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교회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별 종교가 있으시던 분은 아니었지만, 그 시대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아무런 종교가 없으면 다들 <유교>라고 대답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10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종가인 우리 집안은, 뭐 대단한 인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요즘 말하는 근자감은 무진장 가지고 계신 어른들이 다수 계셨다. 그런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내가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묵인이 없었다면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기독교에 대해서 친화적인 생각을 가지신 이유는 아버지가 열 살 때부터 시작한 장사에 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내 아버지가 열 살이 되시던 해, 산에 가서 잔가지나 주워 와서는 집안 살림에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기셨던지, 내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떡이나 엿을 담아서 목에 걸고 판매를 할 수 있는 엿판을 만들어 주셨단다. 그 엿판을 목에 걸고 열 살 먹은 아이가 <신령역>에서 <경주역>까지 가는 기차에서 엿과 떡 등을 팔기 시작하셨단다. 때로는 상품성이 좀 떨어지는 사과를 아주 싸게 떼다가 팔기도 하셨는데, 그 장사는 무게만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의 살아남은 형제는 두 분이 더 있었다. 스물네 살에 딸 하나 남겨두고 죽은 고모를 빼고, 아버지 아래로 열한 살 어린 남동생과, 열여섯 살 어린 남동생 나이 차이로 봐선 그 사이에 몇 명의 동생이 더 있었을 듯하지만, 십 남매 중에 겨우 이 정도 남은 걸로 봐서는 이것도 당신에게는 큰 상처를 소환하는 일이겠다 싶어 자세하게 물어보진 않았다. 아버지 바로 아래 남동생은 아버지가 업어 키우셨다고 한다. 집에 거의 붙어있지 않는 할아버지와 그래도 남의 집 밭일이며 뭐라도 가지고 나가 시장에서 장사라도 하셔야 했던 할머니는, 애만 낳아놨지, 기르는 것에는 전혀 소질도 여력도 없으셨는지, 내 아버지가 갓난쟁이 어린 동생을 업고 일을 다니셨다고 한다. 열일곱 살에 갓난애기를 업고 철공소 일을 배우러 다니셨는데, 동내 처녀들이 항상 깔깔거리며 비웃어서 무척 부끄러웠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아름다울 수 있던 청소년 시절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던 거다. 아버지가 업어 키우셨던 내 큰삼촌은 키가 작고 병약하셨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독립성도 그닥 많지 않으셨다. 항상 내 아버지를 찾아와서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부탁하시는 것을 내가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와 마지막여행이 되어버린 제주도는 비가 계속 내렸다. 구순이 넘은 나이의 노인이 이곳저곳을 다니기엔 참 어려운 날씨였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파도가 일렁거리는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셨다. 아버지와 묵는 호텔의 뒤편엔 새파랗게 펼쳐진 녹차밭이 보이고 앞으로는 멀리 제주도 남쪽바다와 대정읍, 그리고 <산방산>이 보이는 중산간 부근에 자리 잡은 호텔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바다가 아쉬우셨던지, 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파도치는 바다를 보고 싶다고 계속 말씀하셨다. “바다는 파도가 쳐야 보는 맛이 있지...” 송악산... 제주 <산방산> 근처에 산이라고 하기엔 그저 아담하게 소나무가 많은 언덕이 있는데, 그 아래쪽 바다가 그나마 숙소에서 멀지 않아 보이기에 차로 모셔다드렸다. 겨울용 중절모와 패딩에 목도리를 하고, 그날따라 유난히 파도가 더 거세게 몰려오는 제주의 남쪽바다는 아마도 당신이 한국전쟁 때 배로 이곳 제주에 오시던 그 날의 파도가 생각나는지 자꾸만 자꾸만 뭐라고 중얼거리셨다. “아부지... 노래 하나 하세요...” 나는 노래를 유난히 좋아하시는 아버지께 가슴에 갑갑하게 갇혀있는 무언가를 뱉어낼 수 있게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살아남은 아버지의 형제는 삼형제가 전부였다. 아버지보다 서너 살 위에 귀선이라는 이름의 누님이 한 분 계셨는데, 살아 계셨다면 내게는 큰 고모님이 되시는 분이셨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전세가 많이 불리해지자,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을 동남아로 끌고 갔고, 징병으로, 노역으로, 그리고 위안부로 수없이 잡아갔다. 당시 내 고모는 열일곱 살이었는데, 일본의 어느 방직공장에 끌려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시켰는지, 폐 속에, 실 먼지를 가득 넣고서 한국으로 돌아와 숨도 못 쉬고 컥컥거리시며 살다가 스물네 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 어린 고모가 가지고 온 것은 폐 속의 실 먼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겨우 미음이나 먹을 줄 아는 갓난쟁이 어린 딸 하나를 데리고 홀연히 노름꾼 아비와 원한 만 가득한 어미가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부터인가 내 아버지는 할아버지 기일을 없애 버리셨다. 당신의 어머니와 단 사흘 차이 나는 기일을 없애 버리시고, 할머니 기일에 그저 밥 한 그릇 떠 놓으시는 것이 다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 할아버지 제사를 맞아 작은아버지와 사촌들도 다 모였는데, 갑자기 어디로 나가시더니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대정읍 모슬포 레이더기지를 내려와서 유명하다는 제주 보말 칼국수 식당을 찾았다. 아버지는 국수를 무척 좋아하셨다. 밥은 적은 밥공기로 한 그릇 이상 드시는 것을 본 적이 없지만, 국수는 무척 사랑하셨다. 특히나 막 끓여낸 소면이나 칼국수는 제법 큰 그릇에 드려도 마다하지 않고 다 비우시곤 했다. 제주에서는 갯바위에 붙어있는 작은 소라 종류를 보말이라 부른다. 그 알맹이를 빼내어 참기름에 마늘이랑 같이 넣어 잘 볶다가 보말 삶은 물을 부어 다시 한번 끓인 뒤국수를 넣어 끎인 것을 보말칼국수라 부른다. 처음 드시는 것이지만 차림이 국수이다 보니 아버지는 국물까지 제법 많은 양을 비우셨다. 내가 아버지께 무슨 음식을 사 드린 것이 몇 번이었나 생각해봐도 그다지 많이 떠오르진 않았다. 국수를 비우신 아버지는 커피를 찾으셨다. 내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커피는 일명 달달이 라고 부르는 다방커피다. 한국전쟁 당시 보급계 이등중사를 하셨던 내 아버지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커피를 처음 맛보셨다고 했다. 커피에 설탕과 전지분유가루를 타서 마시면 그것이 그리 맛있으셨다고 늘 말씀 하곤 하셨다. 당신의 방 큼지막한 소파 옆에는 늘 맥심 모카골드 스틱커피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의 아버지, 곧 내 할아버지는 노름꾼이었다. 아니 노름꾼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허접한, 노름판에 호구였던 것이 분명하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와집과 전답, 그리고 할머니가 시집오실 때 친정에서 주신 천 평도 넘는 콩밭도 모두 노름판에서 잃으시고는, 갓 아홉 살 된 맏아들을 소학교에서 기어이 끌어내어 애기지게를 만들어 주며 산으로 몰아 올리셨다고 한다. “나라도 없는데, 공부는 해서 머하노... 집안에 일손이라도 보태라..” 가장인 당신도 책임지지 않던 집안 건사를, 고작 아홉 살이던 내 아버지에게 일임하셨던 양반이 내 할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여러 가지 노환으로 병원 생활을 시작하신 여든 중반 무렵, 새벽에 잠을 못 이루시며 깨어나셔서 한숨만 후우~ 하고 쉬시기에 왜 잠을 못 주무시냐고 내가 물었더니, 침상 옆을 지키던 나에게 어릴 적부터 가슴속에 담아오시던 할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 그 애기지게를... 내가 아홉 살 때 영감이 직접 만들어 주는기라... 그거를 나한테 지우고는 산으로 들여보냈는데, 내가 얼매나 무서웠겠노? 해는 떨어지고, 산짐승들은 울어대고... 애비가 자식한테 우예 그리 모졌는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나는 위병소에 근무하던 병사에게 아버지의 국가유공자증을 내밀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마지막 여행일 수도 있고, 당신께서 훈련받으시던 이 부대를 꼭 한 번 보시기를 원한다 했더니, 어찌어찌 연락을 받았는지 부대장이 직접 정문까지 나와서 맞아 주었다. “어르신 같은 선배님들께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 주셔서 저희가 편안하게 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감사를 드립니다.” 내 또래쯤 돼 보이는 부대장의 이런 인사가, 내가 듣기에는 많이 오글거리는 말이었지만,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그의 인사치레가 새삼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살아오면서 아버지 덕분에 처음으로 특혜를 받아보는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한국전쟁 당시 훈련소 건물로 사용되던 건물은 한, 두 동 정도만 남아있었다. 그렇게나 보고 싶어 하시던 70여 년 전의 모습은, 사실 찾아보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뭔가 기억해 내시려는 듯 이곳저곳을 열심히 둘러보고 계셨다. “아이고, 어대가 어댄지 도무지 모리겠다.” 칠십 년 세월의 풍파는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모습들을 모두 쓸어가 버렸고, 그냥 건물 앞 팻말에만 ‘무슨 건물로 사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와 마지막 여행을 떠났던 한 아들의 사부곡이 펼쳐진다. 6.25전쟁이 터지고 제주도 모슬포훈련장에 징집되어 갔는데... 그렇게 시작된 아버지의 얘기는 시작되고, 아버지의 꿈과 한이 서린 삶의 파노라마는 그렇게 이어진다. 큰 울림이 아닌 잔잔한 아버지와 아들의 얘기를 들어볼까? (편집자말) 제주특별자치도 대정읍 모슬포... 해병 제91대대 정문을 들어서는 아버지의 눈에는 어른거리며 눈물이 맺혀있었다. 구순이 넘어 이제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도 힘든 노구의 한 사내는,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어느 해 겨울, 난생처음 들어본 이름의 항구인 제주도 모슬포라는 곳에 숱한 당신 또래의 젊음들과 함께 내려졌다.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북쪽으로 한참을 가다 보면, 마을 크기에 견줘 제법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신령면 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내 아버지는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태어나신 그해 가을은 유난히도 새빨간 홍시가 온 동네를 뒤덮고 있었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는데, 언젠가 내가 그 동네를 찾았을 때, 정말이지 집집마다 감나무가 한두 그루씩은 심어있었다. 할머니는 시집와서 모두 열 남매를 낳으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