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지난주 속풀이에서는 1910~20년대에는 《증보신구잡가(增補新舊雜歌)》를 비롯하여 《고금잡가편(古今雜歌編)》 등 많은 종류의 노래 사설 모음집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내용은 가곡이나 가사, 시조와 같은 노래뿐 아니라 오늘날 민속음악으로 분류되고 있는 각 지방의 소리들, 예를 들면 초한가(楚漢歌)를 비롯한 서도지방의 소리, 육자배기를 비롯한 남도의 소리, 그리고 서울이나 경기지방의 긴 좌창, 앞산타령이나 뒷산타령과 같은 선소리, 그 외의 일반 민요, 단가(短歌)나 회심곡, 병창 등 성악의 전 장르를 망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러한 노래들이 하나의 노래책 속에 들어 있기에 책 이름도여러 노래의 모음집이란 뜻의 잡가(雜歌)로 명명한 것이라는 이야기, 절대 노래 자체가 잡스럽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란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명칭은 경기소리꾼들이 자신들의 소리를 스스로 낮추어 부른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에서도 12잡가, 휘몰이잡가, 입창이나 송서, 각 지방의 민요 등으로 구분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 경기잡가뿐 아니라 기악의 산조음악도 한때는 헛튼가락,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2014년 봄, 이은관 명창에 이이 경기민요의 예능보유자 묵계월 명창도 떠났다. 그는 이 시대 가장 널리 알려진 여류 경기명창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94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울의 12좌창(坐唱)으로 예능보유자가 되었는데, 그가 즐겨 부른 좌창을 잡가(雜歌), 또는 긴잡가라 부르고 있으며 이러한 노래들을 좌창(坐唱)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연창하는 형태가 단정하게 앉아 조용하게 부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점을 이야기했다. 양반들이 부르던 노래를 정가(正歌)라고 통칭하는데 반해, 일반 대중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는 민속가(民俗歌), 또는 속가(俗歌)라고 불렀고 이러한 민속가를 통칭 잡가(雜歌)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잡(雜)이란 의미는 원래 순수한 것이 아닌, 뭔가 뒤섞여 있는 것, 장황하고 번거롭다는 뜻인데 노래분위기와 맞지 않는다 점, 특히 191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각종 노래 사설집의 이름을 잡가집이라 한 것은 각 지방의 민요나 특징있는 노래들을 망라해서 싣고 있다는 의미, 그래서 잡가의 잡은 여러 장르의 노래들이 섞여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19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속풀이 165에서부터 지난주까지는 배뱅이굿의 고 이은관 명창의 이야기를 하였다. 강원도 이천에서 태어나 소리를 좋아했고, 10대 후반에 철원에서 열린 노래자랑에 참여해 대상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황해도로 본격적인 소리공부를 하러 갔다는 이야기, 이인수 선생에게 공부를 한 뒤, 젊은 나이에 장현 권번의 소리선생이 되었다는 이야기, 서울로 와서는 신불출의 일행이 되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으며 서양악기도 배우고 영화출연도 했으며 6, 25때 서양의 5선 악보 읽는 법을 배워 그때부터 작곡이나 편곡을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서도소리 예능 보유자가 뒤늦게 되어 후진 양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독보 능력이 있어서 서도소리의 불규칙장단을 여러 사람이 함께 합창이 가능하도록 장단화 했다는 이야기, 그 외에 건강관리를 잘 하였으며 옳은 지적에는 겸손하게 귀를 귀울이는 명창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창작곡 및 신민요, 서도 민요와 좌창, 서도입창, 경기민요와 좌창, 각 지방의 민요, 배뱅이굿, 배비장타령, 이춘풍전, 장한몽, 정선의 애화 등의 가사집과 창작소리를 작곡한 내용들을 묶은『가창총보』라는 악보집에 관한 이야기 등을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이은관 선생과 생전에 나누었던 대화 중, 인상에 남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은관이 소리꾼으로서의 목(성대)을 타고 났기에 그토록 지존의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 왔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 뒤에는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후천적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지켜 온 점과 상대의 조언에 경청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의 소유자라는 점도 그를 지존의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게 했던 원인이라고 하였다. 그의 겸손을 알게 하는 다음과 같은 경험담 중에서 배뱅이굿 속에 3정승이 각각 한 집은 딸, 또 한 집은 계집아이, 그리고 다른 한 집은 여자아이를 낳게 된 배경을 신수가 불길하여로 부르고 있는데, 이를 신수가 대통하여로 바꾸어 부를 것과 다른 하나는 이 명창이 무대에서 장고 돌리기 쇼를 만류시킨 경험이다.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가까운 친구라도 무대 위에서 보여줄 것을 준비하고 있는 출연자에게 이래라, 저래나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천하의 이은관을 상대로 그것이 아무리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한다고 해도 무대 위에서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배뱅이굿이 어느 지방의 소리이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확실하게 알려주고 이은관 명창은 우리곁을 떠나갔다. 그를 뛰어넘는 제자는 차치하고라도 이은관 정도의 제자라도 나와야 배뱅이굿이 앞으로도 대중의 사랑을 받을 것인데, 이점 또한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 주까지 무대공연을 비롯하여 음반제작, 라디오 방송이나 TV, 영화출연, 해외 공연, 전수교육, 신민요의 작사 작곡, 창작 소리극의 제작, 등 개략적이긴 하나 이은관의 활동상황을 짚어 보았다. 우리가 국악인 중에 가장 오래도록 인기를 누린 대표적인 분으로 이은관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이은관 선생이야말로 진정 서도소리를 사랑한 명창이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 김인수도 그랬고, 많은 서도소리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도소리 속에 들어있는 남도소리를 그는 대부분 서도소리로 고쳐 불렀던 것이다. 서도소리는 서도의 창법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앞으로도 서도소리제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던 것이다. 그 결과 이제 서도소리는 경기소리의 한 변방이 아니란 점도 확실하게 인식시켜 놓은 것이다. 평생을 배뱅이굿과 함께 해오면서 부모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이은관이 누구보다 악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배경은 특히 서도소리의 장단이 불규칙적이어서 지도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고, 그 다음은 같은 노래라도 잔가락이나 시김새의 처리가 달라 함께 부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시김새란 식음(飾音)새, 즉 음을 꾸미는 모양으로 김치에 비한다면 양념과 같은 역할로 지역이나 지방에 따라 김치맛이 다른 것처럼, 음악에 있어서도 지방에 따라 독특한 맛이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은관은 서도소리의 악보화 문제, 기보의 체계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들을 지난 주 이 난에서 하였다. 또한 이은관은 해마다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반드시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까닭은 제자를 지도해야 본인도 공부를 할 수 있고, 아는 것도 자꾸 복습을 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 이름이 알려진 젊은 소리꾼들이 명심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은관은 제자를 가르쳐 3년이면 이수 시험을 치룰 자격을 주는 현 무형문화재 이수자 제도에 못 마땅한 심기를 들어내기도 하였다. 3년으로는 어림도 없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엔 전쟁 때에도 이은관은 명동성당에 숨어서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성당을 이용하는 이유는 유엔군이 예배당은 폭격하지 않기 때문이란 점, 전쟁 뒤에도 그는 지방공연이나 대형 쇼 공연을 통해 인기를 얻어서 배뱅이굿 영화까지 찍었으며 아세아 영화제에 참석하였다는 점, 그 후에도 일본, 미국, 월남, 등 해외공연이나지방 공연 등에 이은관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는 점, 배뱅이굿을 부르는 사람이 이은관, 이은관이 부르는 소리가 바로 배뱅이굿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점을 얘기했다. 그 바람에 문화재도 다른 사람들보다 10여년 후에 인정을 받았다는 점, 문화재가 된 후에는 해외나 지방공연을 자제하며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우렸다는 점, 그래서 학원을 세우고 젊은 소리꾼들을 모아 서도소리며 배뱅이굿을 지도하는 한편, 신민요나 창작 민요를 작사 작곡하기 시작하였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이은관은 악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악보를 통해서 그가 배운 노래들을 악보화 할 계획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다른 지방의 소리들도 그러하지만, 특히 서도지방의 소리는 장단이 불규칙적이어서 지도하는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서도소리와 배뱅이굿은 황해도 황주에서 이인수 선생께 배웠고, 서울 경기의 소리들은 서울에 와서 최경식 선생에게 배웠다는 점, 이은관은 전통사회의 소리꾼 중에서는 드물게 서양의 5선 악보를 볼 수 있는 소리꾼이었다는 점, 그가 5선보를 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나 계기는 6. 25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북 사람들이 넘어와서 남쪽 연예인들을 포섭하여 연예단을 만들고 군가나 사상적인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 악보를 복사해 왔을 때, 한 여성이 악보를 보고 그 자리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악보 배우기를 결심을 하였다는 점, 그래서 이병우나 형석희 씨, 그리고 연예단에 소속되어 있던 양악 악사와 성악을 전공하던 여학생, 피아노를 치던 여학생 등에게 시간이 나는 대로 배우고 익히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한다. 뾰족당, 즉 명동성당에 숨어서 여러 명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북쪽과 남쪽의 음악인들이 함께 단체 안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연예단의 이름은 특별히 짓지 않았다. 주로 성당 내에 있으면서 연습을 하고 행사를 준비하고 그랬던 원인은 유엔군이 예배당은 절대 폭격을 안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신불출과 함께 종로의 제일극장에서 배뱅이굿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이은관은 전라도에서 함경도까지 전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였다. 당시 신불출은 유명세를 타던 인물이어서 관공서에서도 그를 귀빈으로 접대할 정도였다는 이야기,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대한국악원의 회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6,25 때에는 군인들을 위한 위로의 공연을 장소팔, 고춘자 등과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이은관은 60년대 고려영화사에서 기획한 배뱅이굿이라는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였고, 레코드판이 동시에 잘 나가는 바람에 그의 이름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또한 국악인으로는 드물게 �스폰이나 아코디언과 같은 악기도 잘 다루었는데, 이러한 결과는 그 스스로 악보를 읽을 수 있었기 에 가능한 일이며 이러한 사실은 또한 그의 음악적 욕구나 역량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는 이야기 등을 진행하였다. 38선이 가로 막히지 않았을 당시에는 서도소리와 배뱅이굿을 황해도 황주에 가서 이인수 선생께 배울 수 있었고, 선생의 추천으로 황해도 장연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면서도 프로로 살기 위해 수시로 배웠는데, 그렇다면 경기의 소리들은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24세가 되던 해, 황해도 장현 마을의 권번 소리선생을 접고 귀향한 이은관은 앞으로의 소리인생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끝없이 하다가 서울행을 결심하였다. 제일 먼저 인천의 한 가설극장에 들어갔고 그 곳에서 서울의 유명한 소리꾼 박천복과 한 무대에 서게 되었다. 또한 박천복을 통해 신불출이라는 공연계의 거목을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신불출의 일행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당시 신불출의 단체에 입사한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방송국의 전속 탈렌트나 연예사에 오디숀을 보고 합격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행운이었다. 신불출은 이은관의 배뱅이굿을 새롭게 기획하여 서울 종로 4가의 제일극장에 올렸는데, 폭발적적인 인기리에 4일을 연장공연하기에 이르렀고, 그 이후 전국을 돌며 지방공연을 다니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 등을 지난주에 소개하였다. 이번 주에는 그 다음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한다. 지방공연이라고 해서 서울에서 경기지방이나 충청지방에 가는 것이 아니다. 전라도에서 함경도까지 전국을 돌며 그것도 그 지역에서 규모가 큰 극장을 빌려 대규모 출연진으로 순회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신불출 선생 하면 당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