 나라의 지존이었던 임금의 옥체(玉體)를 살피는 일은 나라의 존망과 직결되는 국가지대사였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어의(御醫)들에게 진료를 받고 뭇 백성은 구경도 하기 힘든 진귀한 탕약을 매일같이 복용해도, 그 옥체를 보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웠다. 즉위하기까지 받은 스트레스로 임금이 될 무렵에는 이미 몸이 망가져 있는 경우가 많았고, 임금이 되고 나서도 각종 압박과 과로에 시달리며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임금으로 사는 것’도 어렵지만, 임금으로 ‘건강하게’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임금의 고뇌와 근심은 줄곧 병이 되어 심신을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내려진 진료와 처방은 그 자체로 진귀한 사료이자 사관들이 미처 기록하지 못한 임금들의 내밀한 감정까지 보여주는 솔직한 기록이다. 현직 한의사 이상곤이 쓴 이 책, 《왕의 한의학(사이언스북스)》은 《신동아》 등에 연재한 칼럼을 엮은 것으로, 역사학자가 아닌 이가 썼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엄홍길’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히말라야 8,000m 14개 산을 오르고, 나아가 위성봉 얄룽캉, 로체샤르까지 더하여 히말라야 16좌를 오른 산악인 엄홍길! 그가 지난 6. 11. EBM 포럼의 강사로 와서 회원들에게 히말라야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회원들은 강연을 들으면서 엄홍길씨가 들려주는 16좌를 오르는 동안의 도전정신, 동료를 잃은 슬픔, 재미있는 에피소드 등에 같이 웃고, 같이 아파하였지요. 강연이 끝난 후 현장에서 엄홍길씨의 수필집 《꿈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라》를 샀습니다. 엄홍길씨는 히말라야 16좌에서 내려온 이후에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하여 가난한 나라 네팔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지어주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산사나이가 단순히 산에만 눈길을 두지 않고, 이렇게 산 아래에서 따뜻한 휴먼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니, 엄홍길씨야말로 진정한 산사나이라고 하겠습니다. 머릿글인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오른다’에서 엄홍길씨가 그러한 휴먼정신으로 나아가게 된 동기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8,000미터의 산을 서른여덟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친절하게 자신을 설명하는 법이 없었기에 그를 찾아가는 길은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문은 끝이 없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문을 열면 또 다른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없이 문을 열었지만, 아직도 나는 문 앞에 여전히 서 있다.” 이는 허연 시인의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가와바타 야스나리》’ 책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속초 설악산책(雪嶽山冊) 도서관 입구에는 들어서자마자 눈에 확 띄는 곳에 책 표지를 앞으로 해서 세워둔 테이블이 있다. 이곳에 드나든 지 보름이 넘었지만, 책을 읽으러 온 것이 아니라서 그냥 무심히 지나치다가 오늘 불현듯 ‘가와바타 야스나리’ 책에 시선이 꽂혔다. 표지에 영어로 ‘KAWABATA YASUNRI’라고 쓰여 있는 바람에 활자의 의미를 새기지 않은 채 ‘웬 영어책을 진열했나?’ 싶었다. 보름 동안 이 책이 내 시야에서 ‘영어책’으로 여겨졌다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책 장을 넘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보지 못한 무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머리를 숙여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 목덜미에 삼나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의문당(疑問堂). 추사가 유배 시절 대정향교에 써 준 현판이다. 현판을 지그시 바라보면 학문하는 자는 매사에 의문을 가지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대학자의 엄하고도 따뜻한 격려가 느껴져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게 된다. 그러나 문득, 추사의 인생에 불어닥친 거센 풍파가 머리를 스친다. 이것은 과연, 권학문(勸學文)에 관한 것인가. 추사가 평생 고관대작으로 부귀를 누렸다면 그것이 가장 유력한 해석이겠다. 그러나 추사는 혹독한 유배 시절을 거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현판에는 훨씬 더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 《제주 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라는 이름의 책은 제주대 교육학과 양진건 교수가 유배문화를 연구하며 쓴 학술서 겸 교양서이다. ‘추사 인생 톺아보기’라 할 수 있는 이 한 권을 읽으면 그가 어찌하여 유배됐으며, 섬에서 보낸 8년 3개월의 시간은 어떠했으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지난한 세월을 견뎠는지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교육학 전공자인 저자에게 유배문화는 낯선 주제였지만, 유배문학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한국문화의 아름다움, 그것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써진다. 저자는 이런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그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안목을 지녔다. 또,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움을 더없이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필력도 갖췄다. 글쓴이 정목일은 이처럼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과 그것을 표현하는 필력을 두루 갖춘 서정수필의 대가다. 그는 197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한국의 아름다움을 곡진히 풀어내는 서정수필을 써왔다. 그래서 펴낸 책도 여럿이다. 《한국의 아름다움 77가지》, 《나의 한국미 산책》에 이어 이번 책 《맛 멋 흥 한국에 취하다》까지, 일상에서 만나는 한국문화의 아름다움을 특유의 섬세한 안목으로 꾸준히 포착해왔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한 송이, 도자기 한 점, 병풍 한 폭에 담긴 지극한 아름다움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1장 ‘한국 문화재의 미’, 2장 ‘한국의 생활미학’, 3장 ‘한국의 춤’, 4장 ‘한국의 꽃’, 5장 ‘한국 계절의 미학’, 6장 ‘달빛 서정’의 여섯 가지 주제로 한국미의 다양한 면모를 두루 보여준다. 1장 ‘한국 문화재의 미’에서는 달항아리, 백자와 홍매,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