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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인천 <대성목재>에는 농악단이 있었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07]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운하 명인이 그의 풍물인생 60돌을 기린 공연에서 남사당의 후배 명인들과 국악계의 유명 국악인들, 그리고 남사당놀이 <인천시지회>와 사물놀이 <진쇠>, <평택농악 보존회> 등이 출연하여 관객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번 주에는 당시 인천의 <대성목재>라는 목재회사에서 특별히 장려해 오고 있던 농악단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지운하의 고향, 인천 도화동에는 마을 풍물패가 있었는데, 여기서 상쇠를 도맡던 사람이 다름 아닌 지운하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운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찌감치 풍물을 접하게 되었고, 소년 시절에 이미 도화동 풍물패의 단원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기실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풍물패가 있었고, 그 단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점은 그렇게 전문가의 능력을 필요하거나, 또는 전문가적인 실력을 운운할 것까지는 아니나, 어느 정도 그들과 농악을 함께 칠 수 있을 정도의 호흡은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의 앞길은 이미 예견된 길이 아니었겠나 하는 느낌이 짙다.

 

 

이렇듯 그는 어린 시절부터 농악과 인연을 맺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다음 해에는 인천의 <대성목재>라는 회사의 농악단원으로 입사하게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목재회사 내에 직원들을 중심으로 농악단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도 회사의 측면에서 보면 전통을 사랑하는 대단한 애국심이어서 당시의 상황에서는 앞서가는 활동이라 할 것이다.

 

1960년대 초, <대성목재>는 회사 내에 농악부를 비롯, 밴드부와 복싱부를 두고 예술인들과 체육인들을 직원으로 채용하여 육성하였다고 전하는데, 이 가운데서도 특히 농악부의 활동은 매우 유명했다고 한다.

 

농악부에서는 주로 경기도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웃다리농악을 연행하였다고 하는데,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국농악경연대회 경기도 대표로 참가해서 대통령상을 받을 정도로 예능이 출중하였다는 이야기가 당시의 활동사항들을 기억하고 있는 생존 노인들로부터 전해오고 있다. 이 단체의 초기 단원으로는 채상의 명인, 박산억 등이 중심이었고, 1960년대 중반에 오면서 지운하를 비롯하여, 김용래, 임광식, 김태만, 진명환 등이 영입되면서 더더욱 활성화 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김용래는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평택농악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농악인이며, 임광식은 수원 세류동 농악의 명인이었던 임재근의 대를 이은 농악인으로 1969년에 <한국국악예술학교>의 농악 교사로 부임한 이후, 정년퇴임과 함께 현재는 ‘수원 농악’의 복원 사업에 힘쓰고 있는 명인이다.

 

대성목재 농악부 구성원들은 초기에는 남자들로만 구성되어 활동해 오다가 여성 농악 전문예인들로만 구성된 <아리랑 여성농악단>의 6명이 영입되어 보다 더 활발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리랑 여성농악단>이 인천에 순회공연을 왔을 때, 대성목재 농악부와 협연을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여성농악단의 하순자(은자), 신영자, 김옥화 등이 대성목재 농악단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도화동에 있는 인천 공설운동장에서 연습하였으며, 당시 청소년들이었던 지운하, 진명환, 이규하, 김영일 등에게 농악과 예능 전반을 배우게 되면서 대성목재 농악부에 채용되는데, 이들 여류 농악인들은 현재 우리나라 농악계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전해 듣고 있다.

 

 

대성목재의 농악부를 비롯하여 밴드부나 복싱부 직원들은 해당 전공분야에서는 전문적인 예술인이거나, 이름있는 복싱 선수들이었지만, 행사하거나 공연시간, 연습시간 말고는 일반 직원들과 같이 목재의 절단 작업이나 분류 작업 등, 현장의 일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끔은 농악부나 밴드부에 속해 있던 예능인들이 직원들을 위한 간단한 공연을 하며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렇듯 대성목재의 농악부와 밴드부, 복싱부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었으나,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모두 해체되었고, 일반 시민들의 기억속 에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대성목재 농악단이 해체되자, 남사당놀이에 입문했던 지운하는 훗날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보존회 이사장, 쉐라톤 워커힐 예술단 감독, 국립국악원 민속연주단 지도위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중앙대 타악연희과의 겸임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나라 밖 활동도 활발한 편이어서 전세계민속 포크페스티벌 유럽 12개국 공연을 비롯하여, 오스트리아 초청공연, 중국 하얼빈 민속대행진 남사당 공연과 전승교육, 한국ㆍ멕시코 수교 50돌 기림 방문공연, 코스타리카 국제예술제 참가 등등, 남사당놀이와 풍물의 세계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지운하 명인은 2010년, 국립국악원을 퇴임한 뒤, 고향인 인천으로 내려와 계양구립예술단 감독(2011년), 2014인천아시안게임 성공기원을 위한 제3회 인천시민 풍물대장정 제작 총괄(2014년), 인천전통문화예술축제 총괄기획 및 주관(20221~2022) 등등, 고향인 인천지방의 문화예술발전을 위해 진력하고 있다.

 

그는 항상 “동시대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고, 이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현대적 창작물을 만들어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만들어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고향 땅 인천에서 벌이고 있는 그의 활동들이 소기의 목적에 달성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그가 이러한 활동들을 지속할 할 수 있도록 건강이 허락되기를 비손한다.(2022년 12월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