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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의젓했던 효장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2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장사지냈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망곡(望哭)을 하였고, 백관(百官)들은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곡하였다.” 이는 《영조실록》 21권, 영조 5년(1729년) 1월 26일 기록입니다. 《영조실록》은 뒤이어 “아! 통탄스럽다. 무신년(1728년) 11월 16일 해시(亥時)에 창경궁 진수당(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였으니 곧 사기일(私忌日)이며, 나이 겨우 10살로써 왕세자에 있는지 겨우 4년이었다. (가운데 줄임) 아! 나의 비덕으로 믿는 바는 오로지 왕세자였고, 성품이 또한 이와 같았기에 동방(東方)의 만년의 복이 될 것을 바랐는데, 어찌 나이 겨우 10살 만에 이 지경에 이를 줄 생각했겠는가?”라고 영조는 통탄해했습니다.

 

사실 효장세자는 ‘효성이 지극했고, 아버지 영조를 빼닮아 모습이 의젓하고 행동이 침착했다.’라고 합니다. “어느 날 서운관에서 탁상시계인 문신종(問辰鐘)을 바치자 그냥 서당에 놓아두었다. 한데 젊은 내관이 그것을 구경하다 잘못 건드려 고장이 나버렸다. 영조가 서당에 찾아왔을 때 중관이 그 일을 고하면서 내관을 처벌해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영조는 우연히 일어난 불상사이니 문책하지 말라고 하자 곁에 있던 세자가 빙그레 웃었다. 영조가 까닭을 물으니 세자는 ‘이런 하찮은 물건 때문에 내관을 처벌하라는 것이 어이없어 웃었습니다.’”라는 기록이 《영조실록》 20권, 영조 4년(1728년) 11월 26일에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세자가 그해 11월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그달 1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애통했겠습니까? 그런데 2년 뒤인 1730년 3월 효장세자의 사인이 밝혀졌습니다. 소론 일당의 지시를 받은 궁녀 등이 사람의 뼛가루를 창경궁의 양화당, 동궁, 빈궁의 침실 등에 묻었고, 예전부터 그것을 왕세자와 여러 옹주의 음식에 타 먹였던 것이지요. 이후 이에 관련된 일당이 모두 잡혀 처형되었고, 배후의 소론은 그 뒤 재기불능의 상태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