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정도전을 모르면 조선 전기를 이해할 수 없고, 율곡을 모르면 조선 후기를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대로 율곡 이이는 정치가와 학자, 그리고 교육자로 그가 끼친 영향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큽니다. 그런 율곡에게 선조 16년(1583년) 6월에 일어난 전마 사건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을 안겨줍니다. 사건의 발단은 니탕개가 이끄는 여진족 2만명이 함경도 종성을 포위하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율곡은 보고를 받은 즉시 신속하게 대책을 세웁니다. 서울에서 활 잘 쏘는 사람 1만여 명을 뽑아 보내는 한편, 군자감의 면포를 군사들이 쓸 의복자료로 주고, 백관의 녹봉을 줄여 군사의 처자들을 먹이도록 합니다. 또한 국가에 곡식을 바치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곡식을 변방으로 보내 식량으로 지급합니다. 그런데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율곡은 3등 이하 군사 중에서 말을 바치는 자에게 북변으로 가는 것을 면제해주는 조치를 취합니다. 율곡으로서는 30여 년 전 을묘왜란 당시 군사들이 전장에 나갈 말을 구하지 못하자 서울에서 말을 약탈하여 타고 간 일을 상기하여 발빠르게 조치한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에게 미리
[그린 경제=이주영 기자]국립창극단은 5월 22일부터 시작될 창극 메디아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원작을 서재형(연출), 한아름(극본)의 부부 콤비가 어떻게 현대적 관점으로 풀어낼지 공연계는 벌써부터 주목하고 있다. 최근 국립창극단의 매 작품의 변화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해 11월 한태숙 연출의 스릴러 창극인 장화홍련은 우리의 고전 장화홍련전을 연극적 요소를 증폭시켜 현대적인 접근을 시도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어진 12월에는 이병훈 연출의 창극 배비장전을 통해 음악적 형식은 판소리 원형을 그대로 살리되 원작의 해학과 골계미는 현대인의 감성에 맞게 재 각색하여 보다 대중적이고 재미있는 창극을 만들어 내었다. 올 3월 윤호진 연출의 창극 서편제에서는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를 통해 전통문화콘텐츠의 변주와 확장을 보여 준 점은 큰 의미를 지닌다. ▲ 국립창극단 청 공연 한 장면 이러한 성과를 이룩할 수 있는 토대의 그 단초를 마련한 것은 단연 국립창극단 제11대 예술감독이었던 유영대 고려대 교수였다. 그는 우리시대의 창극 시리즈'라는 뚜렷한 명제를 가지고, 창극의
[그린경제=육철희 기자] “어린아이는 지식이 없어서 그 기질이 연한 줄기나 약한 풀과 같으니, 풍상(風霜)을 가해서는 마땅하지 않다.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널리 비유하고 자세하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혹 어른을 공경하고 배움을 부지런히 하는 뜻과, 앉고 서고 걷고 종종걸음을 하는 절도와, 물 뿌리고 청소하고 응하고 대답하는 예절을 가르쳐, 대충대충 지적하여 요컨대 점점 젖어들게 하되 구속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조선후기 영남의 재야 학자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1724~1796)이 편찬한 《상변통고(常變通攷)》통례(通禮) 30권에 나오는 말이다. 흔히 전통예절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하다거나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연한 새싹이 큰 가지를 펼 수 있게 도와주고 이끌어 주는 것과 같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절도와 사회적 약속을 가르쳐 주는 게 곧 예절이다. ▲ 안중근 의사 제례 모습, 모든 예절의 기본은 부모에 대한 효인데 효 실천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제사아다. 사람이 사람답고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형성해야 하는데 원만한 인간관계는 혼자서만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
이른 아침 잔디에 이슬이 촉촉이 맺혀있는 인원왕후 무덤 명릉(明陵)에 다녀왔다. 고양시 서오릉(西五陵) 안의 명릉에 잠들어 있는 인원왕후 무덤을 찾은 데는 특별한 까닭이 있다. 그의 친정아버지 김주신이 머물던 대자동의 영사정(永思亭)과 관련된 기사를 쓰다가 인원왕후를 알게 되었고 공부를 하다 보니 이 집안사람들의 인품이 사람을 매료하게 하는 점이 있어 인원왕후를 좋아하게 되었다. 인원왕후는 숙종의 두 번째(실제로는 민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에 이어 3번째)왕비이다. 나이 16살에 왕비가 되어 숙종과 19년을 살았지만 소생이 없었다. 그러나남편 숙종 사후 경종과 영조가 인원왕후의 아들로 국왕이 되었다. 특히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데 결정적인 힘을 발휘했다. 연잉군은 훗날의 영조임금이다. 숙종과 최무수리 사이에서 태어난 영조는 인원왕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국왕이 된 이래 인원왕후를 친어머니만큼 극진히 모셨으며 인원왕후 사후에는 눈물을 흘리며 친히 대왕대비행록(영조 33년,1757년)을 짓기도 하였다. ▲ 인원왕후 무덤(왼쪽 아래 언덕에 작게 보이는 무덤이 숙종과 인현왕후 무덤) 한 번 바람이 불거나 한 번 비가 내리는 것도 한결같이 지나쳐 버리신 적이
[얼레빗=김기섭 기자]지난 4월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안철수 의원이 기업인으로 활동할 때 유독 소통을 강조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전문능력이 100%인 사람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제로면 그의 능력도 제로라는 것입니다. 조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 소통이란 점을 강조한 것이지요. 국회의원 배지를 단 현재 그가 이전투구의 한국정치판에서 어떻게 소통의 정치를 펼칠지 많은 이들이 기대 반 우려 반의 시선을 보내는 중입니다. 새 정치를 위해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녹록치 않은 정치현실을 감안하면 장애 또한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86%, 즉 열 명 중 여덟은 소통 문제로 고통 받는다고 합니다. 특히 비즈니스 세계는 더 심한 편으로 이 때문에 이직하거나 이직을 꿈꾸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이루 셀 수없이 많을 테지만,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라틴어 어원인 나누고 공유한다는 본래 의미를 살리지 못하는 이유가 가장 크다고 봅니다. 먼저 나누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내놓거나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사로운 욕심을 앞세워 상대가 먼저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기에 바쁩니다. 달리 생각하면
[얼레빗=김호심 기자] 한 때 고고 춤이 유행하던 때에는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것도 유행이어서 친구들과 놀러 가거나 등산이라도 갈 때면 통기타나 야전(야외전축, 휴대용)은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 흔히 '야전'이라고 줄여 불렀던 '야외전축', 70년대는 이 야전에 속칭 '빽판'이라 불렀던 음반을 걸어놀고 고고춤을 추는 것이 유행이었다. 야전에 '빽판(해적판)'을 걸어놓고 춤추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 이 야외전축의 턴테이블에서는 한창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던 미국 밴드 C.C.R의 Hey Tonight, Molina 등을 연방 돌려 대는 시기였다. 60년대 트위스트가 젊은이들 음악 문화라고 이야기한다면 70년대는 바로 고고가 유행하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국내 고고의 대중적인 유행에 불을 댕긴 것 중 하나는 바로 야전이 아니었을까? 이 야외전축은 노트북 컴퓨터처럼 가방 모양을 하여 건전지로 작동하는 포터블(휴대용)로 가전제품으로는 트랜지스터 라디오(1955년 8월17일 생산)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꿈같은' 상품이었다. 크기는 보통 LP음반보다 조금 긴 장방형에다가 높이는 10Cm정도였다. Mono인 자체스피커 하나
[한국문화신문 얼레빗=손신영 기자] 서울 서북쪽에서 경기도로 넘어가는 길에 자리한 갈현동 수국사는 황금절로 잘 알려져 있다. 절의 중심 법당을 금박으로 입혔기 때문이다. 금박으로 입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로, 이 무렵부터 절의 안팎이 정비되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국사의 외형만 보면, 전통사찰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 사찰에 갖추어진 해탈문, 천왕문 등 통과의례로 지나는 문이 생략되어 있고, 중심 불전인 대웅전의 좌우에는 명부전이나 관음전이 자리하지 않는다. 이런 가람배치로 인해, 수국사가 현대 들어 지어진 곳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수국사는 우리나라 절 대부분이 그렇듯, 짧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건물은 새것 혹은, 좀 오래되었어도 100년 이내의 것이지만, 절의 역사는 그 보다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서울 근교의 절집에서도 종종 확인된다. 그리고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오랜 역사를 간직한 절들이 속속 발견된다. 다시 말하면 서울을 비롯하여 근교의 절집 역사는 지방의 절집 보다 짧은 곳이 대부분이고 이는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불교를 억압한 정책의 결과이다. 하지만 이때 혼동하면 안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