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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베3댐의 조선인강제노동현장을 찾아서

만령의 탑(萬靈之塔) – 조선인과 일본인 무연고자 묘지

구로3댐의 조선인강제노동현장을 찾아서 <8>

[우리문화신문=류리수 기자]  

 

야쿠시지(藥師寺) 묘지 ‘만령의 탑’

 

여야용묘(呂野用墓)를 뒤로하고, 우리는 야쿠시지(藥師寺) 인근 산기슭으로 향했다. 살짝 오르막길을 오르면 오른편으로 평평한 자리가 나오는데 옛날 조선인 노동자들이 묵었던 현장 식당(함바) 자리였다고 한다.

 

 

그곳을 지나 왼편으로 꺾어서 언덕을 오르자 돌 비석들이 모여 있는 야쿠시지 묘지가 나타났다. 그 왼쪽 끝, 관음상이 서 있는 큰 단상이 바로 ‘만령의 탑’이었다. 왼쪽 아래로 작은 지장보살이 셋 있었다.

 

 

ㅎ 선생님과 나는 바닥을 덮은 낙엽을 손으로 걷어냈다. ㅎ 선생님은 관음상 양옆에 놓인 꽃병에 물을 붓고 준비해 오신 꽃을 꽂고 향을 피우셨다. 필자는 한국에서 준비해 간 술을 따르며 예를 올렸다.

.

 

여야용묘 건립 이후로도 죠쇼지(常照寺)에 타고 남은 숯과 함께 섞인 조선인 유골이 시멘트 포대 두 개에 담겨 왔다. 이는 1940년 아조하라다니(阿曾原谷) 눈사태 때 희생된 조선인 무연고자 유골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죠쇼지(常照寺)의 당시 주지인 히구치 요시노리(樋口惠昇) 스님은 우나즈키(宇奈月) 쥬도쿠지(樹德寺) 주지스님과 상의하고 당시 우치야마(内山) 촌장에게 부탁해서 우나즈키 화장장에 무연고자를 모셨다.

 

그런데 1987년 7월에 화장터가 없어지게 되자 이장하려고 발굴했을 때는 이미 많은 유골이 흙으로 돌아갔다. 그것을 다시 새 유골함에 넣고 41명의 무연고 유골을 우나즈키 야쿠시지 묘지 안에 ‘만령의 탑(萬靈之塔)’을 세워 모셨다.(堀江節子, 《黒三ダムと朝鮮人労働者》, 65·67쪽)

 

조선인과 일본인 무연고자들의 영령을 추모

 

구로베는 전력개발뿐 아니라 온천개발이 활발한 곳이었다. 위험한 전력개발에서 희생된 무연고자와 온천개발로 각지에서 구로베의 여관으로 모여든 사람 가운데 죽게 되었을 때 연락할 곳이 없는 사람을 ‘만령의 탑’에 모신 것이다.

 

 

그런데 죠쇼지(常照寺)의 히구치 카즈마루(樋口和丸) 스님(히구치 요시노리 스님의 아들)이 지니고 있던 ‘구로베 개발·온천 개발 만령지탑 기원’을 보면 이 탑의 의미와 함께 실질적으로 탑 건립을 주도한 이는 이 글을 쓴 사토 요시카즈(佐藤喜一) 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토 씨는 ‘구로베 개발ㆍ온천 개발 만령지탑 기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이쇼 말기 야나가와라(柳河原) 공사 눈사태로 35명, 1938년 12월 27일 시아니다니(志合谷) 눈사태로 84명, 1940년 1월 19일 아조하라(阿曾原) 눈사태로 26명, 또한 1936년에서 1939년까지 고열터널 공사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포함한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하며 울부짖는 흰옷 입은 사람들의 이국적인 장례식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구로3댐의 고열터널 공사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포함한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이들을 위해 앞으로도 8월 7일이면 참배하겠다.’ (堀江節子, 《黒三ダムと朝鮮人労働者》, 67쪽)

 

사토 요시카즈씨는 바로 여야용묘(도야마 답사기 제7회에 내용 수록)를 연구 발표한 스기모토 마스미(杉本ますみ) 씨의 부친이었다.

 

스기모토 씨의 언니는 “아버지가 시아이다니 사고 때(1938년) 여러 분들이 주검을 자기 여관 앞 야쿠시지(薬師寺)라는 절에 가져다주셨다고 했어요. 그때 아버지는 15살이었던 것 같은데 ‘아이고 아이고’ 하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정말 마음이 아팠다고 해요.”라고 회상했다. 사토 씨는 그 기억 속에서 일본인이든 조선이이든 연고 없는 이들을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왜 위령비를 세우고 싶어 했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이 글을 읽고 나니 아버지가 반드시 세워야겠다고 생각해서 세운 것이라는 걸 알았어요.”라고 덧붙였다.

 

한편, 스기모토 씨 자매는 어려서 200~300명을 재울 수 있는 큰 여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 현관에 보따리를 들고 서있는 사람을 보고 ‘누구지?’라고 생각하면서 학교에 갔어요. 돌아오면 그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 당시 일본도 모두 가난해서 살 곳이 없었는데 온천여관에서는 그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그날로 받아줬어요. 그러다가 병이 나거나 죽으면 연락처를 몰라서... ”

 

이렇게 발전소 공사 중에 죽은 사람들뿐 아니라, 활발한 온천개발로 여관에서 일했던 무연고자들이 화장터에 묻혔다가 다시 ‘만령의 탑’에 모셔진 것이다. 물론 여관에도 조선인들이 일했다고 한다.

 

이 ‘만령의 탑’ 건립에는 우나즈키 마을과 자치진흥회뿐 아니라, 관서(関西)전력의 협력도 있었다고 한다. 사토 씨가 도야마현(富山県)의 관서전력에 근무했던 관계도 있고, 관서전력의 공사 중에 사고가 많았으니 ‘추모해야 한다’라는 뜻이 모인 것이기도 하다.

 

 

말도 잘 안 통하고 이국인에게 주는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타국 땅에서 생지옥과 같은 노동을 하다가 처참하게 죽어간 조선인들. 바로 이 지역에서 85~90년 전 가족의 주검을 마주하고서 흰옷을 입고 이국적으로 장례를 치렀을 조선인들도 떠올려 보았다.

 

스기모토 씨의 언니는 구로베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아이다니 사고 때 경찰이었던 아버지를 둔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고로) 팔이 떨어졌다든지 훼손된 주검을 야쿠시지 제단 위에서 꿰매서 보기 좋게 잘해서 돌려드리고 싶어서 일본인이 모두 열심히 했다고 들었습니다. 큰 의미에서 차별이라는 것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고인을 부모님(고향, 가족 품)에게 돌려주고 싶다, 부인에게 돌려주고 싶다고 하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은 어느 나라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만령의 탑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식민지 조선인도, 일본인 무연고자도 차별 없이 함께 모신 곳이었다. 우나즈키 마을 사람들의 인간적인 연민과 추모의 정성이 이 탑에 깃들어 있었다.

 

역사를 새기며

지난 8월 말, 야마구치현(山口県) 죠세이(長生) 탄광에서 한국 잠수부가 바닷속에 수장된 조선인 유골을 건져 올렸다. 1942년 붕괴 사고로 희생된 183명 가운데 136명이 강제동원된 조선인이었다. 구로3댐에서 희생된 조선인들 역시 그 진실을 찾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진혼일 것이다.

 

이번 도야마 답사에서 마음에 남은 것은, 구로베의 우나즈키 마을 사람들이 이국땅에서 희생당한 조선인 노동자의 유골을 우리가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동안에도 수습하여 불공을 드려왔다는 점이다. 또한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애써온 시민 연구자 ㅎ 선생과 스기모토 씨 등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되새길 수 있었다.

 

그러나 도야마의 전시관과 박물관 어디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극심한 노동을 해야 했던 ‘조선인의 희생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토 씨의 ‘만령의 탑’ 기원을 적은 글에는 적혀 있지만 일반인이 공개적으로 볼 수는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10월 9일 여야용 씨 서거 88주년 추도식에 다케쿠마 요시카즈(武隈義一) 구로베 시장이 보내온 메시지에 “구로베강의 전원개발에는 조선인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던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조선인의 존재와 희생을 인정한 것은 진실과 화해를 향한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지금도 일본의 우익 세력은 여전히 제국주의의 과거를 미화하고, 불편한 역사를 외면하고 후대에 가르치려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역사수정주의로 인해 우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도 치열한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우리는 이제라도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과 연대하여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내고 기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도야마는 알펜루트와 단풍 여행, 온천으로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자연과 근대 문화유산의 이면에는 우리 조상의 눈물과 피가 스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기억을 마음 깊이 새기며 답사의 길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