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보물 제636호 “도기서수형명기(陶器瑞獸形明器)”가 있습니다. 여기서 서수형 명기란 서수(瑞獸) 곧 기린 따위의 상서로운 짐승 모양을 한 그릇으로 장사 지낼 때 죽은 사람과 함께 껴묻거리(부장품)로 묻었습니다. 이 “도기서수형명기(陶器瑞獸形明器)”는 경주 미추왕릉 앞에 있는 무덤들 가운데 C지구 제3호 무덤에서 출토된, 거북 모양의 몸을 하고 있는 높이 15.1㎝, 길이 17.5㎝, 밑지름 5.5㎝의 토기지요. 머리와 꼬리는 용 모양이고, 토기의 받침대 부분은 나팔형인데, 네모꼴로 구멍을 뚫어 놓았습니다. 등뼈에는 2개의 뾰족한 뿔이 달려 있고, 몸체 부분에는 앞뒤에 하나씩, 좌우에 2개씩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지요. 머리는 S자형으로 높이 들고 있고 목덜미에는 등에서와 같은 뿔이 5개나 붙어 있습니다. 눈은 크게 뜨고 아래ㆍ위 입술이 밖으로 말려 있고, 혀를 길게 내밀고 있으며, 꼬리는 물결모양으로 꾸불꾸불하지만 끝을 향해 거의 수평으로 뻗었는데, 여기에도 뿔이 붙어 있지요. 가슴에는 물을 따르는 주둥이가 길게 붙어 있고, 엉덩이에는 밥그릇 모양의 사발이 붙어 있습니다. 그릇 겉은 진한 흑회색을 띠었고, 받침ㆍ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는 제80돌 ‘순국선열의날’이었습니다. ‘순국선열의날’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위대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찬탈당한 날인 11월 17일을 기억하기 위해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날을 기념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모두 국가지정 독립운동가임은 같습니다. 그러나 국권침탈 앞뒤로부터 1945년 8월 14일 곧 광복절 전까지 일제에 항거하다가 목숨을 바친 분을 선국선열이라고 하는 반면 항일투쟁을 했지만 살아서 광복을 맞이한 분은 애국지사라고 합니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는 순국선열이지만 김구 선생은 애국지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흔히 순국열사를 생각할 때 3.1만세운동 이후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항일투쟁을 3.1만세운동 이후만 한 것은 아닙니다. 더 멀리 1895년 명성황후참살사건(을미사변)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아니 그 한 해 전인 1984년 동학혁명이 먼저 일본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지요. 따라서 동학혁명 이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895년(고종 32) 오늘(11월 15일) 김홍집내각은 성년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단발령(斷髮令)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시해되어 반일의식이 한층 높아진 상태에서의 단발령은 백성 사이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습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라”라는 말은 공자(孔子)가 제자인 증자(曾子)에게 해 준 말로 “너의 몸과 터럭(털), 그리고 살갗은 모두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시키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니라.”라는 윤리의식이 뿌리 깊었던 유생들에게는 목숨을 내놓으라 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지요. 고종과 태자가 압력에 못 이겨 상투를 자른 뒤 학부대신 이도재(李道宰)는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상소하고는 대신직을 사임하였고, 정계에서 은퇴한 원로 특진관 김병시(金炳始)도 단발령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하였습니다. 한편, 유길준이 당대 유림의 으뜸 인물 최익현 선생을 잡아와 상투를 자르려 하자, 그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단발을 단호히 거부하였지요. 또 미처 피하지 못해 강제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조상들은 하늘과 땅, 산과 바다, 나무와 바위 그리고 미물(微物, 벌레 따위의 하찮은 동물)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눈길과 손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신(神)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식구들이 살아가는 공간인 집도 예외는 아니지요. 집의 중추인 상량에 성주신(城主神), 안방에 아이를 점지하여 주는 삼신, 부엌에는 조왕신(竈王神), 마당에는 터주신, 뒷간에는 측신(廁神), 뒤꼍 장독대에는 천룡신(天龍神), 문간에는 문간신, 우물에는 용왕신, 광에는 업신 등 집의 곳곳에 신이 있어서 가족의 안녕을 지켜주고 복을 내려준다고 믿었습니다. 집지킴이 신들 가운데 단연 으뜸은 바로 성주신입니다. 성조(成造) 곧 마룻대에 산다고 해서 상량(上樑)이라고도 하는데, 가신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신이지요. 성주신은 집안의 모든 운수를 관장하며, 그 집안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 곧 대주(大主)를 상징하고 그 수명과 운수까지를 맡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을 지을 때도 기둥 위에 보를 얹고 지붕틀을 꾸민 다음 마룻대(상량)를 놓을 때는 상량고사를 성대하게 올려야만 합니다. 이때 제물로는 흔히 돼지머리와 쌀 한 바가지쯤 떠놓으며, 무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무로 된 가구를 오랫동안 쓸 수 있도록 고정시켜주고, 문판을 몸체에 잇대어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하려면 각 모서리와 여닫이문 손잡이에 쇠붙이로 덧대야 했습니다. 그래서 경첩, 들쇠(서랍이나 문짝에 다는 반달 모양의 손잡이), 고리, 귀장식(가구의 모서리에 대는 쇠붙이 장식), 자물쇠 같은 것들을 만들어 붙였지요. 이런 것들을 통틀어 장식(裝飾)이라고 부르는데 보기 흉한 못자국을 가려주고 옷장의 품위를 지켜주지요. 이 가운데 경첩은 여닫이문을 달 때 한쪽은 문틀에, 다른 한쪽은 문짝에 고정하여 문짝이나 창문을 다는 데 쓰는 철물을 이릅니다. 잘 깨지지 않도록 대개 구리에 주석과 아연을 섞어 만들었는데 쓰임새와 가구 종류에 따라 모양이 매우 다채롭습니다. 좌우대칭의 금속판이 전면에 드러나며 장식성을 더한 것을 ‘노출경첩’이라 하고, 금속판을 안쪽에 붙여서 전면에서는 一자형의 단순한 기둥만 보이도록 하여 실용성을 살린 것은 ‘숨은경첩’이라고 합니다. 경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드러날 때는 섬세한 무늬가 바라다보기만 해도 신기하고 아름답습니다. 경첩 이름은 모양새에 따라 동그레경첩, 이중병풍경첩, 제비추리경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척(鄭陟)ㆍ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 등이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바쳤다. 이보다 앞서 정척과 양성지 등에게 명하여 의정부(議政府)에 모여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상고하여 확정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던 것이다.”이는 《세조실록》 31권, 세조 9년(1463년) 11월 12일 기록으로 세조 9년 오늘 동국지도가 완성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동국지도는 단종 1년(1453) 수양대군이 조선전도, 팔도도, 각 주현도(州縣圖)를 만들라는 명령을 하자 하삼도, 곧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산과 강 등의 지세를 조사하였고, 1463년에 다시 각 도(道) 수령(守令)에게 그 지방의 위치, 산맥의 방향, 도로의 이수(里數), 인접된 군(郡)과의 접경(接境) 따위를 자세히 그리게 하여 만든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지도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동국지도는 '기리고거'라는 거리 측량기구를 썼고 천문 고도관측으로 한반도의 남북길이, 동서길이를 알아냈으며 삼각측량법을 썼죠. 따라서 동국지도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과학적 지도이며, 실측지도인 셈입니다. 다만 이 지도 원본은 일본 도쿄 내각문고에 있어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71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금관이 나올 것이란 말에 신라 무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무덤인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 조사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이렇게 큰 무덤을 발굴한 경험이 없었던 고고학자들은 98호분과 약 130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는 155호분을 시험적으로 먼저 발굴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시험대상의 발굴 무덤에서 찬란한 신라금관은 물론 금제의 호화로운 허리띠와 천마도 등 무려 11,526점에 달하는 엄청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금관은 출토된 다음날 청와대로 옮겼을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이 흥분했다고 합니다. 유물이 발굴되면 보존처리를 먼저 해야 함에도 대통령이란 직책을 이용해 가져오라고 한 것이라 관심만 있지 지식은 없는 행위였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발굴단을 비롯하여 학자들의 관심은 금관보다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天馬圖, 뒤에 국보 제207호로 지정)”에 있었습니다. 천마도는, 하늘로 화려하게 날아오르는 백마처럼 보이는 말 그림입니다. 말다래는 말의 발굽에서 튀는 흙을 막기 위해 안장 밑으로 늘어뜨리는 판이지요. 신라의 예술혼이 즈믄해(천년)의 긴 세월 동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찬 서리 /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 시인은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에서 이즈음의 정경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로 추운 겨울이 다가왔다는 손짓이지요. 오늘은 24절기의 열아홉째 ‘입동(立冬)’, 무서리 내리고 마당가의 감나무 끝엔 까치밥 몇 개만 남아 호올로 외로운 때입니다. 이 날부터 '겨울(冬)에 들어선다(立)'라는 뜻에서 입동이라 부르는데 이때쯤이면 가을걷이도 끝나 바쁜 일손을 털고 한숨 돌리는 시기이며, 겨울 채비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입동 앞뒤로 가장 큰일은 역시 김장이지요. 겨울준비로 이보다 큰일은 없는데 이 때를 놓치면 김치의 상큼한 맛이 줄어듭니다. 큰집 김장은 몇 백 포기씩 담는 것이 예사여서 친척이나 이웃이 함께했습니다. 우물가나 냇가에서 부녀자들이 무, 배추 씻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지요. 이것도 우리 겨레가 자랑하는 더불어 살기의 예일 것입니다. 김장과 함께 메주를 쑤는 것도 큰일 가운데 하나지요. 제주도에서는 입동날씨점을 보는데 입동에 날씨가 따뜻하지 않으면 그해 바람이 독하다고 합니다. 또 이때 온 나라는 음력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삼성리움미술관에는 보물 제1393호 <추성부도(秋聲賦圖)>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추성부(秋聲賦)”란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 구양수(歐陽修)가 지은 글로, 조선 후기의 화가 김홍도가 이를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그림 왼쪽에는 “추성부” 전체의 글이 김홍도의 글씨로 쓰여 있지요. 글의 끝부분에 ‘乙丑年冬至後三日 丹邱寫(을축년동지후삼일 단구사)’라 쓰여 있어 이 그림이 1805년 곧 단원이 죽기 한해 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추성부도〉는 가을 소리를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에는 달창을 사이로 두고 밖에 서 있는 동자가 팔을 펼쳐 안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뭔가를 얘기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도 이 남자가 책을 읽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렸던가 봅니다. 처음에는 빗소리가 나다가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폭풍우가 쏟아지는 듯 하다가 쇠붙이들이 한꺼번에 울리는 소리가 나자 동자를 불러 나가보라고 했나봅니다. 돌아온 동자는 “별과 달이 밝고 하늘에는 은하수가 걸려 있어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소리들은 나무숲에서 나고 있어요.”라고 합니다. 그렇게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저 가을의 소리일 뿐이지요. 집 주변 나무에는 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의 전통예술 가운데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이며,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오른 판소리가 있습니다. 소리꾼이 고수 장단에 맞추어 창ㆍ아니리ㆍ발림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 음악이지요. 본래 열두 마당이었으나 지금은 <춘향가>ㆍ<심청가>ㆍ<수궁가>ㆍ<적벽가>ㆍ<흥보가> 다섯 마당만 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판소리가 우리의 대표적 전통예술로 자리 잡은 데에는 신재효(申在孝, 1812~1884)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신재효는 우선 판소리 열두마당 가운데 <춘향가>, <심청가>, <토별가(수궁가)>, <박타령(흥부가)>, <적벽가>, <변강쇠가> 등 모두 여섯마당의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면서 자기 나름으로 개작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판소리 이론을 정립하고 비평 활동도 했는데 특히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판소리의 4대 법례로 제시하고 또 역대 명창들의 특색을 비유의 방식으로 평가했지요. 또 신재효는 집안에 ‘노래청’을 만든 다음 수많은 명창들과 교류하였고 김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