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일본의 역사 중심이었던 교토나 도쿄에서 한참 떨어진, 거의 일본의 서쪽 끝자락에 있는 한 미술관이 일본 으뜸 정원이라는 평가를 20년째 받아오고 있는 것을 아는 분들이 많지는 않겠는데, 필자는 이 미술관을 두 번이나 방문하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지난 6월 중순 10년 만에 다시 방문한 이 ‘아다치미술관’이란 곳, 관람객들과 함께 복도를 따라가며 멋진 정원을 내다보던 중에 한 건물 입구 벽에 낯익은 사인이 눈에 들어오기에 가까이 가서 보니 ‘魯山人’이라는 한자 사인이었다.‘ 그것은 일본 근대의 유명한 도예가인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 魯山人, 1883~1959)의 탄생 140돌을 맞아 마련한 특별전시실 입구였다. 마침 폐막 열흘 전이었다. 운 좋게 전시장을 발견하고 전시된 도자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동백꽃사발(椿碗)도 있었다. 10년 전에는 이런 시설이 없었는데, 3년 전에 새로 전시실을 마련하고 해마다 그의 작품과 유물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 魯山人, 1883~1959)은 근대 일본의 전설적인 예인(藝人)이다. 도예가인 동시에 서예가, 전각가이며 무엇보다도 음식의 격조를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일본은 정원의 나라다. 일본에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모두 1,000여 곳의 정원이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어디일까? 일본연구가 황현탁에 따르면 전통적으로는 가나자와시의 겐로쿠엔(金沢市の兼六園), 오카야마시의 고라쿠엔(岡山市の後楽園), 미토시의 가이라쿠엔(水戸市の偕楽園)을 꼽는다. 이 세 정원을 이름난 정원(名園)으로 꼽는 까닭은 눈, 달, 꽃(雪月花)이 각각 유명하기 때문으로 겐로쿠엔은 눈, 고라쿠엔은 달빛, 가이라쿠엔은 꽃이 유명하다. 이 세 정원은 모두 인공 연못이나 개울을 조성하고, 다리, 섬, 산을 만들거나 돌이나 바위를 옮겨 산책로를 조성하여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 정원으로 일본 각지의 영주들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미국일본정원학회라는 데서 1999년에 창간해 전 세계에 배포하고 있는 《SUKIYA LIVING MAGAZINE》라는 격월간지는 세계 정원의 순위를 매기면서 2003년부터 20년 넘게 오직 이곳을 1위로 꼽고 있는데, 바로 시마네현 야스기시(安來市)에 있는 아다치미술관(足立美術館)이다. 이 학회는 해마다 일본 내 정원을 규모나 지명도와 관계없이 전 세계 전문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꼼장어와 멸치회, 장어구이 등으로 유명한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의 죽성리라는 곳에 가면 일본식 성(城)의 흔적이 남아있다. 죽성리 왜성이라 불리는 이 성은 마을 해안가 가까이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조선ㆍ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남해안에 장기간 머물기 위해 돌로 쌓은, 둘레 약 960m, 성벽 높이는 약 4m의 성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조 중종 때 왜구의 방어를 위해 두모포진(豆毛浦鎭)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던 곳인데 왜군들은 이곳에서 두모포 진성 밖 더 너른 쪽에 왜성을 쌓고 그 옆 포구를 통해 조선 각지에서 잡아 온 도공들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 언덕받이에는 현재 소름요라는 도자기 가마가 있거니와 그 아래쪽에 무명도공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 속에 끌려간 도공들을 추념하기 위함이다. 납치된 도공들은 죽성리 포구에서부터 규슈 일대로 많이 실려 갔지만, 상당수는 바다 맞은 편에 있는 하기(萩)라는 곳으로 갔다. 당시 이곳의 영주인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돈독한 신임을 받아 8개 번(藩)을 이끄는 대장이 되기도 했고, 임진왜란 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불볕더위 속에 기다린 가을바람이 살랑 불고 매미가 떠난 푸른 숲에서 귀뚜라미 세레나데 울리면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옵니다. 지붕에 뜬 하얀 달덩이 대청마루에 늘린 빨간 고추 알밤송이 툭툭 떨어진 숲속에 다람쥐가 쪼르르 나무를 타면 가을만찬이 분주합니다. ... 박소정, <가을은 당신의 선물입니다> 가운데서 "가을이구나. 드디어 아들 며느리도 손주들과 함께 모이는구나. 그동안 부쩍 큰 손주들, 이미 가슴을 넘긴 키를 몸으로 대어보고 칭찬을 해주자. 애들도 입맛이 살아나 잘들 먹겠구나. 그 애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더라?" 지난달 한가위를 앞두고 우리 부부는 고민을 한참을 했다. 애들이 와서 하루건 이틀이건 자고 갈 것인데, 한가위 날 아침을 잘 먹고 나서 애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그네들이 못 보는 것은, 집 주위 산책길에 있는 밤나무에서 알밤을 주워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미 알밤이 거의 다 떨어지고 땅에 떨어진 밤송이들도 짙은 갈색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애들에게 알밤이 들어있는 밤송이를 보여주고 그것을 발라보는 체험을 하게 해주면 좋을 텐데...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서울 은평구 진관동, 내가 사는 동네다. 요즘은 도로이름을 주소로 쓰지만 행정구역 이름으로 진관동이 엄연히 살아있다. 진관동이란 이름은 북한산 자락에 있는 진관사라는 오래된 절 이름에서 비롯됐다. 진관사는 원래 이름이 없는 작은 암자였으나 고려 왕조 초기 천추태후에 의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현종이 이 절에 숨어들어 진관스님의 보호로 목숨을 건진 뒤에 임금이 되고 나서 진관스님을 위해 절을 키우고 절 이름도 스님의 법호를 그대로 쓰도록 해 큰 절이 되었다. 진관사는 수륙재를 올리는 절이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개국한 뒤에 그 과정에서 숨진 많은 영혼을 천도해 주려고 집권 4년째인 1395년 수륙재(水陸齋)를 처음 지내고는 이곳에 수륙사(水陸社)라는 사당을 개설해 왕실 주관으로 수륙재를 봉행하도록 해 그것이 성종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고는 잊히다가 1970년대에 진관이란 동명의 스님에 의해 수륙재만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돼 2013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해마다 가을에 진관사에서는 수륙재가 거행된다. 이 의식을 올리는 목적은 죽은 뒤에 윤회의 업보를 받아 물과 땅에 떠돌아다니는 영혼들을 불보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올 한가위야말로 우리들이 몇 년 동안 기다리던 명절 아니었던가? 지난 6월부터 코로나에 대한 위기경보가 하향 조정되어 이 명절에는 코로나19 같은 호흡기 질환 걱정 없이 고향을 오가고 부모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되었기에 말이다. 3년 만에 제대로 한가위를 맞이하는 것이다. 더구나 일요일에서 개천절로 이어지는 10월 2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됨으로써 올해 한가위는 내려갈 때는 바쁘고 막히겠지만 고향에서 돌아올 때는 여유를 가질 수 있으니, 다행이다. 다만 연휴가 이어지면서 고향 대신에 나라 밖으로 여행을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아쉬움이지만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 많은 것을 보면 좋게 생각해 줄 여지가 없지는 않겠다.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은 달빛을 보는 순간 고단한 인생, 고향을 떠나 살 수밖에 없는 우리 나그네의 심사를 압축해서 쓸어 담았다. 床前明月光 침상 앞 달빛 어찌 그리 밝은지 疑是地上霜 서리가 내린 줄 알았잖아 擧頭望明月 고개 들어 밝은 달 보다 보니 低頭思故鄕 고향 생각에 고개 절로 내려가네. 우리가 보름달이 좋은 것은 그 속에 고향이 있기 때문이리라. 고향은 곧 부모님이고 부모님은 곧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내가 사는 동네는 아파트 단지로서 도로명 주소로는 연서로 44길에 얼마... 이렇게 되어 있는데 속칭은 폭포동이고, 이 근처에 오면 안내판에도 폭포동이라고 써 있다. 그것은 단지 동쪽에 있는 북한산의 산 중턱에 바위틈으로 파인 물길을 따라 비가 많이 오면 빗물이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내려 아파트 단지 안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폭포가 흐르는 골짜기, 곧 폭포동이 되는 것이다. 이곳은 북한산 북서쪽의 등산로나 산책로, 둘레길 등이 단지를 둘러싸고 있고, 여기에 세워진 아파트 건물도 동간 거리를 충분히 두고 있어 주거환경으로서는 쾌적하다. 필자도 3년 반 전 이곳에 이사와 이런 환경에 만족하며 은퇴 후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주 이곳 주민들이 구청 앞에 몰려가서 시위를 했다. 주민 250여 명이 참여해 은평구청 입구에서 시위했는데 시위의 구호는 불광중~폭포동 사이에 도로개설 계획을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이 도로가 도로개설에 따른 실이익은 없이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 환경을 크게 해친다는 이유에서다. 구청은 우리 단지에서부터 뒷길로 불광중학교로 이어지도록 폭 12미터, 길이 400미터의 도로를 새로 개설해 이 일대의 교통 흐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 ‘별 헤는 밤’, 윤동주 시인 윤동주가 밤하늘의 별을 세던 때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인 1941년 11월 5일이었다. 이때는 날이 제법 차가워졌기에 시인은 밤하늘 별을 다 세지 못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것인데 그보다 3년 전인 1938년 9월 초, 아직 여름 기운이 남아있어서인지 윤동주는 잔디밭 위에서 작은 생물과 대화를 한다; 귀뚜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귀뚜라미와 나와 달 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귀뚜라미와 나와’. 윤동주 시인 윤동주가 듣고 이야기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바로 얼마 전 여름의 전령사라는 매미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어느새 가을의 전령사인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구나. 계절이 가을로 줄달음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어느 시인은 귀뚜라미가 사람 냄새를 그리워하여 저리도 간절하게 운다고 하는데, 귀뚜라미만 그럴 것인가? 우리도 가을이 되면 사람이 그리운 것은 매한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옛날 중국의 전국시대에 사광(師曠)이란 금(琴, 현악기의 하나)의 명인이 있었다. 그가 임금의 명을 받아 금을 타기 시작하니 검은 학(鶴)들이 궁문의 기둥에 모이기 시작하더니 8쌍을 이뤘다. 다시 연주하니 학들이 좌우로 8마리씩 늘어섰다. 3번째 연주하니 학들이 울어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예기(禮記)》 〈악기(樂記)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음악의 힘이 학(鶴)을 불러 모으고 춤을 추게 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일화로 자주 인용되거니와 이런 이야기는 먼 옛날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지난주 서울의 어느 가정집 방안, 거기에 첼로를 안은 여성 주자가 연주를 시작하자 곧 어디선가 백조가 날아들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 음악을 듣는다. 사실 이때 연주가는 프랑스의 작곡가 생상스(1835~1921)의 '백조(白鳥)'를 연주한 것이지만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실제로 백조가 눈앞에서 유영하는 듯한 착각에 잠시 빠져 있었다. 중국에서 금을 연주했다면 이날 연주한 첼로도 중국에서는 대제금(大提琴)이라고 하니 금이라 할 수 있고, 그러니 그야말로 '금주학래(琴奏鶴來)', 곧 금을 연주하자 학이 날아왔다는 옛 고사성어 그대로다 그동안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 5백만 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작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꿈속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북쪽으로 부리를 벼리러 스비스조드로 날아갈 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여자가 잠든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 .... 이순원, 《은비령》 1996년 발표되어 절찬을 받은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은 맨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2천 5백만 년 뒤에 다시 돌아온다는 혜성에 실어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우주라는 영원의 시간에 봉인해놓았다. 18년 전 소설의 무대가 된 은비령을 처음 밟고서 그 느낌을 압축한 글을 쓰면서 나는 그들의 별 대신에 내 마음의 별을 밤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는 시리우스란 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