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까치설날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소지왕 때 왕후가 한 스님과 내통하여 임금을 해치려 하였는데 까치(까마귀)와 쥐, 돼지와 용의 인도로 이를 모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쥐, 돼지, 용은 모두 ‘12지’에 드는 동물이라 기리는 날이 있지만, 까치를 기릴 날이 없어 설 바로 전날을 까치를 기리려고 까치설이라 했다고 하지요. 그런가 하면 옛날 섣달그믐을 작은설이라 하여 “아치설” 또는 “아찬설”이라 했는데 이 “아치”가 경기지방에서“까치”로 바뀌었다고도 합니다. 음력 22일 조금을 다도해 지방에서는 “아치조금”이라 하지만 경기만 지방에서는 “까치조금”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그믐 전날, 어린이 수십 명을 모아서 붉은 옷과 두건을 씌워 궁중에 들여보내면 그믐날 새벽에 관상감에서 북과 피리를 갖추고 방상씨(方相氏, 탈을 쓰고 잡귀를 쫓는 사람)와 함께 쫓아내는 놀이 곧 <나례(儺禮), 나희(儺戱)>를 했습니다. 또 그믐날 이른 새벽에 처용(處容), 각귀(角鬼), 수성노인(壽星老人), 닭, 호랑이 등과 같은 그림을 궁궐문과 집 문에 붙여, 잡귀를 쫓는다고 하는데, 이것을 문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담배는 병진년(1616)부터 일본에서 건너와 피우는 자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는데, 신유년(1621)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하면 번번이 차(茶)와 술을 담배로 대신하기 때문에 혹은 연다(煙茶)라고 하고 혹은 연주(煙酒)라고도 하였고, 심지어는 종자를 받아서 서로 거래까지 하였다. 오래 피운 자가 유해무익한 것을 알고 끊으려고 하여도 끝내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고 일컬었다” 위는 《인조실록》 16년(1638) 8월 4일 기록에 나온 담배 이야기입니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자신의 책 《임하필기(林下筆記)》의 “담배의 시말”이란 글에서도 담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글에서 이유원은 담배가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는 글을 끝맺으면서 “나 역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다. 지금 담배를 입에 물고 이 글을 쓰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담배를 비판하지만, 애연가임을 고백하고 있지요. 그 당시 담배는 돈을 버는 작물로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곡식을 심는 것보다 이문이 곱절이나 많이 생기기 때문에 좋은 경작지가 거지반 담배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마지막인 ‘대한(大寒)’이다. 소한이 지나 대한이 한 해 가운데 가장 춥다고 하지만 이는 중국 화북지방의 기준이어서 우리나라와 똑같지는 않고 오히려 소한 때가 더 추울 때가 많아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대한 다음에는 입춘이 기다리고 있기에 대한은 겨울을 매듭짓는 날로 보아 대한 기간의 마지막 날 곧 입춘 전날을 “절분(節分)”이라 하여 계절적인 섣달그믐날로 여겼다. 그래서 이날을 “해넘이”라 하여 콩을 방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새해를 맞는 풍습이 있고 절분 다음날은 정월절(正月節)인 입춘으로, 이날부터 새해로 보기도 한다. 제주도에서 이사하는 것은 물론 부엌ㆍ문ㆍ뒷간, 외양간 고치기, 집 뜯어고치기, 울타리ㆍ돌담고치기, 나무 베기, 묘소 고쳐 쌓기 등은 언제나 ‘신구간(新舊間)’에 한다. 신구간은 대한 뒤 5일에서 입춘 전 3일 사이를 말하는 것인데 이때 모든 신들이 염라대왕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여도 탈이 없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혹시 용이 읊조리는 소리 들어보셨나요? 용(龍)은 상상의 동물이어서 우리가 그 소리를 들어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국악 연주곡 중 <수룡음(水龍吟)>이란 음악은 그 이름에 “용이 읊조린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수룡음은 본래 가곡의 반주음악을 노래 없이 기악으로만 연주하는 음악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자진한잎’, ‘사관풍류’라고도 하지요. 가곡의 반주는 원래 대금, 세피리, 해금, 거문고, 가야금, 장구 따위로 하는데 특히 수룡음은 관악기 가운데서도 생황과 단소의 병주(생소병주)로 즐겨 연주합니다. 《태종실록》 2년(1402년) 6월 5일 자 기록에 보면 예조에서 궁중 의례 때 쓰는 음악 10곡을 올리는데 10곡을 고른 까닭을 다음 같이 말합니다. “신 등이 삼가 고전(古典)을 돌아보건대, ‘음(音)을 살펴서 악(樂)을 알고, 악(樂)을 살펴서 정사(政事)를 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악(樂)을 합하여 하늘의 신령과 땅의 신령에 이르게 하며 나라를 화합하게 한다.” 임금도 '악(樂)'을 알아야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열 곡 가운데 수룡음이 들어 있습니다. 수룡음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2022년 임인년은 호랑이해입니다. 원래 동아시아에서 호랑이는 영물이자 군자의 상징이었고,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이었기에 19세기 조선에서는 까치와 호랑이 그림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까치호랑이 그림은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부른다는 뜻이 담겨 집집이 이 그림을 붙이려고 했지요. 그래서 까치호랑이 그림은 민화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렸고, 그래서 민화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인식됩니다. 특히 ‘까치호랑이’ 그림은 ‘액막이와 기쁜 일’의 뜻하기에 정초에 액운을 막고 좋은 일만 생기라는 의미를 담아 집안에 붙여두는 ‘세화(歲畵)’ 곧 ‘새해맞이 그림’입니다. 그림에 덕담이 담겨 있어 연하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되지요. 이 세화는 처음에는 궁궐이나 사대부 집안에 붙이던 것이었는데 조선 말기 전문성을 가진 중인과 돈 많은 상공인, 일반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그런데 까치호랑이 그림에는 까치와 호랑이 그리고 소나무는 꼭 있어야 합니다. 이 가운데 호랑이 얼굴은 이빨을 드러낸 포악한 표정보다는 어리바리하여 바보 같거나,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모습들이 많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까치에게 골탕먹는 바보호랑이처럼 과장된 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셋째인 소한(小寒)으로 한겨울 추위 가운데 혹독하기로 소문난 날이다. 소한 무렵은 정초한파(正初寒波)라 불리는 강추위가 몰려오는 때인데, 이름으로만 봐서는 작은 추위라는 뜻이지만 실제 보름 뒤에 오는 대한보다 더 추울 때가 많다. 그래서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 “소한 추위는 꾸어다가도 한다.”,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 같은 속담이 있을 정도다. 엊그제 동지를 지낸 우리는 엄동설한을 견뎌야 한다. 지금이야 난방도 잘되는 집과 오리털 점퍼, 발열내의도 있지만, 예전엔 문풍지가 사납게 우는 방에서 오들오들 떠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엄동설한을 견뎠을까? 먼저 동지부터 입춘까지 물리적인 난방이 어려운 대신 한 가닥 꿈을 꾸면서 구구소한도를 그려나갔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에서 구구(九九)란 9×9=81, 곧 여든한 개의 매화 꽃송이로 소한(消寒) 곧 추위를 잊어서 삭여 내는 걸 말한다. 동짓날 창호지에 하얀 매화꽃 81송이를 그려 벽에 미리 붙여 놓고 매일 하루에 한 송이씩 차례대로 빨갛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해 11월 30일 문화재청은 조선 시대 왕실의 어린이 복식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전(傳) 영친왕 일가 어린이 옷(총 9건)’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했습니다. 이번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복식 유물은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시대 왕실의 어린이 옷 모두 9건으로 1998년에 당시 숙명여자대학교 김명자 교수가 기증한 것입니다. 김 교수는 1972년 아들의 돌을 축하하는 의미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로부터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의 옷을 선물 받았다고 합니다. ‘전(傳) 영친왕 일가 어린이 옷’은 사규삼과 창의, 두루마기, 저고리, 색동마고자, 풍차바지, 조끼, 버선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옷들은 일본에서 환수되어 2009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가운데 영친왕의 아들 이구(李玖, 1931~2005)의 복식 유물과 견줬을 때 소재, 단추, 무늬 등이 매우 비슷하다고 합니다. 특히, 이 옷 가운데 어린아이가 입기 쉽게 분홍색 사규삼 아래 녹색 창의를 받쳐 꿰매놓은 ‘사규삼 및 창의’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20년 7월 29일 동아ㆍ조선ㆍ매일 3개 신문은 일제히 호외를 내고 ‘밀양폭탄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 보도했습니다. 바로 이틀 전인 12월 27일 아침 9시 40분 무렵, 경남 밀양경찰서에 최수봉 열사가 폭탄을 던진 사건에 관한 기사입니다. 물론 이때 던진 두 발의 폭탄은 위력이 약하여 순사부장에게 타박상을 입혔을 뿐 큰 타격을 주지 못했지만, 이날 의거는 영남 일대의 항일 민심을 다시금 격동시켰고, 전투적 독립운동 진영을 고무시킨 것은 물론, 일제 경찰은 언제 또 그런 양상의 폭탄거사가 터질지 몰라 불안감에 떨게 한 큰 사건입니다. 최수봉 열사는 순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경찰서를 빠져나가 내달리다가 길가 한 집에서 칼을 가져다가 자기 목을 찔러 큰 상처가 난 채 실신하였지요. 이때 일본 순사들이 최수봉 열사를 병원에 옮겨 치료한 끝에 회생하였지만, 일제는 재판에 넘겨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대구복심법원에 상소되어 1921년 4월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자 이 판결은 불법이라며 열사는 변호사를 통해 경기고등법원에 상고하였지만 기각당하고, 7월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지요. 최수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