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밥사발"이라는 말은 요즘은 잘 쓰지 않고 ‘밥공기’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흔히 쓰던 말입니다. “저녁을 물리자 주모는 텁텁한 밑술을 두 사발이나 떠 들여 넣어 주었다 - 《문순태, 타오르는 강》, 팔기는 손수 쑨, 제법 쌀알이 보기 좋게 깔린 감자 죽사발을 아내의 머리맡에 들여놓는다. - 《김춘복, 쌈짓골》”에서처럼 술을 담으면 술 사발이요, 죽을 담으면 죽사발로 썼지만 이제 일상에서 사발은 보기 어렵습니다. ▲ 풍신수길이 가져간 것으로 천하으뜸 찻잔이라는 막사발 사발(沙鉢)은 무늬가 없는 백자(白磁) 사발이 많았는데 백자란 고령토로 그릇을 만든 뒤 투명한 잿물을 씌워서 1300℃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순백의 투명한 자기를 일컫습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보면 "세종 때 어기(御器, 임금이 쓰는 그릇)는 백자를 전용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일반인들도 백자 사발을 즐겨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세조 때는 백자 사용을 금지하게 되지요. 그 뒤 광해군 8년(1616)부터 일반 사대부에 한정하여 백자 사용이 허용됩니다. 하지만, 일반인의 조선백자에 대한 요구는 대단히 높아서 암암리에 널리 사용되고 있
[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김리박 시인의 일본 생활은 올해로 무려 72년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릴 때 배운 우리말글을 많이 잊었거나 서투를 것인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한국인보다 더 정확한 언어를 구사할 뿐 아니라 시조까지 짓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고 개인적으로도 존경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을 통해 면면히 흐르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품지 못한 애국적이며 지사적인 비범한 창작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한글학회 김종택 전 회장의 말입니다. 김리박 시인은 우리문화신문에 매주 월요일마다 토박이말 시조를 써주시는 시조시인으로 지금 일본 교토에 살고 계십니다. 김리박 시인은 그동안 신문에 연재한 시조와 전에 써둔 시조를 모아 《울 핏줄은 진달래》라는 시조집을 펴내기 위해 막바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시인도 많지만 김리박 시인의 존재감이 뚜렷한 것은 순수 토박이말로 시를 쓴다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한국인 보다 더 살가운 한국말글을 살려 쓰는 그 노력을 아는 분들은 모두 고개를 숙일 정도입니다. “울핏줄은 진달래요 벚꽃은 아니라고 아들딸을 사랑담아 가르치고 키우셨고 남땅서 눈감으셨건만 죽살이는 참이었네“ - 넷
[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이는 만주의 호랑이로 불리는 김동삼 선생이 마지막 남긴 말입니다. 선생은 1878년 6월 23일, 바로 오늘 안동의 내앞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앞마을(川前)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사에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한 곳으로 무려 한 마을에서 20명이 넘는 인물이 독립유공자로 포상 받은바 있으며 1910년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사람이 150명에 이를 정도로 독립운동의 산실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고장입니다. 김동삼 선생은 1907년 안동에 신식학교인 협동학교를 세워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도 가입하여 활동하는 등 경북과 경남 전체의 계몽운동가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통해 민족정신 함양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다가 1910년 8월 국치일을 맞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지요. 선생은 1911년 1월에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하여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독립운동단체
별주부 기가막혀 "여보 토공! 여보 토공 간 좀 빨리 가지고 오시오" 가든 토끼 돌아다보며 욕을 한번 퍼붓는디 "제기를 붙고 발기를 갈 녀석 뱃속에 달린 간을 어찌 내어드린단 말이냐" 위는 판소리 수궁가 가운데 입니다. 여기에 토끼한테 당하는 별주부가 바로 자라지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분청사기박지모란문철채자라병(粉靑沙器剝地牡丹文鐵彩甁)”은 자라 모양의 낮고 넓적한 몸체와 위로 솟은 주둥이를 갖춘 병입니다. 주로 나들이 할 때 술이나 물을 담아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지요. 납작하다고 하여 편병(扁甁)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병은 전체를 백토로 두껍게 바르고, 윗면에는 모란꽃과 잎을 새겨 넣었지요. 그리고 무늬가 새겨진 곳 이외의 백토면을 깎아낸 뒤, 검은 색 물감을 칠한 “박지기법”을 썼는데, 분청사기 무늬 가운데 조형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합니다. 이 자라병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분청사기로 실용성과 휴대성은 물론 예술적 아름다움까지 갖추었습니다. 자라병은 주둥이에 줄을 감아서 허리에 차거나 동물의 등에 묶어 가지고 다니기 쉽도록 했는데 중국이나 일본 같은 곳에서는 찾
어렸을 적 밤이면 마을 사람들은 애나 어른이나 가릴 것 없이 라디오가 있는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곤 그 조그만 라디오를 통해 나오는 연속극을 들었습니다. “아니 저 쬐그만 기계 속에 무슨 사람들이 저리 많다냐?” 처음 라디오란 것을 보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사람 소리를 들으셨던 할머니의 당연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다 크기가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나오면서 라디오는 부자들만의 차지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가질 수 있었지요. 그 라디오 뒤에는 라디오보다 덩치가 더 큰 9볼트짜리 건전지가 붙었고, 라디오를 애지중지 끼고 살던 청소년들은 이어폰도 없는 라디오를 밤중에 들으려고 이불을 뒤집어쓰기 일쑤였죠. 그리곤 팝송을 신청하려고 꽤나 엽서를 사서 방송국으로 본내곤 했습니다. 지금처럼 오디오가 보편화도지 못했던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지요. 그러다 텔레비전이 나오면서 라디오의 인기는 예전만 못한데 그래도 아직 옛날의 추억에 사로잡혀 여전히 라디오에 머물고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은 텔레비전도 한 집에 두서너 대가 있는 집도 있
“예전 선비들이 아끼고 썼던 문방도구로는 붓, 벼루, 먹과 함께 연적, 필가(筆架, 붓걸이), 벼루, 필세(筆洗, 붓을 빨 때 쓰는 그릇) 같은 것들이 있지만 남아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연적(硯滴)은 벼루에 먹을 갈 때 쓸 물을 담아두는 그릇입니다. 연적은 물이 들어가는 부위와 물이 나오는 구멍이 따로 있으며, 고려 때는 주로 청자로 만들었지만 조선시대에 오면 백자로 만들었지요. 연적은 여러 가지 모양새가 있는데 12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청자 여자아이모양 연적”도 있습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안정된 삼각형 구도 속에 적당한 생략을 통해 어린아이의 넘치는 생동감을 잘 표현하고 있지요. 복스러운 둥근 얼굴에 적당히 살이 올라 부드럽다고 느껴지는 곡선은 아름답습니다. 얼굴의 눈, 코, 입 등은 섬세하게 표현했으며, 눈동자에는 흑갈색 물감으로 점을 찍어 생동감을 불어넣었지요. 입고 있는 옷에는 당초무늬와 꽃·구름무늬가 세밀하게 음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연적은 아쉽게도 일본 오사카 시립동양도자기미술관에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16일부터 12월 16일까지
누가 작다고 깔보나요? 여기 작지만 정말 귀엽고 예쁜 들꽃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 햇살이 따뜻하게 퍼지는 봄날 땅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분홍색과 보라색 그리고 흰색으로 땅을 수놓는 꽃 노루귀입니다. 커봐야 겨우 15cm에 불과한 난장이 노루꽃.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름이 노루귀냐구요? 노루귀는 꽃이 지고 난 후 잎이 나오는데 그 잎이 마치 노루의 귀와 닮았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을 지었답니다. 꽃은 나무에 잎이 달리기 전인 3~4월에 피며 사라들은 노루귀 모두를 8~9월에 채취하여 큰 종기를 치료하는 데 쓰기도 하고, 봄에 어린잎을 따서 나물로 무쳐먹기도 합니다. 봄철에 사진작가들은 이러한 노루귀의 예쁜 모습을 찍으려고 들판과 계곡을 헤맵니다. 노루귀는 줄기에 나 있는 솜털같이 고운 털이 빛을 받을 때 역광으로 찍어야 아름다운 모습을 담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노루귀 모습은 뒤태가 더 예쁘다고도 합니다. 노루귀는 키가 작아 최대한 낮은 자세로 무릎을 굽히고 촬영을 해야 하는 봄의 아가씨. 그래서 조심하지 않으면 밟을 수도 있다는 앙증맞은 노루귀. 비슷한 꽃으로는 새끼노루귀, 섬노루귀도 있습니다. 들여다볼수록 그 아름다움이 솜털처럼 묻어나는 꽃 노루귀를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며칠 사이 꽃샘바람이 심술을 부렸지만 어김없이 온 나라는 꽃대궐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봄바람을 쏘이러 나들이를 하는 사람도 많아졌구요. 특히 이즈음 들에는 쑥을 캐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히로시마의 잿더미 속에서 가장 먼저 자란 식물일 정도로 약이 되는 먹거리입니다. 그 쑥으로 만든 쑥개떡, 쑥버무리, 쑥국은 우리가 즐겨 먹는 시절음식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애탕국이란 것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애탕국은 부드럽게 다져 양념한 소고기에 쑥을 잘 섞어 먹기 좋은 크기로 완자를 빚어 끓인 국입니다. 혹시 강한 쑥향 때문에 보통의 쑥국에 거부감이 있었던 사람이더라도 애탕국은 부담감 없이 즐길 수 있는 음식입니다. 애탕국은 글쓴이를 모르는 조선 후기의 요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 1917년 방신영(方信榮)이 쓴 《조선요리제법 朝鮮料理製法》(新文館 발행), 이용기(李用基)가 1924년 쓴 요리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7년 된 병을 3년 묵은 쑥을 먹고 고쳤다."
매주 목요일은 "그때를 아십니까"를 보내는 날입니다만 내일이 명절 한식이자 24절기 청명이어서 이에 대한 글로 대신합니다. 물론 다음주 목요일엔 "그때를 아십니까"를 다시 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청명 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치며, 임금은 이 불을 정승과 판서를 비롯한 문무백관 그리고 3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준다. 이를 ‘사화(賜火)’라 한다. 수령들은 한식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이라고 한다.” 위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청명조(淸明條)의 기록입니다. 또 ≪세종실록≫에 보면 세종임금의 물음에 정인지가 대답하기를 “옛 시에 이르기를, ‘푸른 연기 흩어져 오후 집으로 들어가네.’ 하였사오니, 이는 반드시 불을 내려주는 걸 기다려서 불을 썼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해 한식은 불을 통해 온 백성이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날임을 알려줍니다. 지금까지는 보통 한식이라고 하면 중국 진나라 때 개자추 충신 이야기만을 하는데 사실
“이근택아, 너는 대신이 되어 나라의 은혜를 크게 입었는데 나라가 위태로운데도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다행히 죽음을 면했다고 자랑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만도 못한 놈이다. 내가 비록 천한 사람이지만 어찌 개의 종이야 될 수 있겠느냐? 내 힘이 약해서 너를 두 동강이로 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나는 다시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 위는 조선 말기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근택(李根澤, 1865∼1919)의 여종이 이근택을 크게 꾸짖은 말입니다. 이 여종은 을사늑약에 끝까지 반대하다 파면되었던 한규설의 종이었는데 한규설의 딸이 이근택의 아들과 혼인할 때 따라간 교전비(轎前婢)였지요. 그런데 이근택이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와 을사늑약 체결과정을 이야기하며 “나는 다행히 죽음을 모면했다.”라며 자랑스럽게 말하자 부엌에 있던 여종이 이 말을 듣고 식칼을 들고 나와 호통을 쳤던 것이지요. 이런 내용은 조선 말기 황현(黃玹)이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까지 47년 동안을 기록한 책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옵니다.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상전을 꾸짖을 수 있는 기개를 이 시대의 우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