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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 원중거가 본 일본인은 “총명하나 지식이 편벽했다”

[맛 있는 일본이야기 272]

[그린경제/얼레빗=이윤옥 기자] “일본인은 인물은 부드러우나 능히 굳건하고, 굳건하지만 또한 오래 가지 않는다. 약하지만 능히 인내하며 인내 하지만 또한 떨치고 일어나지는 못한다. 총명하지만 지식이 편벽되고 민첩하고 예리하지만 기상이 국한되어 있다. 능히 겸손하지만 양보하지는 않으며 능히 베풀지만 사물을 포용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며 가까운 것을 기뻐하고 먼 것은 소홀하다. 고요한 곳을 즐기고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것을 싫어한다. 본업을 편안히 여기며 분수를 기쁘게 지킨다. 일정한 규율을 지키며 감히 한 치도 나아가거나 물러나지 않는다.”

이는 조선후기 시인이자 저술가였던 원중거(元重擧, 1719-1790)가 제11차 조선통신사(1763)로 참가했다가 지은 <화국지(和國志)> ‘인물’ 편에 나오는 글이다. <화국지>는 18세기 조선 선비의 눈으로 일본의 지리와 역사, 학문과 생활문화, 제도와 한일관계 등을 저술한 백과사전이다. 당시 조선통신사로 함께 일본에 갔던 조엄(1719-1777)이 일본의 문화와 학술에 대하여 ‘일본의 학술은 암흑이라 해도 좋으며, 일본의 문장은 소경이라 할 수 있다.’고 평한데 견주면 원중거의 시각은 좀 더 세밀하고 폭 넓은 관찰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중국과 서양의 문물이 폭주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원중거의 눈으로 본 일본의 18세기를 다시 살펴보자.



   
▲ 조선통신사 모습(조선통신사역사관 제공)

“대개 그 의복은 따뜻함을 취하지 않고 음식은 맛을 구하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서 늦게 자며 열심히 일해서 자기의 힘으로 먹고 산다. 그 몸집은 특별히 큰사람도 없고 또한 지극히 작은 사람도 없다. 뚱뚱하게 살찐 사람도 없고 또한 시커멓게 야윈 사람도 적다.” 그런가하면 “사는 곳에 놓인 책상은 모두 깨끗이 정리되어 있으며 하나라도 기울어지거나 아무렇게 놓아두는 법이 없다. 집에는  문고리나 빗장을 설치해 놓지 않으며 미닫이 종이문으로 가리는데 나무는 얇게 몇 치쯤 되며 지름은 다섯 치다. 얇은 종이를 사용하여 풀을 발라서 밝은 빛을 취하였다.” 원중거가 창호지를 모를 리가 없는데 창호지라고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한국의 창호지같은 종이는 아니었던 듯하다. 계속 보자.

“사람이 죽으면 절에서 천도재를 지내며 재물과 논밭을 바쳐 불사를 올린다. 귀족으로 승려가 된 자는 모두 창루와 술집을 돌아다니며 가정과 자녀를 두고 있어 일반인과 차이가 없다. 경전을 얘기하고 법을 설하며 범패(부처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읊고 계율을 지키는 자는 천백 가운데 한명도 없다. 그러므로 일본에는 문교(文敎)가 없을 뿐 아니라 불법(佛法)도 없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원중거는 당시 오사카성(大坂城)의 웅장하고 번화한 모습에 감탄하는 글을 남겼고  그들의 풍부한 물산이나 편리한 기용 등에 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원중거의 학술과 문예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박제가 등의 저술에 힘입은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