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종대)은 2021년 《한국민속상징사전》(호랑이 편)에 이어 2022년 ‘토끼 편’을 펴냈다. 이 사전은 《한국민속대백과사전》사업의 하나로 2023년 계묘년 토끼해를 맞이해 ‘토끼띠 학술강연회’, ‘토끼띠 전시’와 연계하여 토끼의 문화적 상징성과 더불어 학술 값어치를 총망라한 민속상징 백과사전이다. 토끼의 생태부터 세시풍속ㆍ설화ㆍ노래ㆍ속담ㆍ유물에 관한 해설까지 풍성하게 수록하여 토끼의 상징성에 대해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토끼 인류의 번창으로 숲을 벌채하면서 토끼의 서식처로 초원이 형성되었고, 그에 따라 개체 수가 늘었다. 그래서 토끼는 5만 년 전부터 인류의 사냥감으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으며, 토끼털은 토시, 모자, 배자 등 방한용 의복 재료와 함께 고급 붓을 제작하는 데도 활용되었다. 1,600년 전 고구려 고분 벽화(덕화리 2호분), 통일신라시대 수막새, 고려시대 동경(銅鏡)에서도 토끼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창덕궁 대조전 굴뚝과 경복궁 교태전 뒤뜰의 석련지 등 건축물에도 토끼 형상이 새겨져 있다. 현대에서도 여러 대중매체에서 깜찍하고 꾀 많은 캐릭터로 주목받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스물한째 ‘대설(大雪)’입니다. 한해 가운데 눈이 가장 많이 온다고 하여 대설이지만, 원래 24절기의 기준점 중국 화북지방과 우리나라는 지역이 달라서 꼭 이때 눈이 많이 오지는 않습니다. 김광균 시인은 “설야(雪夜)”라는 시에서 눈이 오는 정경을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라고 읊조립니다. 김광균 시인은 한밤에 홀로 서서 ‘그리운 소식’처럼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눈은 보리의 이불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눈이 보리를 덮어줘야 추위로 인한 피해를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눈이 오지 않으면 기우제처럼 기설제(祈雪祭)를 지냈습니다. 숙종실록 11년(1685) 11월 13일 자 기록 “절후(節候)가 대설(大雪)이 지났는데도 한 점의 눈도 내리지 아니합니다. 중신(重臣)을 보내서 기설제(祈雪祭)를 종묘(宗廟)와 사직단(社稷壇) 그리고 북교(北郊)에서 행하기를 청합니다.”라고 임금에게 청하는 부분이 보입니다.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카트만두라는 작은 왕국에는 '할단새'라는 전설의 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나운 할단새[鳥]도 이 대설 무렵만은 눈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남사당놀이 6종목 가운데 5종목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판굿과 개인놀음이 일품이며 중부지방의 지역적 특색이 잘 나타나 있는 ‘풍물놀이’를 시작으로 ‘버나돌리기’와 땅재주 넘는 묘기의 ‘살판’, 가슴을 조이며 탄성을 지르게 되는 ‘줄타기’, 그리고 ‘덧뵈기’로 통하는 ‘탈춤’ 등을 소개하였다. 남사당패가 앞에서 말한 여러 종목을 완벽하게 준비하였다고 해서 마음대로 어느 마을이나 출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허가받고 마을의 큰 공터나 장터에 들어가 밤새워 놀이판을 벌일 수 있었는데, 그 연희 장소는 주로 장터나 마을 행사, 등에 초청되어 공연을 벌였던 것이다. 현재까지 남사당패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과 평택, 충남 당진과 대전시 대덕, 전남 강진과 구례, 경남 진주와 남해, 황해도의 송화와 은율 등지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대부분 물산이 집결되고, 유통되던 시장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어서 장소만 허락된다면 연희판의 성공은 큰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주에 소개할 마지막 종목 ‘인형극’ 또는 ‘꼭두각시놀음’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형극으로 남사당패 연희자들은 ‘덜미’라고 불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요괴의 나라'라고 할 만큼 일본에는 풍부한 '요괴'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요괴를 소개하는 전시회 <요괴대행진: 일본에서 온 신비한 요괴들> 전시가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2층 실크갤러리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린다. <요괴대행진: 일본에서 온 신비한 요괴들>전시에서는 에마키(絵巻, 두루마리 그림)와 니시키에(錦絵, 다양한 색으로 찍어낸 우키요에 판화의 일종)를 중심으로, 지금까지도 각종 완구나 영화 같은 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일본의 요괴 문화를 소개할 예정이라 관심있는 사람들이 갖는 기대가 크다. 동서고금 어느 문화를 보더라도, 설명되지 않는 신비한 현상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일본의 요괴 역시 그러한 초자연적인 힘을 보여주는 캐릭터 중 하나로, 각종 이야기 속에 등장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겁을 주기도 한다. 시대가 바뀌어, 새로운 과학과 기술이 사람들의 생활을 변화시키면서 요괴들도 점차 공포심을 덜어내고, 장난기 많은 친구 같은 존재로 바뀌어 왔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지금도 여름이 되면 괴담을 즐기는 문화가 이어지고 있고, TV나 극장에서 요괴들을 다루는경우도 많다. &l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왕실 문화의 보고, 외규장각 조선의 22대 왕 정조(正祖)는 1776년 25살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해에 규장각을 정식 국가기관으로 발족하였습니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의 왕실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발하여 출판과 정책 연구의 기능까지 발휘한 특별한 기구입니다. 이후 1782년에 강화도 행궁(行宮)에 외규장각을 완공하여 왕실의 중요한 자료들을 옮겨서 더욱더 체계적이며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하였습니다. 규장각에 보관하던 임금이 보던 어람용 의궤가 강화도로 옮겨진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이로써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어 이곳을 ‘규장외각(奎章外閣)’, 또는 ‘외규장각(外奎章閣)’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외규장각에는 어보(御寶, 국새), 교명(敎命, 왕비 또는 세자 등을 책봉하던 임금의 명령), 어책(御冊, 왕비를 책봉하거나, 임금과 왕비ㆍ대비ㆍ왕대비ㆍ대왕대비 등에게 존호나 시호 등을 올릴 때 그 내용을 새겨 첩으로 엮어 만든 것), 어필(御筆, 임금의 글씨), 의궤, 지도 등 왕실 관련 자료들이 집중적으로 보관되게 되었으며, 철종 연간에 파악된 외규장각 소장 도서는 약 6천 권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남사당패의 조직을 이야기하였다. 대표 격인 ‘꼭두쇠가 있고, 그 밑으로 ’곰뱅이쇠‘ㆍ’뜬쇠‘ㆍ’가열‘ㆍ’삐리‘가 있는데, 각각 엄격한 지위와 실력을 인정받는 용어들이란 이야기, 추운 겨울철은 자체적으로 실력을 기르고, 부족한 기술을 연마하는 준비의 시간이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남사당놀이 6종목을 간단하게 알아보도록 하겠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남사당놀이의 첫 번째 놀이는 <풍물놀이>이다. 여기서는 판굿과 다양한 개인놀음이 일품이다. 중부지방의 지역적 특색이 잘 나타나 있으며, 대체로 꽹과리, 징, 장고, 북, 소고, 무동, 호적, 기수, 잡색(雜色) 등이 참여한다. 어느 마을이나 사물(四物), 곧 꽹과리, 징, 장고, 북이 있고, 이것을 잘 치는 사람들이 있겠으나, 남사당놀이와 같은 놀이집단을 마을에 끌어들임으로써 동네의 남녀노소 모두가 한바탕 놀이판을 통해 화합하고 친목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마음의 화합을 이루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이른 봄부터 추수가 끝난 늦가을까지는 온 나라가 잔치마당이 되었다. 풍물놀이에 이어 남사당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붉은 옷 갈아입은 백제사 곱디고운 빛깔로 빨갛게 물들었네 천년고찰 연못에 드리운 붉은빛은 그 옛날 드나들던 백제왕족의 흔적인가 여운이런가! - 이고야 ‘백제사’- “(겨울 10월) 경신(庚申)에 조(詔)를 내려 교야군(交野郡)의 금년 조세를 면해 주었다. 국군사(國郡司) 및 행궁 측근의 나이 많은 사람과 여러 관청에서 (천황을) 모시고 따라간 사람들에게 보물을 하사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또한 백제왕 등 행재소(行在所)에서 (천황을) 모신 사람 한두 명에게 계급을 올려주고 작(爵)을 더하여 주었다.” 이는 《속일본기》 권37(서기 783년 10월 16일조)에 나오는 백제사(百濟寺, 햐쿠사이지)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서 말하는 백제사는 일본 시가현(滋賀縣)에 있는 천년고찰을 말한다. 백제사 누리집에는 이 절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당산(堂山)은 스이코왕(推古天皇) 14년(606)에 성덕태자의 발원으로 백제인을 위해 지은 절이다. 창건 당시의 본존불은 태자가 손수 만든 관음상이라고 전해지며 본당 (대웅전)은 백제국의 용운사를 본떠서 지었다. 개안법요 때는 고구려 스님 혜자를 비롯하여 백제스님 도흠(道欽)과 관륵스님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남사당놀이는 1964년, <인형극>이란 이름으로 국가무형문화재에 지정되었고, 1988년에는 6종목이 포함되어 <남사당놀이>로 재지정되었다. 2009년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에 올랐으나, 현재는 그 전승이 활발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이야기하였다. 다행스럽게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지운하, 남기문 등이 <인천 남사당놀이보존회>를 설립하였고, 특히 제26회 부평풍물축제에서 6종목 전 과정을 선보였는데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 대단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첫 번째 종목인 <풍물놀이>는 판굿, 그리고 다양한 개인놀음이 일품이다. 특히 남사당패 풍물놀이의 개인놀음은 각 악기의 연주력이 돋보이는 대목으로 지역적 특색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풍물을 구성하고 있는 면모를 보면 소리가 크고 강렬한 꽹과리(小金)를 비롯하여 징(大金), 장고(杖鼓), 북(鼓), 소고(小鼓), 무동(舞童), 호적(胡笛), 기수(旗手), 잡색(雜色) 등이 편성되는데, 그 바탕은 경기지방과 충청지방의 풍물놀이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이다. 참고로 남사당패의 조직은 어떠한가? 하는 점을 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장원급제 김명육이요~!” 장원급제(壯元及第)! 과거를 치르러 모여든 숱한 경쟁자를 제치고 1등의 영예를 차지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1797년(정조 21) 음력 12월 5일, 제주에서 귤이 올라온 것을 기념하여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에서 치러진 감제시(柑製試)의 장원은 유학(幼學, 벼슬하지 않은 선비) 김명육(金命堉)으로 정해졌습니다. 아마 김명육, 그의 입꼬리는 기쁨으로 치솟다 못해 찢어지지나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김명육의 인생은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를 급제시킨 독권관(讀券官) 이병모(李秉模, 1742~1806)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에게 다음과 같은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를 올렸던 것입니다. “신(臣)이 김명육의 시권(試券, 시험지)을 자세히 보니 운율이 어긋나고 대구가 맞지 아니하여 일정한 격식에 크게 어긋날 뿐만 아니라, 글자체가 기울고 비뚤어져서 글씨가 괴이함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신은 정신이 모두 나가서 혼동한 나머지 우등으로 매겼습니다. 지금 문체를 바로잡고 필법을 바르게 하는 때를 당하여 이러한 시권은 결코 유생들에게 반시(頒示, 반포하여 보이는 일)할 수 없으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불교인권위원회가 올해 <제28회 불교인권상>에 선감학원 국가폭력사건 진상규명 활동가인 ‘이하라 히로미츠(井原 宏光)’씨를 뽑았다고 지난 11월 7일 밝혔다. 올해 87살인 이하라 히로미츠 씨를 불교인권상의 주인공으로 뽑은 불교인권위원회(공동대표 진관) 심사위원회(위원장 명안 스님)는 뽑은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하라 히로미츠 씨는 1980년, 선감도를 방문했다가 그때까지 일제강점기와 똑같은 목적과 방법으로 선감학원이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라며 “이에 자신이 목격한 선감학원에서의 인권 유린을 고발하는 자전적 소설 《아! 선감도》를 1991년 펴내고 일본 전역에서 강연을 통한 증언활동을 했다”라고 밝혔다. 선감학원은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 지시에 의해 당시 경기도 부천군 대부면의 선감도(현재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 세워 1942년 4월, 처음으로 200명의 소년이 수용되었고, 이후 대한민국 제5공화국 초기인 1982년까지 40년 동안 운영되었다. 원아대장에 따르면 수용인원이 많을 때는 4,691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선감학원은 빈민과 부랑아를 격리 수용하여 가난을 감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