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2월 한 젊은이가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던 중 경찰의 장발족 일제단속에 걸렸다. 유신 독재시절이던 1971년 내무부는 퇴폐적 사회 풍조를 일소한다며 ‘풍속사범단속법안’을 마련해 처벌 대상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원 이상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경찰은 타인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장발족 단속에 나서 머리가 긴 남자를 검거해 머리를 짧게 깎은 뒤 훈방했다.” 위는 1975년 동아일보 기사의 한 꼭지입니다. 예전 군사정권 시절 젊은이들에겐 장발이 유행이었습니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 그리고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 모습은 어쩌면 갑갑한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를 군사정권이 놔둘 리가 없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퇴폐풍조를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장발 청년을 만나면 파출소로 끌고 가서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어버렸지요. 그래서 머리에 고속도로를 낸다는 말들을 했습니다. 바리캉은 이발기계로 프랑스의 바리캉 마르(Bariquand et Mare)라는 상표를 단 상품이 한국에 처음 들어왔기에 그게 마치 보통명사처럼 굳어진 것
오늘은 우리 겨레의 시조 단군임금이 나라를 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개천절입니다. 개천절은 맨 처음 고조선에서 “천제(天祭)”를 지냈고, 이후 부여의 영고(迎鼓), 예맥의 무천(舞天), 마한과 변한의 계음(契飮), 고구려의 동맹(東盟), 백제의 교천(郊天), 신라와 고려의 팔관회(八關會)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근현대에 오면 1909년 대종교가 “상달 상일‘을 10월 3일로 잡고 개천절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열리면서 국경일로 정했지요. 그런데 최근 개천절은 의미가 많이 퇴색되기에 이릅니다. 대통령이 참석하던 정부행사는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행사로 낮춰졌습니다. 특히 올해는 한가위 명절과 이어지는 황금연휴라면서 여행가기 바쁘고 심지어는 “일본 미야자키, 개천절에 골프치러 가볼까”라며 개천절을 짓밟는 신문기사 제목도 보입니다. 더욱이 해방 뒤 공식적으로 쓰이던 “단기” 연호는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뒤인 1962년 1월 1일부터는 모두가 서양 연호인 “서기”를 씁니다. 지금 일본은 더욱 자신들의 정체성 강화에 목을 매답니
낮에는 솟아나고 밤에는 간 데 없고 또 보낸 이 해의 무거운 보름이라 그날은 새치를 태워 쥐불놀이 하자쿠나
막걸리 한 잔에 사나이는 꿈을 품고 짝사랑 아가씨는 눈물을 짓느니 이 땅은 어느 누리냐 단 잠자린 어디냐 * 누리 : 세상 * 단 잠자리 : 편안한 잠자리 광복 전에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오시기까지 선친은 소작농이었다. 선친은 살아 계실 때 늘 고향이야기를 들려 주셨는데 선비가 빚어 준 막걸리를 드시어 취하시면 눈물로 고향 이야기를 토로하셨고 선비도 함께 우시었다.
판중추부사 구사맹 등은 “우리나라가 나라를 세운 때부터 기로소(耆老所)를 만들어 특별히 노비나 고기잡는 기구 같은 물품을 하사한 것은, 대체로 나이 많은 재상들로 하여금 해마다 잔치를 하여 남은 삶을 즐길 수 있게 하려 한 것이니, 진실로 2백 년 이래 전해오는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병란 이후로는 오래도록 폐지하여 시행하지 못했습니다.”라며 다시 시행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선조는 “매우 좋은 일이다. 기로소 잔치에 가장 좋은 술을 내려주라.”며 기뻐했습니다. 선조실록 36년(1603) 5월 10일에 나오는 내용이지요. 기로소(耆老所)는 조선시대 나이든 높은 벼슬아치들의 친목과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로 나이 70살이 넘은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 전직·현직 문관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임금은 나이에 제한이 없어 숙종은 59살에, 영조와 고종은 51살에 기로소에 들어갔지요.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여기에 들어간 사람은 7백여 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사람은 98살의 윤경(尹絅), 97살의 이구원(李久遠), 96살의 민형남(閔馨男)이
일제강점기인 1936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향토오락≫이란 책을 펴냅니다. 하지만, 일제는 이후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조선의 민속놀이를 금했으며, 조선어를 쓰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일제는 1941년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인 가 ≪조선어사전≫을 일부 인쇄하기 시작하자 학자들을 대거 잡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사건”입니다. 이때 홍원경찰서에서는 사전 편찬에 직접 가담했거나 재정적 보조 등 협력한 사람 33명에게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라는 것이 내란죄를 뒤집어씌운 이유였지요. 이후 기소유예 등으로 풀려난 사람을 빼고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되었던 16명 가운데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죽고, 두 사람이 석방 되었으며, 나머지 12명이 재판에 넘어갔습니다. 재판 결과 이극로 선생 징역 6년, 최현배 선생 징역 4년 등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 유죄가 선고되었지요. 몇 년 전 우리나라에 온 중국 연변대학교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인 한가위 세시풍속 가운데 재미있는 것으로 전남 진도의 “밭고랑기기”가 있습니다. “밭고랑기기”는 한가위 전날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나이대로 밭고랑을 깁니다. 이때에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고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그 아이는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밭농사도 잘된다고 믿었습니다. 또 “거북놀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수 잎을 따 거북이 등판 마냥 엮은 것을 등에 메고, 엉금엉금 기면서 거북이 흉내를 내는 놀이입니다. 이 거북이를 앞세우고 “동해 용왕의 아드님 거북이 행차시오!”라고 소리치며, 풍물패와 함께 집집이 방문하여 성주풀이를 합니다. 조왕(부엌)에 가면 “빈 솥에다 맹물 붓고 불만 때도 밥이 가득, 밥이 가득!” 마구간에 가서는 “새끼를 낳으면 열에 열 마리가 쑥쑥 빠지네!”하면서 비나리를 하지요. 이렇게 집집을 돌 때 주인은 곡식이나 돈을 형편껏 내놓는데 이렇게 거둔 것은 마을 공동기금으로 씁니다. 이밖에 한가위 세시풍속에는 전라도의 “올게심니(올벼심리)”, 경상도의‘풋바심’이 있으며, 강강술래,
며칠 뒤면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한가위가 아니라 추석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가 하면 중추절, 가위, 가윗날, 가배절, 가붓날이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말밑(어원)은 무엇이며, 어떤 말을 쓰는 게 바람직할까요? 먼저 중국에서는 가을을 셋으로 나눠 음력 7월을 맹추(孟秋), 8월을 중추(仲秋), 9월을 계추(季秋)라고 불렀는데 그에 따라 8월 보름을 중추라 한 것입니다. 이 말 말고도 추석이라는 말이 있는데 추석은 5세기 송나라 학자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의 “추석월(秋夕月)”이란 말에서 유래합니다. 여기서 “추석월”의 뜻은 천자가 가을 저녁에 달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뜻이었으나 중국 사람들은 이 말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한가위”는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8월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또 '가위'라는 말은 신라에서 유래한 것인데 다음과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 유리왕 9년에 나라 안 부녀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음력 7월 열엿새 날
백제시대에도 요강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물론 “호자(虎子)”라고 불렀지만 이것이 바로 휴대용 소변기 곧 요강이었지요. 그런데 이 호자의 모양이 좀 우스꽝스럽게 생겼는데 호랑이가 앉아서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중국 고대의 기록인 ≪예창사지≫에 따르면 '신선이 호랑이의 입을 벌리게 하여 오줌을 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서경잡기≫라는 책에도 중국 한나라 시절 '시종들이 호랑이 모양의 그릇을 들고 다녔으며 그 곳에 황제가 오줌을 눴다.'라는 기록이 전해와 이는 분명히 요강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백제와 중국의 호자를 견주어 보면 똑같은 호랑이 모양의 요강이이지만 그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먼저 국립중앙박물관의 청자호자는 중국 서진 말에서 동진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호랑이가 위쪽을 바라보고 네 무릎을 꿇어 엎드려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에 견주어 부여 군소리에서 출토된 백제호자는 윗몸을 약간 일으킨 채 고개를 왼쪽으로 조금 돌린 모습입니다. 그리고 청자호자에서 보이는 윗부분의 호랑이 얼굴과 몸통 옆의 날개 모양의 무늬가 없이 단
19세기 초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를 여행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홍어장수 문순득(文淳得1777~1847)이 바로 그 주인공으로 그는 1801년 12월 그의 작은아버지와 마을사람 6명과 함께 흑산도 남쪽 섬으로 홍어를 사러 갔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한 까닭에 뜻하지 않게 아시아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가 3년이 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아시아 체험기는 우이도(牛耳島, 지금 소흑산도)에 유배되어 머물던 정약전(丁若銓)이 대필(代筆)한 ≪표해시말(漂海始末)≫에 전합니다. 이 책은 중국, 안남(베트남), 유구(오키나와), 여송(필리핀) 등의 언어와 풍속을 소개하고 있어 해양문학 자료로서 가치가 있지요. 특히 부록에는 112개의 오키나와말과 필리핀말을 적어 두어 귀중한 언어학 연구자료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더 큰 값어치는 말도 통하지 않던 낯선 곳에 표류되었음에도 절망하지 않고 그곳의 말을 적극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