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일본 역사에서 백제여인 고야신립이 제49대 천황인 광인왕(光仁天皇,재위기간 770-781)의 왕비이고 그 아들이 50대 환무왕이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지 오래된 사실이다. 일본 위키사전에는 《속일본기, 続日本紀,797년》를 들어 백제여인 고야신립(高野新立)을 두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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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뫼절길(참도) 끝에 보이는 백제여인 고야신립의 남편 49대 광인왕 무덤 |
“황태후 성은 화씨이며 위는 신립, 증정1위을계의 따님이다. 어머니는 증정1위대지조신진주이다. 왕비의 선조는 백제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이다. (번역 필자: 皇太后姓は和氏、諱は新笠、贈正一位乙継の女(むすめ)なり。母は贈正一位大枝朝臣真妹なり。后の先は百済武寧王の子純陁太子より出ず)
이쯤 되면 백제여인 고야신립의 위상을 자랑해도 될 만하다. 그런데 고야신립이 처음부터 왕비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원래 왕비는 성무왕(제46대)의 딸 이노우에(井上内親王) 였으나 광인왕은 아들까지 낳아 차기 왕 자리를 보장 받은 아들 오사베(他戸親王)와 정실부인을 폐위 시키고 그 자리에 백제여인 고야신립을 앉힌다. 이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긴 했지만 왕권이 강력하던 시절 별 뾰족한 방법은 없는 것이며 객관적으로 볼 때 광인왕은 정실부인보다 백제여인을 더 사랑했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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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궁내성이 만들어 세운 광인왕 무덤 안내판 |
혹시 친정아버지가 천황(제46대)이라고 거들먹거리지는 않았을까? 실제 고야신립은 광인왕의 측실(側室)로 기록되고 있지만 아들이 왕위(제50대)를 물려받고 가장 먼저 한 것이 어머니의 지위였다. 아버지 광인의 왕위를 물려받은 환무왕은 왕좌에 오르자마자 그간 푸대접받고 살았던 한풀이를 하듯 어머니 고야신립의 지위를 올려주는데 즉위 뒤 곧바로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추대한 것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8년 뒤(789년)에 어머니 고야신립이 죽자 황태후(皇太后)로 받들어 교토 천도(794년)와 함께 히라노신사(平野神社)에 모시게 된다. 이어서 태황태후(太皇太后)라는 최고의 지위를 추증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일약 최고의 왕실 어른으로 자리매김 된 것이다.
이들 부부의 무덤은 안타깝게도 따로따로 있다. 남편인 광인 무덤은 나라현에 있고 아내인 고야신립 무덤은 교토 대지(大枝, 오오에)에 있다. 고야신립 무덤은 여러 번 갔지만 지난 5월 큰맘 먹고 글쓴이는 나라현에 있는 광인 무덤엘 다녀왔다. 아마도 한국인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글쓴이가 처음이 아닐까 한다. 서너 시간에 한 대씩 다니는 나라현 다하라(田原) 버스정거장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가야 나오는데 차밭을 지나고 인적이 드문 시골 마을을 굽이 돌아서야 광인왕의 무덤이 나타났다.
무덤을 찾아 간 날은 마침 보슬비가 내렸다. 준비해간 과자와 복분자 술을 따라 무덤 앞에 따르고 지금으로부터 1232년 전 백제여인 고야신립을 사랑한 광인왕을 떠올리고 있는데 빗줄기가 약간 굵어졌다. 무덤 주변에는 마침 모를 심는 논이라 먼발치에서 농부의 작업이 눈에 띄었고 5월의 신록이 무덤 주위를 뒤덮었을 뿐 사위는 고요했다. 이런 한적한 시골에 누가 찾아올까 싶었는데 무덤 참도(參道) 길 쪽으로 작은 승용차 하나가 멎더니 중년의 남녀가 무덤 쪽으로 걸어온다. 통성명을 하고 보니 나라시내에서 찾아온 일본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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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가져간 과자와 복분자 술을 한잔 올리는 글쓴이 |
글쓴이가 멀리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이내 호감을 보인다. 백제여인 고야신립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자 잘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역사공부를 했는지 고야신립이름을 기억하고 있어 우리는 진설했던 한국 과자를 먹으며 환담을 나눴다.
지금은 국제결혼이 흔하지만 1300여 년 전 백제여인과 일본왕의 결혼으로 맺은 왕실 인연은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일본 위키사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야신립의 아들인 환무천황의 자손은 현 천황가와 황족으로 이어질뿐 아니라 신하로 강등한 원 씨나 평 씨의 무가 자손이 된 사람도 있는 등 고야신립의 혈통은 번영을 이뤘다. 평성 13년(2001년) 현 천황이 속일본기에 고야신립이 백제왕족과 오래된 인연이 있다고 기록된 것을 말함으로써 이른바 “한국과의 연고” 발언을 했다. (번역 필자: 高野新笠の子である桓武天皇の子孫は現天皇家や皇族に繋がっているだけでなく、臣籍降下して源氏や平家の武家統領などになった子孫もおり、高野新笠の血筋は繁栄した。平成13年(2001年)、今上天皇は続日本紀に高野新笠が百済王族の遠縁と記されていることについて述べ、いわゆる「韓国とのゆかり」発言をおこ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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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에서 광인왕을 흠모하여 찾아온 일본인들과 함께 |
광인왕의 무덤을 뒤로하고 나오는데 논에서 일하던 농부 아저씨가 반갑게 다가와 멀리 한국에서 왔냐면서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면서 이런저런 말을 걸어온다. 정말 우리는 이웃으로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문득 광인왕과 고야신립이 서로 사랑하던 마음으로 한일관계가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그 길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사실에 대한 진정한 참회와 반성 그리고 제2의 침략인 독도영유권 억지주장을 내려놓을 때라야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