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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옷장에서 꺼낸 조선의 멋

《조선시대 옷장을 열다》, 글 조희진, 그림 오연, 위즈덤하우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의식주(衣食住)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로 손꼽히는 세 가지다. 그 가운데 ‘옷 잘 입기’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때와 용도에 맞춰 옷을 잘 갖춰 입는 것은 그 사람의 교양을 보여주는 수단이자, 사회적 신분과 재력을 나타내는 지표이며, 한 사회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지렛대이기도 하다.

 

이 책, 《조선시대 옷장을 열다》는 다들 누구나 관심을 가질 법하지만 뜻밖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옷’이라는 소재를 통해 조선시대를 들여다본다. 조선시대 ‘옷’이라 하면 흔히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저고리에 치마를 떠올리게 되지만 조선의 옷 문화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했다.

 

 

양녕대군의 손자 호산군도 달라고 졸랐던 ‘쓰개’부터 성종이 사치하는 풍조를 걱정해 금지한 ‘초피 저고리’, 선조가 오랑캐의 풍습이라고 생각해 금지한 ‘귀고리’까지, 옷과 보석으로 멋을 내는 방식도 각양각색이었다. 조선 사람들의 옷장을 열었을 때 가장 눈에 띌 만한 네 가지를 추려보았다.

 

1. 쓰개(이엄)

쓰개(이엄)는 추위를 이길 수 있도록 동물의 털과 비단, 무명 등으로 만든 방한용 모자였다. 수달이나 담비, 족제비 같은 짐승의 털가죽에 비단처럼 값비싼 천을 덧대어 만들었기 때문에 무척 값나가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양녕대군의 후손이었던 호산군도 성종이 공신들에게 하사한 쓰개에 욕심을 내어 자신도 달라고 졸랐을 정도였다.

 

 

특히 조선으로 들어오는 왜국산 수달 털가죽으로 만든 쓰개의 인기가 너무나 높아, 수달 털가죽을 사느라 나라 안의 면포가 자꾸만 줄어들자 조정에서는 이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영조 때의 실학자인 이긍익도 이런 상황을 걱정하며 아래와 같이 탄식했다.

 

(p.25)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대부와 백성 할 것 없이 왜국의 수달 털가죽을 사서 이엄 만들기를 좋아한다. 이엄의 빛깔이 검은 것을 자랑으로 여겨 수달의 털가죽을 비싼 값에 사들이므로 왜인들은 앉아서 이익을 얻게 되고, 우리나라의 면포는 모두 왜국으로 들어가게 되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담비와 수달의 털가죽으로 만든 이엄을 금지하는 일이 반복되자, 조금 더 값이 싼 족제비털로 만든 이엄이 유행하기도 했다. 유행을 좇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본능인지, 동물 털가죽으로 만든 이엄의 인기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아 나중에는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2. 초피 저고리

이엄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가뜩이나 담비 털가죽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에 더 불을 붙인 것이 바로 ‘초피 저고리’였다. 초피는 담비의 고급 털가죽으로, 따뜻하면서도 털에 윤기가 나 방한용품을 만드는 최고급 재료였다. 이런 초피로 만든 저고리는 오늘날로 치면 ‘모피코트’이자 조선판 ‘명품’이었다.

 

 

담비 털가죽을 구하기 위해 여진족에게 점점 더 많은 물자가 넘어가자, 성종은 당상관 이하의 신하들이 초피 저고리를 입지 못하도록 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피 저고리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서, 선조 때 우의정 노수신은 변방의 장수로부터 초피 저고리를 뇌물로 받았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옷로비’를 받다 적발된 셈이다. 이렇듯 초피 저고리는 따뜻한 방한용품이기도 했지만, 나라의 기강을 위태롭게 하는 애물단지이기도 했다.

 

3. 귀고리

아니, ‘지엄한 유교 국가에서 웬 귀고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놀랍게도 귀고리는 선조 때까지 유행한 선비의 치장품이었다. 명망 높은 사대부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지만, 정말로 그랬다. 사실 귀고리를 하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진 풍속이었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유교적 덕목에 어긋난다 여겨 좋게 보지 않았다.

 

중국 사신들은 조선의 임금을 알현할 때마다 그 점을 지적했고, 중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선조는 유교의 가르침을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애쓰기도 했거니와, 중국 사신들에게 오랑캐의 풍습을 고치지 않았다고 비웃음을 사는 것도 원치 않았기에 결국 비망기를 내려 귀고리 착용을 엄히 금했다.

*비망기: 임금이 명을 써서 승지에게 내리는 문서

 

(p.56)

젊은 사내들이 귀를 뚫어서 귀고리하는 풍조를 금하도록 하라. 옛사람들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에 상처 하나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머리카락을 자르더라도 잘 모아서 죽는 날까지 간수해야 하며, 본래 타고난 신체의 모양을 바꾸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이렇게 귀를 뚫고 귀고리를 하는 오랑캐의 풍속을 모두 고치도록 널리 알리고 백성들이 잘 알아듣도록 타이르라. … 만약 이 금지령을 꺼리고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사헌부에서 잡아 가두고 엄하게 벌을 주도록 할 것이다. 모두가 과인의 뜻을 받들라.

 

이 금지령 이후 조선에서 사대부들이 귀고리를 하는 모습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귀고리를 다룬 글이나 기록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귀고리를 한 사대부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때 유행했던 귀고리가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만약 이 풍속이 이어졌다면 귀고리는 어쩌면 조선 사내들의 멋내기 수단으로 발전 했을지도 모른다.

 

4. 갈모

 

 

구한말,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은 ‘모자의 나라’일 정도로 조선은 모자를 다채롭게 썼다. 그 가운데 ‘갓’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대표적인 모자였다. 그런데, 이 ‘갓’ 위에 쓰는 ‘우산 모자’가 있었다면 어떨까?! 모자에 우산을 달겠다는 기발한 생각, 바로 그것이 ‘갈모’였다. 일본과 조선을 여행한 여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는 갈모에 대해 이렇게 썼다.

 

(p.118)

모자에 우산을 달겠다는 기발한 생각은 조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비 오는 날이면 ‘우산 모자’를 쓰기 때문에 그들의 두 손은 언제나 자유롭다.

 

갈모는 대나무를 잘라 부챗살처럼 가늘게 만들고 그 위에 기름을 여러 번 먹인 종이를 씌워 만든다. 갈모는 언제든 부채처럼 접어서 소매 안에 지니고 다니다가 비가 올 때 펴서 갓 위세 사뿐히 얹는, 아주 귀여운 모자였다. 기름먹인 종이는 방수력이 좋아 안전하게 비를 피할 장소를 찾을 때까지 버티기 충분했다. 또 다른 외국인 퍼시벌 로웰은 이렇게 평했다.

 

(p.120)

조선에서는 우산을 모자처럼 머리에 쓰고 다닌다. 조선은 친구의 우산을 탐내지 않게 하는 실로 행복한 땅이다. … 짙은 노란색 기름종이로 만든 원추형 우산은 양쪽에 달린 줄을 턱 아래서 매듭지어 고정시켜서 쓰는 것이다. 기특하게도 이 우산은 아주 작은 반원 모양으로 깔끔하게 접히기 때문에 날씨가 맑을 때면 신비하게 소매 속으로 사라진다.

 

친구의 우산을 탐내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땅, 조선! 초피 저고리를 입고 귀걸이를 하고, 구슬갓끈을 매고 비가 오는 날 갈모를 얹은 채 ‘초절정 멋짐’을 내뿜는 선비를 상상해본 적 있는가? 검약을 미덕으로 삼은 조선이라지만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고, 멋져 보이고 싶은 마음은 그때도 매한가지였다.

 

이렇듯 이 책은 조선 사대부들의 사치를 들춰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옷장 속에 숨겨진 조선을 조금씩 들춰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재밌는 내용을 유쾌하게 풀어내 가볍게 읽기 좋은 교양서다. 옷 입는 것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조선 사람 특유의 멋 내는 모습을 짚어가며 더욱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