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황이 고향에 돌아가 누차 상소하여 나이가 들었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병이 들었는데 아들 준(寯)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예조가 틀림없이 관례에 따라 예식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할 것인데, 너는 모름지기 내가 죽으며 남긴 뜻이라 말하고 상소를 올려 끝까지 사양하라. 그리고 묘도(墓道)에도 비갈(碑碣,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글자를 새겨 세우는 것)을 세우지 말라.‘ 하였다.(가운데 줄임) 그로부터 며칠 뒤 죽었는데 준이 두 번이나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위는 《선조수정실록》 4권, 선조 3년(1570년) 12월 1일 기록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죽음에 관한 얘기입니다. 조선조 중기 명종과 선조 때 살았던 퇴계 이황(1501~1570)은 평생 올바른 인간의 도리를 추구하며 학문과 수양,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아 마침내 최고의 유학자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나이가 들자,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 벼슬을 사양하려 했고, 죽기 전 아들에게 나라에서 조의금이나 장례용품 주면 사양하고 받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지요. 요즘 정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0) 옛집 새로 옮겨 이 물가에 지으니 그대 허술한 집 찾아와 어찌 견디냐 묻네 만 권 책의 훈기를 내가 경모하니 한 바가지의 물로 사는 삶에도 진정한 기쁨을 느끼네 스물여섯 해 전 마음먹었던 것을 오늘 되새겨 보매 근심은 동해물로 달려와 측량할 수가 없구나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를 끝으로 공직생활을 일단락짓고, 자기 고향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읊은 시다. 20대 후반부터 꿈꿔 왔던 소망이 이제야 실현된 것을 기뻐하며, ‘만 권 책의 훈기’와 ‘한 바가지의 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노래했다. 이황은 대학자이자, 문과에 급제하고 ‘직장생활’을 오래 한 관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항상 학문 쪽에 더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온전히 학문에 집중하려 정계 은퇴를 결심하고 지은 서당이 계상서당이었다. 이 책, 《퇴계 이황》은 2,500년 유교 역사를 소설로 그려낸 최인호 작가의 《유림》을 청소년용으로 각색한 책이다. 동화작가 표시정이 쉽게 풀어쓰고 최인호가 머리말을 붙였다. 조광조, 공자, 이이 등 유교 사상계의 걸출한 인물을 다룬 최인호의 《유림》 6부작 가운데 여섯 번째 책이다. 이황이 정계 은퇴를 결심한 데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동천(洞天)’이란 말이 있다. 동(洞)이란 글자는 골짜기를 뜻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사는 세계, 또는 산에 싸이고 물이 흐르는 내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 멋진 산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그런 산수경관이 연속으로 펼쳐지는 곳을 동천이라고 한단다. 본래 도교에서 쓰던 말인데 유학자들도 학문의 근본 목적인 본래 심성을 되찾아 안심과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장소, 요즘 말로 하면 치유를 위한 으뜸 공간으로 생각하고 이곳을 찾는 즐거움을 추구하곤 했다. 이 세상에서 이른바 신선(神仙)이라고 하는 자를 본 사람이 누가 있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신선이 사는 곳이야말로 그지없이 즐거울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곳의 정경을 극구 묘사하곤 하는데, 가령 안개와 노을에 잠겨 아스라이 떠 있는 바다속의 삼신산(三神山)이라든가 궁실이 영롱(玲瓏)하게 솟아 있는 땅 위의 각종 동천(洞天 신선이 사는 곳)에 대한 기록을 접하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면서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 최립 「징영당(澄映堂) 십영(十詠)에 대한 서문(序文)」 《간이집》 제3권 / 서(序)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면 이러한 동천은 어디에나 있을 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黃卷中間對聖賢 옛 책을 펴서 읽어 성현을 마주하고 虛明一室坐超然 밝고 빈방 안에 초연히 앉아 梅窓又見春消息 매화 핀 창가에 봄소식 보게 되니 莫向瑤琴嘆絶絃 거문고 줄 끊어졌다 탄식하지 않으리 어제 1월 26일 제주방송에서는 “추위 이겨낸 '봄의 전령' 매화 만발.. 평년보다 46일 빨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제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15일 꽃이 피기 시작한 매화가 이날 활짝 피었다는 소식이다. 그런가 하면 전국적으로 강추위가 찾아온 22일에도 경남 창원 한 아파트 단지에 매화가 피었다고 연합뉴스는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매화는 눈 속에 핀다고 하여 설중매(雪中梅), 설중화(雪中花)라 하고, 한겨울에 핀다고 하여 동매(冬梅)라고도 불린다. 맨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매화는 긴 겨울을 보내고 꽃이 피듯 시련기를 이겨낸 끝에 좋은 소식이 있음을 암시한다. 찬 서리를 이겨내는 강인한 성정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가는 선비의 의연한 자세와 닮았다고 하여 군자의 꽃으로 추앙받는다. 그와 함께 꽃말은 고결한 마음, 기품, 결백, 인내라고 한다. 조선 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을 지낸 조선시대 으뜸 성리학자 퇴계 이황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퇴계 이황 선생은 그 학문의 깊이에 비하여 여복이 참으로 없었던 사람입니다. 첫째 부인은 21살에 얻은 김해 허씨인데 27살에 병으로 사별합니다. 퇴계가 30살이 될 무렵, 퇴계가 사는 안동으로 문신 권질(權礩)이 유배되어 옵니다. 홀로 사는 퇴계에게 그는 이런 부탁을 하지요. “자네 말일세. 나한테 딸아이가 하나 있네. 그 애가 본디는 괜찮았으나, 사화(士禍)로 인해 정신 줄을 놓아 좀 부족한 아이일세 가장 믿을 만한 이는 자네뿐이니, 제발 거두어 주게.” 그리하여 퇴계는 좀 모자란 권 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합니다. 어느 날 퇴계는 할아버지의 제사를 치르기 위해 큰형님 집으로 갑니다. 제사상을 차리는 데 갑자기 배 하나가 방바닥으로 굴러떨어졌습니다. 퇴계의 부인 권 씨가 떨어진 배를 얼른 치마 속에 감춥니다. 권 씨는 큰 동서에게 혼나지만, 퇴계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퇴계는 부인 권 씨를 불러 "왜 그러셨소."라고 묻습니다. "먹고 싶어서요." 조선 예법의 대가였지만 퇴계는 배를 손수 깎아 부인에게 먹여 주었다고 합니다. 또 하루는 권 씨가 흰 두루마기를 다림질하다가 조금 태우고서는, 하필 붉은 옷감을 대고 기웠습니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퇴계 이황 선생 집에는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먹음직스러운 배가 탐스럽게 열리곤 했지요. 이웃집 개구쟁이는 그 배가 탐이 납니다. 돌을 던져 배는 떨구었으나 배가 담장 안으로 떨어져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돌을 던지던 개구쟁이는 퇴계 선생에게 들키게 됩니다. 이제 죽었구나 하는 순간에 퇴계 선생은 머슴을 불러 이렇게 말하지요. "마당에 배가 많이 떨어졌구나…. 이 배를 이웃집 아이에게 가져다주도록 하여라." 혼날 줄만 알았던 아이는 뜻밖의 호의에 감동합니다. 그러고는 다시는 이웃집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하지요. 갓난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아마도 천사가 있다면 아이들의 함박웃음을 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집니다. 살아오면서 온갖 세상 풍파에 시달렸기 때문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천진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해맑은 어린아이의 웃음에서는 성냄을 찾아볼 수 없고 초췌한 노인의 얼굴에서는 밝은 미소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넉넉한 마음에서 여유가 나오는 것이며 너그러움 속에서 행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따뜻함으로 치장하고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江漢滔滔日夜流(강한도도일야류) 한강물은 밤낮으로 도도히 흘러가는데 先生此去若爲留(선생차거약위유) 선생의 이번 걸음 멈추게 하고파라. 沙邊拽纜遲徊處(사변예람지회처) 모래밭에 매인 닻줄 풀기 싫어 서성이는데 不盡離腸萬斛愁(부진이장만곡수) 애간장 녹는 이별과 무거운 슬픔 가눌 길이 없구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퇴계(1501~1570) 선생과의 이별의 아쉬움을 쓴 시입니다. 퇴계는 젊은 임금 선조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올라왔다가, 1569년 3월 4일 선조의 만류에도 다시 고향 안동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번에 낙향하면 다시는 상경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실제로도 퇴계는 그다음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기에 대유학자를 볼 수 있을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많은 조정의 관리들과 유학자들이 퇴계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하였습니다. 퇴계는 길을 떠나 한강을 건너기 전 몽뢰정(夢賚亭)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이때 평소 퇴계를 존경해오던 고봉도 몽뢰정으로 퇴계를 찾아가 하직 인사를 올립니다. 몽뢰정은 정유길(鄭惟吉, 1515~1588, 조선 전기의 문신) 선생이 동호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퇴계 친필로 된 묘갈문 비석이 있어요” 파주 쪽 아는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퇴계는 경북 안동 사람이어서 고향 쪽에는 많은 글씨를 남기셨지만, 퇴계의 친필 묘갈문이 파주땅에 비석으로 있다니. 부쩍 궁금증이 일어나서 어디에 있냐고 하니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있단다. “거기에 왜 있지요?” 하고 다시 물으니, “아 묘갈이 있는 곳은 성수침이란 분의 묘소이고, 그분은 성혼의 아버지인데 그 옆에 나란히 묘소가 있어요”라고 한다. 성혼(成渾)이라면 호를 우계(牛溪)라고 하는 유명한 성리학자이신데 그 아버지가 성수침(成守琛)이구나. 그런데 거기에 퇴계가 쓴 친필 묘갈이 비석으로 있단 말인가? 곧 가서 보자고 하니 저녁 무렵에 안내를 해준다. 과연, 향양리라는 곳, 약간의 야산을 끼고 언덕을 따라서 조성된 꽤 넓은 묘역에 들어가니 비각이 눈에 들어온다. 비각 안에는 사람 키보다 큰 두 개의 비석이 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성혼의 신도비(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이 있는 근처의 길가에 세우던 비석)고, 왼쪽의 것이 성수침 선생의 묘갈비이다. 팔작지붕형의 가첨석(加檐石, 빗돌 위에 덮어 얹는 지붕 모양으로 된 돌), 비신(碑身),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오락가락 멈칫멈칫하다가도 어김없이 봄은 왔다. 우리 주위 전역에 초록의 옷을 입은 봄의 아가씨들이 벌써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퇴계가 이런 정경을 묘사한다. 霧捲春山錦繡明 안개 걷힌 봄 산이 비단처럼 밝은데 珍禽相和百般鳴 진기한 새들은 서로 화답하며 온갖 소리로 우네 幽居更喜無來客 그윽한 곳 요즘은 찾는 손님이 없다 보니 碧草中庭滿意生 푸른 풀이 뜰 안에 마음껏 났구나 1565년 봄 퇴계 이황은 4년 전 완공된 서당에서 봄을 맞으며 서당 앞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신이 머물며 수양과 교육에 진력할 좋은 땅을 구해 5년여 공사기간 끝에 마련한 도산서당의 앞뜰에 봄이 왔음을 시(詩)로 표현해 본 것이다. 퇴계는 봄날의 아침 풍경에 이어 한 낮을 묘사하는 시도 지었다. 庭宇新晴麗景遲 뜨락에는 비 갠 뒤에 고운 볕이 더딘데 花香拍拍襲人衣 꽃향기는 물씬물씬 옷자락에 스미누나 如何四子俱言志 어찌하여 네 제자가 모두 제 뜻 말하는데 聖發咨嗟獨詠歸 시 읊고 돌아옴을 성인이 감탄했나 아침이 한낮으로 바뀌면서 살짝 비가 온 마당에 햇빛이 서서히 들고 있고, 비에 씻긴 풀과 꽃향기가 옷자락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앞 두 줄은 그런 뜻인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1567년 조선 왕국의 13대 임금 명종이 후사도 없이 세상을 뜨자 17살의 나이에 갑자기 왕위에 오른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늙은 몸을 이끌고 1568년 여름에 상경한 퇴계 이황은 정성을 다해 경연에 임하고 성왕(聖王)의 이치를 담은 <성학십도>를 지어 선조에게 올린 뒤 고향에 돌아가기를 간곡하게 청원한다. 그 이듬해인 1569년 음력 3월 4일 겨우 고향에 다녀오는 윤허를 받은 퇴계는 혹 임금의 마음이 바뀔 쌔라 다음날 한강을 건너 고향으로의 발길을 서둘렀다. 열흘 만인 3월 13일에 퇴계는 충북 단양에 도착했다. 단양은 퇴계가 48살 때에 군수로 약 10달 재직하였던 곳이다. 퇴계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20여 년 전 백성들을 위해 힘을 쏟았던 때를 생각하며 남다른 감회를 느꼈을 것이지만 따로 기록을 남긴 것은 없고, 다음날 14일에 죽령을 넘어 풍기로 간다. 죽령은 해발 696미터로 아주 높지는 않지만, 문경의 조령(새재)와 함께 소백산맥을 넘어 서울과 영남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퇴계는 지금 죽령옛길로 불리는 길을 따라 맑은 물이 흐르고 곳곳에 폭포가 있는 아름다운 이 길을 올라가 죽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