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구름 사이로 학이 날아올랐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열 마리, 스무 마리, 백 마리……. 구름을 뚫고 옥빛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을 한다. 불교의 나라 고려가 꿈꾸던 하늘은 이렇게도 청초한 옥색이었단 말인가. 이 색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영원의 색이고 무아의 색이란 말인가. 세속 번뇌와 망상이 모두 사라진 서방정토(西方淨土)란 이렇게도 평화로운 곳인가.” 위는 《간송 전형필(이충열, 김영사)》에 나오는 글로 간송이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紋梅甁)”을 보고 중얼거렸다는 말입니다. 뒤에 국보로 지정된 이 매병은 원래 전문도굴꾼 야마모토가 강화도 한 고분을 도굴하여 고려청자 흥정꾼 스즈끼에게 1천 원에 팔아넘긴 뒤 마에다 손에 왔을 때는 2만 원으로 뻥 튀겨져 있던 것을 간송 전형필 선생은 흥정 한 번 없이 한 푼도 깎지 않고 샀습니다. 당시 2만 원은 기와집 스무 채 값이었지요. 간송은 이 귀한 매병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걸 걱정했기에 한푼도 깎지 않고 거금을 주고 샀던 것입니다. 높이 42.1㎝, 입지름 6.2㎝, 배지름 24.5㎝, 밑지름 17㎝의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간송문화재단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매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6월 23일 문화재청은 고려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을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지정했습니다. 국보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은 고려 후기의 유일한 금동약사불상이자 단아하고 정제된 당시 조각 경향을 잘 반영한 작품으로, 한국불교조각사 연구에 있어 중요하게 평가됐습니다. 이 불상은 고려 후기 불상조각 가운데 약사발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온화하고 자비로운 표정, 비례감이 알맞은 신체, 섬세한 옷 장식 표현 등 14세기 불상조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이때의 불상 가운데서도 뛰어난 예술적 조형성을 지닌 대표적인 작품으로 국보로 지정하기에 예술ㆍ역사ㆍ학술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발원문에는 1346년(고려 충목왕 2)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가 적혀 있어 고려 후기 불상의 기준 연대를 제시해주고 있지요. 가로 10미터가 조금 넘는 긴 발원문에는 1,117명에 달하는 시주자와 발원자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이는 고려 시대 단일 복장발원문으로서는 가장 많은 사람 이름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발원문을 지은 백운(白雲) 스님은 세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유월, 장미가 피면 - 임보선 해마다 6월이 오면 장미는 말없이 피고 있다 그날의 비극 장미 가시여! 우리 조국의 산하를 온통 찔러댄다 피보다 더 진한 젊음들이 비바람에 못다 핀 채 져 버린 장미 꽃잎처럼 뚝뚝 떨어져 가슴에 가슴에 흥건히 젖어 누워 있다 6월을 향한 절절한 향수 장미뿐이랴 찢겨진 내 혈육 장미보다 피보다 더 붉은 이 슬픔 이 분노 죽어도 삭이지 못하는데 장미는 올해도 말없이 피고 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의 날이 온다. 그때의 비극으로 남북한의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수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많은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또 공장과 같은 산업 시설과 학교, 주택, 도로, 다리 등이 파괴되어, 이후 몇 년 동안 남북한 모두 전쟁복구에 온 힘을 쏟아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430년 전에는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가 되고 수많은 백성이 끌려가고 죽어야만 했다. 그 비극이 또 지금 동유럽의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졌다. 우크라이나 인구 약 4,400만 명 가운데 약 700만 명이 우크라이나를 떠났다는 소식이다. 러시아의 무차별적 공격으로 우크라이나 영토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째인 하지(夏至)입니다. 이때 해는 황도상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 잡는데, 그 자리를 하지점(夏至點)이라 하지요. 한 해 가운데 해가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가장 길어서 북반구의 땅 위는 해로부터 가장 많은 열을 받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쌓인 열기 때문에 하지 이후로는 기온이 올라가 몹시 더워집니다. 또 이때는 가뭄이 심하게 들기도 하고, 곧 장마가 닥쳐오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일손이 매우 바쁩니다. 누에치기, 메밀 씨앗 뿌리기, 감자 거두기, 고추밭 매기, 마늘 거두고 말리기, 보리 수확과 타작, 모내기, 늦콩 심기, 병충해 방재 따위는 물론 부쩍부쩍 크는 풀 뽑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남부지방에서는 단오를 전후하여 시작된 모심기가 하지 무렵이면 모두 끝나는데, 예전엔 이모작을 하는 남부 지역에서는 하지 ‘전 삼일, 후 삼일’이라 하여 모심기의 알맞을 때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지가 지나면 오전에 심은 모와 오후에 심은 모가 다르다.”라는 속담도 있지요. 그런데 하지는 양기가 가장 성한 날이면서 이때부터 서서히 음기가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동지에 음기가 가장 높은 점이면서 서서히 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정조 개혁의 중심에 섰던 인물 번암 채제공의 초상을 보면 살짝곰보와 사팔뜨기 눈까지 숨기지 않고 그려 그가 못생긴 인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거의 “죽기살기”라고 할 만큼 정확하게 그리는 조선시대 초상화 사실주의의 극치 덕분입니다. 번암은 그렇게 못생겼지만 28살에 사관인 예문관 한림(翰林) 시험에 수석을 차지한 뒤 죽기 한 해 전인 77살 때까지 은거한 7년을 빼고는 이조좌랑, 시헌부 지평, 한성판윤 등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정말 큰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오랫동안 신임을 얻고 크게 탄핵을 받지 않은 까닭은 대부분 벼슬아치처럼 아부를 잘하거나 뇌물 공세 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청백리에 꼽힐 만큼 청렴했고, 사도세자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했을 만큼 올곧은 인물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임금이 세손 정조에게 “참으로 채제공은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자 너의 충신”이라고 말했을까요? 그는 특히 정조가 야심 차게 추진한 화성(華城) 성역 공사에서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묘)의 공사를 총괄하는 총리사(摠理使)와 함께 수원 유수(留守)ㆍ장용외사(壯勇外使)ㆍ행궁 정리사(行宮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바늘 - 황여정 입에 발린 말 가식을 빼고 나니 너무 깡말라 여유가 없구먼 그래도 올곧기는 제일이라 콕 찌르듯 한 땀이 지나간 자리 툭 터진 곳도 스윽 봉합이 되고, 조각조각 맞추니 포근하게 감싸주는 이불도 되고 치마저고리 바지 적삼까지 또박또박 지어내는 일침의 미덕 뒤끝, 참 깔끔하다.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 너는 미묘한 품질과 특별한 재치를 가졌으니, 물중(物中)의 명물(名物)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萬古)의 충절(忠節)이라. 추호(秋毫)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두렷한 귀는 소리를 듣는 듯한지라. 능라(綾羅)와 비단(緋緞)에 난봉(鸞鳳)과 공작(孔雀)을 수놓을 제, 그 민첩하고 신기(神奇)함은 귀신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人力)이 미칠 바리요.” 위는 조선 순조 때 유씨(兪氏) 부인이 지은 수필 <조침문(弔針文)>에 나오는 바늘 부분 일부다. 겨울에는 솜을 두둑이 대고 누비옷을 만들어 자식들이 추위에 떨지 않게 해주시고 겨우내 식구들이 덮을 이부자리를 손보느라 가을철이 되면 낮에는 밭에 나가 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늦은 밤까지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하시던 모습을 이제는 구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옥황상제가 금강산의 경치를 돌아보고 구룡연 기슭에 이르렀을 때, 구룡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고는 관(冠)을 벗어 놓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때 금강산을 지키는 산신령이 나타나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물에서 목욕하는 것은 큰 죄다.’라고 말하고 옥황상제의 관을 가지고 사라졌다. 관을 빼앗긴 옥황상제는 세존봉 중턱에 맨머리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 이는 금강산에 전해지는 설화입니다. 얼마나 금강산이 절경이었으면 옥황상제마저 홀릴 정도였을까요? 그런데 그 금강산을 그림으로 가장 잘 그린 이는 겸재 정선이었습니다. 겸재의 그림 가운데는 금강산을 멀리서 한 폭에 다 넣고 그린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금강전도(金剛全圖)>가 있으며, 금강산으로 가는 고개 단발령에서 겨울 금강산을 바라보고 그린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도 있지요. 여기서 ‘단발(斷髮)’이라는 것은 머리를 깎는다는 뜻인데, 이 고개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금강산의 모습에 반해 그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서울옥션에서는 겸재가 그린 또 다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새집에 가서 잠이나 잘 잤느냐. 병풍을 보내니 몸조리 잘하고 밥에 나물을 넣어 먹어라. 섭섭 무료하기 가이없어 하노라.” 이는 현종임금이 사랑하는 고명딸 명안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입니다. 조선시대는 대부분 공식 문자 생활이 한문으로 이루어졌음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당시에는 언문(한글)이 푸대접받았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궁궐 안 대비,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는 물론 임금까지 언문을 썼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많습니다. 특히 현종에게는 외아들 숙종과 명선ㆍ명혜ㆍ명안의 세 공주가 있었는데 명선ㆍ명혜 공주가 일찍 죽는 바람에 아버지 현종과 어머니 명성왕후(비슷한 이름으로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와 다름)는 유달리 명안공주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즉위 직후부터 예론 논쟁에 휩싸여 34살의 나이로 승하할 때까지 재위 15년 동안 정쟁으로 보내야 했던 현종은 시름 속의 나날 속에서도 명안공주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고 이에 한글편지로 자신의 사랑을 담아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몹시 슬프고 애통스러워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예장(禮葬) 이외에 비단과 쌀ㆍ무명 등의 물건을 숙정공주의 예대로 시급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산행 (山行) - 박지원(朴趾源) 叱牛聲出白雲邊(질우성출백운변) 이랴 저랴 소몰이 소리 흰 구름 속에 들리고 危嶂鱗塍翠揷天(위장린승취삽천) 하늘 찌른 푸른 봉우리엔 비늘 같은 밭골 즐비하네 牛女何須烏鵲渡(우녀하수오작도) 견우직녀 왜 구태여 까막까치 기다리나? 銀河西畔月如船(은하서반월여선) 은하수 서쪽 가에 걸린 달이 배와 같은데 이 시는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산행(山行)>이라는 한시로 지은이가 산길을 가면서 아름다운 정경을 동화처럼 노래한 것이다. 연암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로 청나라 고종의 칠순연에 사신단의 한 사람으로 따라가 열하(熱河, 청나라 황제의 별궁)의 문인들, 연경(燕京, 북경의 옛 이름)의 명사들과 사귀며 그곳 문물제도를 보고 배운 것을 기록한 여행기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썼다. 정조 등극한 지 5년째 되는 해인 1780년 5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장장 5달 동안 사신단은 애초 목적지인 청나라 서울 연경(북경)까지 2,300여 리를 한여름 무더위와 폭우 뒤 무섭게 흐르는 강물과 싸우며 가고 또 간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연경에 황제는 없다. 그래서 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는 학교에서 《해동가요(海東歌謠)》ㆍ《가곡원류(歌曲源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시조집의 하나로 《청구영언(靑丘永言)》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 《청구영언》이 지난 4월 26일 보물로 지정되었지요. 《청구영언》은 조선 후기까지 구비 전승된 모두 580수의 노랫말을 수록한 우리나라 첫 노래집(歌集, 시조집)으로, 청구(靑丘)는 우리나라, 영언(永言)은 노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청구영언》은 조선 후기 시인 김천택(金天澤)이 1728년 쓰고 펴낸 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그의 친필인지는 비교자료가 없어 단정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청구영언》은 조선인들이 선호했던 곡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틀을 짜고, 작가가 분명한 작품은 작가별로, 작자미상의 작품은 주제별로 분류한 체계적인 구성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작가는 신분에 따라 구분해 시대순으로 수록하였지요. 이러한 《청구영언》의 체제는 이후 가곡집 편찬의 기준이 되어 약 200종에 이르기까지 지속해서 펴낼 정도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매우 지대합니다. 《청구영언》은 우리나라 첫 노래집이자, 2010년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오른 ‘가곡(歌曲)’의 원천이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