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심은(深隱) 이수(李隨, 1374년-공민왕 23~1430년-세종 12)는 세종이 어릴 적부터 곁에서 학문을 가르친 문신이다. 태종대에 공조정랑, 예조정랑을 거쳐 세종 때에 이르러 예문관제학을 거쳐 참찬의정부사,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생애 : 활동사항 · 태조 5년(1396) : 생원시에 1위로 합격하였으며, · 태조 10년 : 임금이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구할 때, 대사성 유백순(柳伯淳)의 천거로 뽑혔으나 사퇴하였다. · 태종 11년: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가 임금의 명을 전하자 상경하여 여러 왕자의 교육을 맡아보았다. · 태종 12년 : 종묘서(宗廟署) 주부(主簿)를 지내고, · 태종 14년: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관리를 채용하기 위해 시험을 칠 때, 4위로 급제, 전사주부(典祀 主簿)ㆍ공조정랑ㆍ·예조정랑을 지내고, · 태종 17년: 전사소윤(典祀少尹, 제사를 담당하던 전사시의 종4품 벼슬)을 지냈다. 이듬해 세종이 즉위하자 사재감정(司宰監 正, 사재감에 두었던 정삼품 관직)ㆍ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삼군도총제부 벼슬)을 지냈다. · 세종 4년(1422) :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고부부사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한글날이 들어있는 10월이다. 훈민정음 창제의 반대를 외친 최만리를 끄집어내 조명해보자. 결코 인간 최만리가 아닌 역사 속의 최만리라는 인물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이다. 최만리(崔萬理, ?∼1445)는 세종의 핵심 관서인 집현전에서 약 25년을 근무해 실질적인 장관인 부제학에 오르고 청백리로도 뽑혔다는 사실로만 보아도 높은 평가를 받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한 민족의 문자 결정에서는 바르지 못한 주장을 내세운 것이라 할 것이다. 왜 그럴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인종이나 민족은 한 예로 언어가 영어나 러시아어로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고유의 문화[방식]를 가지고 공존하여야 한다는 법칙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훈민정음이 백성을 위한 것임을 거꾸로 밝혀준 반면교사로서의 최만리의 역할이 있 있다. 최만리의 주장을 통해 당시 그 시대 지성인의 사상[생각]과 그 한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해 읽어보자. ㉮ 당대 지식인의 기본 사상, ㉯ 그 지식을 가지고 보는 세상에 대한 인식, ㉰ 중국에 대한 인식, ㉱ 임금과 신하의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정4품 벼슬인 호군(護軍)의 관직을 주라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ㆍ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장영실은 이미 태종 때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궁중기술자로 종사하였다. 제련(製鍊)ㆍ축성(築城)ㆍ농기구ㆍ무기 등 수리에 뛰어났으며 1421년(세종 3년)에 윤사웅ㆍ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고 이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가 되면서 관노의 신분을 벗었고 궁정기술자로 활약하게 된다.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이후에도 장영실이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세종은 공로를 치하하고자 정4품 벼슬인 호군(護軍)의 관직을 내려주었다. 이때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황희가 “김인이라는 자가 평양의 관노였으나 날래고 용맹하여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신 적이 있으니, 유독 장영실만 안 된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자 세종은 장영실에게 호군이라는 관직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실용주의적 사상가 문인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다. 경상도에서 태어나 본관은 밀양이고 이색(李穡)ㆍ권근(權近)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네 살에 고시의 대구(對句)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 생애 ∙1382년(우왕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는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385년 문과에 급제, 전교주부(典校注簿)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 ∙1392년 조선 건국과 더불어 천우위중령중랑장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의학교수관을 거쳤다. ∙1396년(태조 4)에는 교서감승(校書監丞)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태종 초에는 성균관학정, 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문과 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고, 그 뒤 예문관제학ㆍ춘추관동지사 겸 내섬시판사ㆍ경연동지사 등을 거쳐, ∙1415년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이 되었다. 이때 가뭄이 심해 상왕 태종이 크게 근심하자, 하늘에 제사하는 것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과 동ㆍ서양의 마음 읽기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앞선 연재에서 하경복을 두고 세종이 대하는 마음을 엿보았다. 이에 세종의 ‘마음’에 대한 생각에 이어 ‘마음’에 대한 동ㆍ서양의 논리를 살피고 가보자. 먼저 간단히 ‘세종의 마음’ 그 가운데 ‘의지’에 대한 마음 한 구절을 보고 이어가자. 용심력 : 함길도 경력(經歷, 도평의사사 소속인 경력사의 으뜸 벼슬) 이사철(李思哲)이 하직하니, 불러 보고 말하기를 ‘나의 족속(族屬)은 모두 학문을 모르므로, 네가 학문에 힘쓰는 것을 깊이 아름답게 여겨 내가 오래도록 집현전(集賢殿)에 두고자 하였으나, 너는 시종(侍從)한 지가 오래되어 나의 지극한 마음을 아는 까닭에, 특별히 너를 보내어 그 임무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니, 너는 가서 게을리하지 말라’ 하니, 사철이 아뢰기를, ‘소신이 본디부터 사물(事物)에 정통하지 못 하와 잘못 그르칠까 두렵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자질(姿質)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노니 하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마음과 힘을 다한다면 무슨 일인들 능히 하지 못하리오, 하고, 이어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세종실록》 22/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앞쪽 연재에서 하경복을 두고 세종이 대하는 마음을 엿보았다. 하경복이 북방 변경에서 침범을 노리는 이방인들과 마주하고 있을 때 세종은 늘 북방이 마음에 걸린다. 첫째는 국경과 주민에 대한 불안이오, 둘째는 국경을 지키는 장수에 대한 걱정이다. 장수에 대하여는 그들의 노고도 걱정이지만 그들이 국방을 지킬 때 후방에 있는 집안에 걱정거리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신하의 마음을 읽어내는 마음가짐이다. 이런 마음의 세계를 가) 세종이 보는 마음 그리고 나) 동양, 서양에서 보는 마음을 나누어 들여다 보자. 세종의 마음에 대한 생각 경연에 나아갔다. 동지경연 이지강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의 학문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근본이 되옵나니, 마음이 바른 연후에야 백관이 바르게 되고, 백관이 바른 연후에야 만민이 바르게 되옵는데,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지는 오로지 이 책에 있사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나 경서를 글귀로만 풀이하는 것은 학문에 도움이 없으니, 반드시 마음의 공부가 있어야만 이에 유익할 것이다." 하였다. (《세종실록》 즉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전회에서는 하경복(河敬復)을 다루었다. 이어 하경복에 대한 세종의 마음을 알아보기 이전에 지난 7월 4일 국회의원 회관 대회의실에서 ‘세종정신 되살리기 대토론회’가 있어 시의에 맞추어 그 내용을 알아보자. 이번 토론회는 ‘세종대왕 나신 곳 복원과 기념관 건립’이라는 주제로 종로구 최재형국회의원실과 (사)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사)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함께 주관했다. 지난 3월 9일 청와대 개방을 맞이하여 그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세종대왕 나신 곳은 현재 통인동 길거리에 표지석 하나밖에 없어서 그 필요성은 여러 번 강조된 바 있었으나 이번 청와대 개방이 당위성을 안겨주고 있다. 그리고 기념관은 현재 홍릉에 기념사업회 건물이 있으나 출판물 등의 사업을 하고 있어 실제 기념관 취지와는 다르다. 이날 회의에서 제기되었던 내용을 요약해 보자. 준수방을 복원하자 한글문화협회의 리대로 대표는 ‘세종정신과 한글을 빛내는 길’ 발표에서 우리나라가 일어난 밑바탕에는 쉬운 우리말글로 국민과 정부가 한마음이 되게 한 세종 정신과 한글이 있다고 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한글 단체의 소리를 듣고 정책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하경복(1377~1438)을 통해 세종의 마음을 읽고 있다. 곧 상대가 절실히 걱정하는 마음을 함께 나누는 세종을 만나게 된다. 하경복과 그 형제가 걱정하는 바[마음]를 세종은 평소에 함께 나눈 것이다. 세종은 참된 신하를 얻기 위해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대목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임금으로서 통상적으로 해야 할 수준을 넘어 마음을 담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행동들을 수행하고 있다. 일찍이 북방의 국경을 방비할 장군으로 점찍은 하경복에 대해서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장기간 근무를 시킨다. ∙ 세종 4년 5월 10일 : 태종이 승하한 뒤 세종 4년 윤12월 26일 하경복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보낸다. 이후 여진족과의 교류며 관리를 맡기게 된다. ∙ 세종 5년 12월 11일 : 하경복으로 우군 도총제를 삼는다. 세종 17년 내직으로 들어올 때까지 북방에서 일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세종은 하경복에게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보낸다. 세종의 편지 세종 6년 11월 29일: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에게 더 머물기를 바라는 유서를 보내다) 내시 한홍(韓弘)을 보내어 유서(諭書, 관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이번 하경복(1377~1438)을 통해 세종의 마음을 읽는 경우다. 곧 상대가 절실히 걱정하는 마음을 함께 나누는 세종을 만나게 된다. 하경복과 그 형제들이 걱정하는 바[마음]를 세종은 평소에 함께 나눈 것이다. 하경복의 본관은 진주이며, 임오년 태종 2년 1402에 무거(武擧) 급제하여 여러 차례 벼슬을 옮겨 상호군(上護軍)에 이르고, 경인년 태종 10년(1410)에 다시 중시무거(重試武擧, 10년에 한 번 보던 무과 과거시험)에 합격 첨총제(僉摠制, 무과 정3품 벼슬)에 발탁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경원진(慶源鎭)으로 나갔다. 태종 14년(1414)에 동지총제로 승진, 이어 함길도 도절제사로 나갔다. 초기 하경복은 천성이 호탕한데 태종 10년 길주로 발령이 난다. 그동안은 한양에서 잘 지내고 있다가 4군 6진이 있는 한반도 최북단이며, 최전방 동북면에 발령이 난 것이다. 하지만 길주 발령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때부터 하경복의 최일선 인생이 시작되는데, 길주로 갔다가 경원으로 갔다가 한반도 맨 위 경성으로 발령이 난다. 그러다 아예 함길도병마절제사에 임명된다. 최전방 두메 전역을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김돈(1385-우왕11~1440-세종22)은 세종시대의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과학자다. 세종을 보필한 인물로는 행정의 달인 영의정 황희. 정계의 음유시인 맹사성, 예조 판서 유관, 병조판서 조말생 그리고 국방의 김종서, 학문의 주춧돌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 당대의 개성 넘치는 석학들이 있었다. 이런 석학들 속에 여러 분야에서 말하자면 만능선수로 세종을 보좌한 인물로 김돈이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태종 17년(1417) :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참판ㆍ좌승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1418년 8월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1년 전에 실시했던 식년시에서 김돈이 급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세종은 김돈을 불러 ‘내가 경을 보고자 했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제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라고 반가워하며 김돈을 집현전 박사에 중용하고 이후 성균관 사성, 종학박사 등에 제수하였다. 충녕대군 시절 어릴 적부터 김돈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기다렸는데 김돈이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의 정치 상황과 관계가 있을 때 권력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세종 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