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6월이면 부여에서 내포제 시조창 강습회가 열리고 있다. 때를 맞추어 문화재 보유자인 김연소 명창의 개인 발표회도 열리고 해서 시조를 좋아하는 전국의 애호가들이 부여로 발걸음을 하게 될 것이다. 내포제 시조란 내포지방, 즉 충청남도 서해 바닷가와 인접해 있는 홍성, 당진, 서산, 서천, 보령, 부여, 청양, 연기, 논산, 예산 지역에서 부르고 있는 3장 형식의 간결한 노래선율을 말한다. 충청남도에서는 일찍이 이 내포제 시조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그 보존과 계승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초대 보유자는 고 소동규 명인, 2대 보유자는 고 김원실 명인, 그리고 현 보유자는 김연소 명인이다. 충남의 시조인들은《충남통합시우회》를 조직하고 보유자를 중심으로 내포제시조의 확산과 보급을 위해 해마다 시조 강습회를 열기도 하고, 가을에는 전국적인 시조창대회를 열기도 한다. 그 중심에 김연소 명인을 포함한 이규환, 김영숙 등과 같은 열성있는 시조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충청 지역에 내포제시조가 전해오는 것처럼 경상도 지역에는 영제시조가 있고 전라도 지방에는 완제시조
그 뉘가 모르느냐 봄이 오면 뜨는 맘을 풀나무 꽃 피우고 짐승도 암컷 찾고 깊은 밤 터진 몸더위 꿈결을 가고 간다. * 날짐승 암굼 : 새의 흘레붙음(교미) * 몸더위 : 몸의 온도 봄은 모든 생물이 자손을 남기려고 교미를 하는데 사람은 사람답게 살려고 사랑을 하고 꿈을 꾼다. 일본 땅에서는 지난날과는 달리 이른바 국제결혼이 많아졌다. 슬픈 일인지 기뻐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바지저고리, 배자와 두루마기 같은 한복을 입었음을 잘 압니다. 그런데 신은 무얼 신었을까요? 물론 백성이야 짚신을 신었지만 양반들은 가죽으로 지은 갖신을 신었습니다. 그 갖신으로는 태사혜, 당혜, 운혜, 흑혜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먼저 태사혜(太史鞋)는 코와 뒤에 태사라 하는 흰 줄무늬를 새긴 남자용 신입니다. 흔히 사대부나 양반계급의 나이 많은 사람이 평상시에 신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종이 신었다는 태사혜 한 켤레가 있지요. 조선 말기에 와서는 임금도 웅피혜(熊皮鞋, 곰가죽 신)나 녹피혜(鹿皮鞋, 사슴가죽 신) 아닌 태사혜를 신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무백관들이 조정에 나갈 때는 검정 가죽으로 지은 흑피혜(黑皮鞋)를 신었지요. 또 당혜(唐鞋)는 조선시대 부녀자가 신던 갖신을 이릅니다. 코와 뒤꿈치에 당초문(唐草文)을 놓아 만든 마른 신으로, 안은 융 같은 푹신한 감으로 하고 거죽은 가죽을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지요. 이밖에 부녀자들은 구름무늬가 수놓아진 운혜(雲醯)도 신었습니다. 요즘 어떤 이들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습니
천연기념물 제216호 “사향노루”를 아시나요? 특히 사향노루 가운데 수컷에는 특이하게 배꼽과 생식기 사이에 사향샘이 있는 사향주머니(일명 사향낭)가 있습니다. 사향노루는 발정기가 되면 이 수컷의 사향샘이 아주 발달하면서 사향을 풍겨 암컷을 유인합니다. 문제는 이 사향노루의 수컷이 품어내는 사향이 결국 제 목숨을 잃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부터 궁중의 왕족들이 성생활에 쓰려고 찾는 향은 고양이 암컷 음문에서 채취한 영묘향(靈猫香), 큰머리고래에서 채취한 용연향(龍涎香)과 함께 이 사향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양이 많은 용연향과 약효가 떨어지는 영묘향에 견주어 사향을 최고의 향으로 쳤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 사향을 찾으려고 몸부림을 쳤고 그 때문에 사향노루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하지요. 더더구나 사람이 사향노루를 잡으려 할 때는 향낭 때문에 잡힌다는 걸 알고, 향낭을 저주하며, 수없이 물어뜯어 사람이 다가가면 향낭은 터지고 사향노루는 이미 죽어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 사향노루 근처에는 슬픈 향기가 진동한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백두산에서
너의 아름다움에 반해 뭇 벌들이 날아든다고 너의 웃음을 함부로 팔지 마라 너의 희고 고운 마음을 사려고 꿀 몇 방울 쏟아내는 벌에 결코 마음을 주지 마라 너는 네 향기로 이미 꽃을 피웠나니 - 한소정 "쉬땅나무"- 마음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꽃이 피는 “쉬땅나무”를 아시나요? 쉬땅나무는 지난해 국립수목원이 7월의 나무로 뽑았는데 여름철 장마에 지친 이들에게 환한 웃음을 선사합니다. 특히 눈부신 흰색 꽃무더기는 멀리서 보면 마치 수수밭에 흰색 꽃이 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쉬땅나무라 부르고, 개쉬땅나무 또는 밥쉬나무, 진주매라고도 하지요. “쉬땅”은 수수깡(수숫대)의 평안도 사투리입니다. 또 이 나무는 중부 이북의 해발 1,000~2,200m의 계곡과 산기슭에 자라는 키 2m 정도의 나무로 6~8월에 꽃이 피지요. 쉬땅나무는 건조하고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꽃입니다. 이른 봄에 어린싹은 나물로 먹을 수 있으며 꽃에는 많은 꿀이 있고, 구충제로 쓰이거나 습진, 이뇨, 저혈압, 요통 같은 병에 약재로 쓰입니다. 쉬땅나무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기도 하지만, 나
지난주까지 벽파가 어떤 분인가 하는 점을 정리하면서 벽파는 민속음악, 그중에서도 경서도 민요를 소리로 지켜온 명창이었다는 점을 피력하였고, 둘째로 선생은 학문을 즐겨 한 학자였다는 점을 말했고, 셋째로는 앞서가는 국악교육자였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으로, 벽파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선생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많은 분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온 대 사범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름난 명인 명창 중에는 스스로 자기의 음악성을 자랑하거나 목자랑, 소리자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위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지요. 오호의 결과나 평가는 듣는 사람들이 하는 법인데 스스로 자기 소리에 도취해 품위를 잃는 경우를 목격하게 됩니다. 같은 소리를 듣더라도 A가 부르면 천박해 보이고 B가 부르면 고상해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실기인이라 해서 소리만을 앞세워서는 훌륭한 음악인으로 대접받기 어렵다는 진리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예술인인가, 아니면 쟁이인가? 하는 점이 본인의 인격이나 교양과 직결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벽파 선생은 여타 명창과는 다른 품격을 지니고
“ 1955년 7월, 민요계의 거장 이창배는 인멸 위기에 있는 우리 고유의 가락들을 정확하게 보존전수하고자 <청구고전성악학원>을 개설하고, 일반인 및 정규 수강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동 학원에서는 일반 민요를 비롯하여 경기 및 서도의 입창 잡가 각 도의 속요들을 중심으로 교수하였고, 그 활동은 20여년 이상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민요 한 가락이라도 부른다는 사람들은 전문인이든 비전문인이든 간에 모두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동 학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에 이르고, 사사받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으며, 인간문화재급 국창들도 모두 이곳을 거쳤다. 개원 당시만 하더라도 민요계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부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고 식자층의 손이 닿지 못해 사설은 오류투성이로 전해질 뿐이었다. 어려운 고사나 한문구는 제 뜻을 바르게 새기지 못한 채 불러 왔기 때문에 사설 내용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된 발음이나 표현을 일삼는 예도 허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정 작업은 동 학원의 이창배 사범에 의해 하나 둘 정리되어 나
들메에 봄이 오면 부처님 오시고 그분이 오실 밤은 하늘땅이 밝고 밝아 아가씨 맑은 믿음에 고운 내음 내리시니. * 들메 : 들과 산 4월 초파일,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줄지어 밝혀진 초롱불에 감동한다. 우리 어머님은 어릴 때부터 불교를 맑게 믿으시었는데 일본에 ‘징용’ 당한 지아비를 좇아 건너오신 뒤에도 해마다 이날은 특별한 날로 여기시었다.
땀버캐 돋은살에 한여름 그립고 밤아침 더위를 좇아볼까 하느니만 여름은 멀고먼곳서 빙긋이 웃는구나 * 땀버캐 : 땀이 증발하여 살갗에 돋은 소금. 땀버캐 돋을 만큼 무더워 죽겠던 여름도 다 지나가 아침저녁이 선선해지면 그 여름이 어째선지 아쉽게 느껴진다. 사람도 미운 사람이 없어지면 시원섭섭한 느낌이 솟을 때가 있다 하는데 그런지도 모른다.
오늘은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소서(小暑)로 24절기의 11번째입니다. 예전엔 하지 전후에서 모내기를 끝냈지만 요즘은 소만 이전으로 당겨졌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심한 가뭄으로 모내기를 못하다가 며칠 전 온 비로 늦은 모심기를 하는 곳이 많습니다. 고종실록 34년(1897) 7월 2일(양력) 1번째 기사에는 장례원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가 “올봄에는 비 오고 햇볕 나는 것이 고르고 적절하였으나 요즘에 와서 줄곧 가뭄이 들어 말랐습니다. 소서(小暑)가 가까워 오고 있으나 한 번 큰 비가 오지 않은 관계로 이미 파종한 싹은 말라 죽게 되었으며 이앙(移秧)하지 못한 모는 시기를 놓치게 될 것이니 백성의 일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기 더할 나위 없습니다.”라면서 기우제를 지내자는 상소 글을 올립니다. 예전에도 소서에 모내기는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소서 모는 지나가는 행인도 달려든다.", "7월 늦모는 원님도 말에서 내려 심어주고 간다.", "소서가 넘으면 새 각시도 모심는다."라는 속담 따위가 남아 있습니다. 어서 도와 모를 심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정상적으로 심었다면 이때 쯤 피사리와 김매기를 하는 때입니다. 모가 자리를 잡을 때여서 피사리와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