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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한국을 사랑한 일본 전후 시(詩)의 맏딸

순결만을 동결시킨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십니다.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05]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한국의 노인은 지금도 변소에 갈 때

조용히 허리를 일으키며

<총독부에 다녀온다>

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조선총독부에서 호출장이 오면

가지 않고는 못 배겼던 시대

어쩔 수 없는 사정

그것을 배설에 빗댄 해학과 신랄함

 

서울에서 버스를 탔을 때

시골에서 상경한 듯한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한복을 입고

까만 모자를 쓰고

소년이 그대로 할아버지가 된 것 같은

순수함 그 자체의 인상이었다

일본인 여러 명이 선 채로 일본어를 조금 지껄였을 때

노인의 얼굴에 두려움과 혐오의 표정

획 달려가는 것을 봤다.

천만 마디의 말을 쓰는 것보다 강렬하게 일본이 해온 짓을

거기에서 봤다.

 

이 시의 제목은 <총독부에 다녀온다>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아마도 일제시대 한국 민족이 당한 아픔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낀 모양이다. 이 시를 쓴 사람이 누구인가? 뜻밖에도 일본인 여성이었다.

 

2006년 2월 21일 일본 최대의 일간지인 요미우리는 1면 맨 밑에 있는 칼럼난인 <편집수첩(編集手帳)>에서 “시대에 뒤떨어져”라는 제목의 시 하나를 인용하면서 이례적으로 한 시인의 죽음을 애도한다.

 

자동차도 없고

워드프로세서도 없고

비디오데크도 없고

팩스도 없고

퍼스콤이건 인터넷이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특별한 지장이 없어

그렇게 정보를 모아서 뭐에 쓰는 건데?

그렇게 서둘러서 뭐 하게?

머리는 텅 빈 채 말이야...

 

이 시를 쓴 사람이 하루 전에 79살을 일기로 작고하셨노라고. 이 시인은 멋진 시어를 잘 다듬었으며, 물질문명의 바다에서 멀리 육지를 비춰주는 한줄기 등대였다는 찬사도 받았다고 칼럼은 전한다. 요미우리 신문이 극찬한 전후 현대 일본 시단의 으뜸이었던 이 여류시인은 누구였을까?

 

이 사람이 바로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였다.

 

 

1926년에 태어난 이바라기 노리코는 19살 때에 패전(일본의 항복)을 맞는 등 어수선한 청년기를 겪어야 했다. 사회는 어수선했고, 먹고 사는 문제로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1946년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본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란 연극에 심취해 글을 쓰기 시작해 요미우리신문의 제1회 희곡모집에 가작으로 당선되고 NHK 라디오에는 자작동화가 2편이 채택되는 등 글재주를 보였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결혼 한 1950년 이후로, 주부로서 생활하면서도 시인의 길에 몰두해 전후파로 불리는 많은 젊은 시인들의 리더로서 활약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전후 현대시의 맏딸(長女)’.

 

요미우리가 극찬한 멋진 시어는 아마도 다음의 작품을 말할 것이다.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가 물 주는 것을 게을리하고서는

 

나날이 까다로워져 가는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 것은 어느 쪽인가 ...

 

잘못된 일체를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가까스로 빛을 발하는 존엄(尊嚴)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바보 같으니라고...

 

그리고 그녀가 쓴 다음 시는 그녀의 대표작으로서 여러 교과서에 수록된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어이없는 일도 있는 걸까 하며

블라우스의 팔을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쳐흘렀다.

담배를 다시 피웠을 때처럼 현기증이 났다.

나는 이국의 음악을 마음껏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가장 불행했다

나는 가장 어리석었다

나는 가장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가능한 한 오래

살아야 한다고

나이를 먹고 나서야 몹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말할 것도 없이 태평양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맑은 청년들이 전쟁으로 몰려나가 죽은 현실, 전쟁을 위해 온통 엉망이 된 세상, 그리고는 패전으로 인한 비참한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어리석음을 조용히 고발하는 것이다. 이 시는 다수의 일본의 교과서에 수록된 만큼 일본인들에게 침략전쟁 문제를 다시 생각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으로 머물렀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 시인을 목마르게 다시 찾을 이유가 안 된다. 그는 정말로 조선인, 아니 한국인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 시인이 세상을 떠날 때 일본에서 활동하는 인권운동가 서경식 씨 등 가까운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번에 저는 (2006)년 (2)월 (17)일, (지주막하출혈=뇌막졸중)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써 둔 것입니다. 내 의지로 장례ㆍ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집도 당분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니 조위금이나 조화 등 아무것도 보내지 말아 주세요. ‘그 사람도 떠났구나’ 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 기억해주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실제로 돌아가신 날은 2월 19일이지만, 미리 생전에 자기 손으로 괄호 안에 날짜를 적어 넣어 친구들에게 보낸 것이다. 서경식 씨와 이바라기 노리코의 인연은 별로 없었다. 그냥 서경식씨가 중학교 2학년 때인 1955년 첫 시집 《대화》, 1958년 두 번째 시집 《보이지 않는 배달부》(1958) 등의 시집을 통해서 시를 읽으며 그녀에 대한 또렷한 인상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그 인상은 이미지는 불에 탄 기왓장들이 나뒹구는 거리를, 눈부신 오후 햇살을 온몸에 받으면서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걸어가는 여성의 모습. 봉건제의 속박과 군국주의의 중압에서 해방된 여성들이 주권재민, 평화주의, 남녀동등권 등 전후 일본 헌법이 구가한 민주주의 이념을 향유하면서 그것을 대담하게 실천해가는 모습이었다(‘심야통신’, 한겨레신문 2006.3.31).

 

 

그런데 1980년대 전반 어느 날 뜻밖에도 당시 서경식 씨가 살고 있던 교토에 그가 찾아와 직접 만나게 됐다고 한다. 서경식 씨의 형인 서준식 씨가 17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를 읽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데, 그 사실을 편지로 알리자 직접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런 인연 이후 80년대 후반에 이 시인은 한국어를 느닷없이 공부한다. 시인 홍윤숙 씨를 만나, 홍 씨의 능숙한 일본말에 놀라 시작한 한국어 공부였다. 그리고는 한국인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1990년에는 12명의 현대 한국시인들의 작품을 번역한 《한국현대시선》을 출간한다. 그것으로 해서 당당히 1991년에 요미우리문학상을 받는다.

 

‘이웃나라 말의 숲’이란 시는 바로 그러한 작가의 애정과 노력의 작은 열매이다.

 

이웃나라 말의 숲

 

숲속으로 깊숙히

가면 갈수록

나뭇가지 엇갈리며 더욱 깊숙해져

외국어의 숲은 울창해 있다

한낮이면서 역시 어두운 오솔길 혼자서 터벅터벅

 

「구리」는 밤

「가」는 바람

「오바케」는 도깨비

「헤비」는 뱀

「히미쓰」 비밀

「다케」 버섯

무서워 「고와이」 ...중략

 

왜놈의 후예인 저는

긴장을 하지 않으면

금세 한 맺힌 말에

붙잡혀 먹힐 것 같고

그러한 호랑이가 정말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옛날 옛날 그 옛날을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대」라고

전해져 오는 우스꽝스러움도 역시 한글이기에

어딘가 멀리서

웃으며 떠드는 목소리

노래 시침 떼고

웃기는 속담의 보고이며

해학의 숲이기도 한

대사전을 베개로 선잠을 자면

「네 들어옴이 늦었다」라고

尹東柱가 조용히 힐책을 한다

정말 뒤늦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너무 늦었다고 생각지 않기로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인 윤동주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그것이 당신들에겐 광복절

우리들에겐 降伏節

8월 15일을 거슬러 올라 불과 반년 전이었을 줄이야.

아직 학생복을 입은 채로

순결만을 동결시킨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십니다.

 

 

한글과 한국인,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배어나는 작품이다. 특히 윤동주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담아 ‘윤동주’라는 수필을 쓴 것이 현재 일본 고교 국어교과서인 《신편 현대문》에 실려서 읽힌다. 이바라기는 수필에서 말한다. “그는 일본 검찰의 손에 살해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통한(痛恨)의 감정을 갖지 않고서는 이 시인을 만나 볼 수가 없다”

 

오십 대 후반, 예순이 되어 얼마나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해냈고, 그는 정말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혼자서 걸어갔다. 1999년에 나온 시집 《기대지 않고》는 시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무려 15만 부가 나갔다고 한다. 그 시집의 제목 작품인 ‘기대지 않고’는 그녀의 일생의 구도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기대지 않고

 

더 이상

기성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면서

마음속으로 배운 건 이 정도

 

내 눈 귀

내 두 다리만으로 선들

무슨 불편이 있으랴.

 

기댈 건

오로지

의자 등받이뿐

 

언젠가 업무차 오사카를 다녀온 뒤 통역으로 수고해주신 강소영 씨로부터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집을 받았다. 맨 처음 “앗! 나는 일본어 시를 읽을 실력도 없는데, 어떡하나?”하고 절망을 느끼고 있다가 하나둘씩 시를 읽어보고 그에 대해 알아보던 중 2006년 2월 21일 요미우리 신문의 편집수첩에 난 칼럼이 기억이 났다. 그때 이미 만난 분이구나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 서경식 씨가 당신을 만났듯이 나도 당신을 만날 인연이 있었던 거야. 그것이 비록 당신이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신 때이기는 하지만. 뒤늦게 인사를 드립니다.

 

이바라기 노리코 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