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안거락업’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업을 즐기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안거락업 : 본도 백성이 다시 들어가서 살게 하지 않는다는 교서를 받들고 이곳에 내려와 펴서 읽어 주면, 사람마다 모르던 것을 갑자기 깨달아서 안거락업(安居樂業)할 것이며, 떠돌아다니는 사람도 모두 고향 마을에 돌아오게 되어 떠돌아다니는 것이 당연히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어리석은 신의 계책입니다. (⟪세종실록⟫ 25/10/24) 함길도 도관찰사 정갑손(鄭甲孫)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지만 여기서는 ㉮모르던 것을 알게 되어 안심하고 ㉯이 땅에 돌아와 업에 기쁘게 종사하고 ㉰안거락업할 것이라는 계획이다. 목표는 모두가 안정되어 업에 종사하여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이는 비록 신하가 올리는 말이지만 당시 세종대 정치의 목표이기도 한 락생(樂生)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직(職)과 업(業)이 등장한다. ‘직’은 맡은 바 일[직무]이고 ‘업’은 일에 임하는 정신적 자세다. 생업은 살아가며 중히 여겨야 하는 일에 임하는 정신이고 천직은 일을 하늘이 준 일이라 중히 여기는 일이다. 업과 생업 : (허조에게 명하여 도도웅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김연수 명창을 간단하게 소개하였다. 1907년 전남 고흥 출신이며 한학(漢學)과 신교육을 받았고, 유성준, 정정렬 송만갑 등에게 판소리를 배워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여성국극단> 단장, 판소리 예능보유자, <국립창극단> 단장을 지내며 판소리 확산에 전력하였다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짠 판소리를 <동초제(東招制)>로 부르고 있는데, 이 소리는 서편제와 동편제가 융합되어 있다는 특징과 함께 사설의 전달이나 맺음, 끊음이 분명하며 너름새(동작)가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동초제 판소리>, 또는 <동초 김연수제>와 같이 명창의 이름을 밝히고 그 뒤에 붙어 다니는 제(制)란 무슨 뜻인가? 하는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악보로 전해오지 아니하고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해오는 판소리와 같은 성악 분야의 이름난 소리꾼들을 우리는 명창(名唱)이라 부르며 가야금 산조나 거문고 산조와 같은 민속기악의 이름난 연주자들을 명인(名人)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들 명인이나 명창의 이름 뒤에, 또는 아호를 넣어 동초제, 김연수제, 박상근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배고픔이라는 것을 몰랐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의식주에 곤란을 겪지 않는 집에서 자랐다는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니라 ‘배고픔’ 이라고 하는 감각이란 무엇인가하는 궁금증에서 하는 말이다. 조금 이상한 말투지만 나는 배가 고파도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초, 중학교 다닐 때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 식구들이 달라붙어서 카스테라도 있고 빵도 있어.. 하고 떠들어댔기 때문에 나는 학습된 정신을 발휘해서 ‘배가 고프다’라고 중얼거리며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식사 시간이었다. 내 시골집에서는 열 명 정도의 식구가 각자 밥상을 받아 들고 두 줄로 마주보며 밥을 먹었다. 나는 막내라 가장 아랫자리에 앉아서 먹었지만 밥 먹는 방은 어둑어둑했고 그저 식구들이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밥을 먹는 모습에 나는 항상 썰렁한 생각을 하곤 했다.” 이는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 문학의 결정판이라는 《인간실격(人間失格)》에 나오는 글이다. 지금도 시골로 여길 만큼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아오모리, 그곳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난 다자이 오사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술, 담배, 매춘, 좌익사상 등에 빠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인간이 태어나 갖게 되는 역사의식의 형성에는, 여러 요소가 작용하겠지만 특히 중고등학교의 역사교육이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교육은 교과서라는 도구가 크게 작용한다. 어떠한 의도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할 것인가? 이에 대해 많은 교사들은 고민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교과서 속에 비친 조선의 모습은 어떠한가? 아니 다른 말로 일본 교과서에 쓰인 조선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이러한 의구심에서 출발한 책이 《교과서에 쓰인 조선(教科書に書かれた朝鮮)》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제목이 《교과서에 쓰인 조선》이지만 ‘일본 교과서에 쓰인 조선’ 이라는 제목이었으면 더욱 좋았을 법하다. 책을 쓴 사람들은 김달수(金達壽,1919-1997), 강재언(姜在彦, 1926-2017), 이진희(李進熙, 1929-2012), 강덕상(姜德相, 1932-2021) 교수 등 4명의 역사학자들이다. “《교과서에 쓰인 조선》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일본) 교과서 서술에 대해서, 계통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책이다. 원래대로라면 이러한 작업은 일본 역사가의 손으로 쓰여져야 할 성질의 것이지만, 우리가 굳이 이 문제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송원조 고수(鼓手)의 보비위(補脾胃)정신, 곧 소리꾼의 비위를 잘 맞추어 주는 고수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다양한 양념이 들어 있지 않음에도 또 다른 맛의 묘미를 전해주는 경우와 비슷하다는 이야기, 그는 거의 원 박을 반복하다시피 치면서도 강과 약을 분명하게 조절해 주기 때문에 단순, 명료하면서도 다양한 표현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래서일 것이다. 송원조를 성공한 고수라고 평가하는 배경이라든가, 또는 송원조 자신이 지금까지도 절실하게 후진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말은 다름 아닌, 소리판의 성공적 비결은 첫째도 둘째도 ‘소리꾼의 기량’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가 주장하는 으뜸 명고수도 소리꾼으로 하여금 그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과 자세가 고법(鼓法)의 기본 정신이 되는 것이다. 서울시 고법의 예능보유자, 송원조의 고법에서 느낄 수 있는 단순함이라든가, 명료함, 또는 겸손함과 같은 덕목들은 바로 송원조 자신의 인격이어서 자신만의 특징을 여지없이 들어내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분야의 관계 전문가들은 그가 구사하는 단순한 가락들은 강약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오는 7월 3일부터 새로운 지폐 발행으로 술렁거리고 있다. 이번에 바뀌는 지폐는 1만엔권, 5000엔권, 1000엔권의 3종류다. 20년만에 지폐를 바꾸는 이유는 ‘위조 방지’에 있다고 한다. 일본은행 마츠모토지점 발권과장 하야카와 도모히로 씨는 “그동안 복사기라든가 인쇄기술이 크게 발전하고 있어 당장 위조권이 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장기적으로 볼 때 위조 저항력이 크기 때문에 지폐 교체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새로운 위조 방지 기술 중 하나가 3D 홀로그램이다. 이는 각도를 바꾸면 초상의 얼굴 방향도 바뀌는 구조로, 3D 홀로그램을 지폐에 채택한 것은 세계 최초라한다. 또한 지폐 중앙의 얼굴 초상 주위에도 고선명도의 워터마크를 넣어 위조가 어렵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지폐가 변경될 때마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 일본 지폐 제조를 담당하고 있는 국립인쇄소는, 초상화를 포함한 지폐의 디자인은 재무성, 일본은행, 국립인쇄소 3자가 협의해서 최종적으로 재무장관이 결정한다고 한다. 인물 선정에 있어서 구체적인 규정은 없지만 다음 세가지를 중점적으로 본다고 한다. 1.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인물 2. 교과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가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간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과제가 정해지면 좋은 해답이 나올 때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요즘 정치에서 ‘국민은 언제나 옳다’라는 말을 듣는다. 세종은 신하들의 관점과 달리 백성 편에서 생각해 보려고 애쓴 흔적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에 ‘열민지사(悅民之事)’에 대해서 두 개의 뒷이야기가 있다. 백성이 원망하는 것과 백성을 기쁘게 할 일을 진술하라 세종 25년에 비가 오지 않자 비를 오게 하려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신하와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나이 든 자에게 영직(직함만 있고 일이 없는 허직)을 제수하고 환상(還上, 고을의 사창에서 봄에 백성에게 빌려주었던 곡식을 가을에 받아들이던 일)을 면제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게 된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고려 때에는 원단제(圓壇祭)를 지냈었는데, 우리 태종(太宗)께서 참례(僭禮, 분수에 맞지 않는 지나친 예의)의 일은 다 혁파하셨다. 원단제를 혁파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45년 8월, 종전(終戰) 이래 중국 하얼빈의 731부대를 찾아가보지 않았던 시미즈 씨가 93살의 노구로 이곳을 찾으려는 까닭에 대해 “오랜 세월 이곳을 가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전쟁의 무서움을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라고 말했다. 14살의 어린 나이로 세균을 전쟁 무기로 쓰기 위해 생체실험을 일삼던 악명높은 일본 관동군의 731부대에서 일했던 시미즈 히데오(清水英男) 씨는 올해 93살이다. 이곳 구 관동군방역급수부(旧 関東軍防疫給水部)에서 일했던 시미즈 씨는 오는 8월 12~16일, 노구를 이끌고 이곳을 방문할 예정이다. 나가노현 이다시(長野県飯田市)의 미나미신슈 신문(南信州新聞) 6월 14일 치에 따르면, 시미즈 히데오 씨와 함께 하얼빈 731부대를 방문할 사람을 모집 중이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1945년 4월, 14살이었던 시미즈 씨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하얼빈 교외에 있던 731부대의 본거지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종전 뒤 귀국할 때까지 약 4달 동안 인체를 해부한 표본을 관리하거나 ‘마루타’라고 불리던 포로의 감옥을 폭파하기 위한 폭탄 운반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상관으로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송원조 고수(鼓手)는 10대에 <이리국악원>에 들어와 판소리와 북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국악원의 총무가 될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란 점, 그의 기억에 남는 특이한 경험은 당시, 소리선생으로 활동하던 김연수 명창이 동초제 판소리를 새로 짤 때, 밤새도록 북을 쳐 주면서 도왔다고 이야기하였다. 한때, 북을 접고, 딴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되돌아왔다고 이야기하였다. 얼마 전, 그에게 배운 제자들이 발표회를 할 때였다. 그는 명고수의 요건으로 첫째가 북을 잡고 앉아 있는 자세가 당당하여 소리꾼에게 믿음을 주어야 하고, 북가락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해야 하며 추임새를 적재적소에 넣을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다. “고수의 북가락은 적재적소에 써야 한다. 그럼에도 필요 이상의 많은 가락을 써서 복잡하거나 시끄럽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도 있다. 이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가락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북가락이 많이 들어가도 좋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최동현은 송원조의 북가락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송원조의 북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흙을 빚어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원리로 토기를 만들고 자기 몸을 꾸미는 장신구나 예술품을 다양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석기시대 예술품은 사람의 얼굴이나 여성의 몸, 동물 등을 본떠 사실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미적 감각의 표현을 넘어 집단의 신앙ㆍ의례와 관련되거나 소속, 사회적 신분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 크기가 아주 작아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몸에 지니던 혼신용으로 지니던 부적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배를 닮은 토제품의 발견 국립중앙박물관 신석기실에서 ‘장식과 예술’을 소개하는 진열장을 보면, 오목하게 만들어진 토기 세 조각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이름을 보지 않고서는 무엇을 본뜬 것인지 맞히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시품의 이름은 ‘배 모양 토제품’입니다. 1969년 부산 동삼동 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부산 동삼동 유적은 서울 암사동 유적과 더불어 신석기인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살아온 곳으로, 한반도 신석기시대 문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동삼동 유적은 조개무지 유적입니다. 조개무지는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들이 쌓여서 이루어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