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6월이면 부여에서 내포제 시조창 강습회가 열리고 있다. 때를 맞추어 문화재 보유자인 김연소 명창의 개인 발표회도 열리고 해서 시조를 좋아하는 전국의 애호가들이 부여로 발걸음을 하게 될 것이다. 내포제 시조란 내포지방, 즉 충청남도 서해 바닷가와 인접해 있는 홍성, 당진, 서산, 서천, 보령, 부여, 청양, 연기, 논산, 예산 지역에서 부르고 있는 3장 형식의 간결한 노래선율을 말한다. 충청남도에서는 일찍이 이 내포제 시조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그 보존과 계승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초대 보유자는 고 소동규 명인, 2대 보유자는 고 김원실 명인, 그리고 현 보유자는 김연소 명인이다. 충남의 시조인들은《충남통합시우회》를 조직하고 보유자를 중심으로 내포제시조의 확산과 보급을 위해 해마다 시조 강습회를 열기도 하고, 가을에는 전국적인 시조창대회를 열기도 한다. 그 중심에 김연소 명인을 포함한 이규환, 김영숙 등과 같은 열성있는 시조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충청 지역에 내포제시조가 전해오는 것처럼 경상도 지역에는 영제시조가 있고 전라도 지방에는 완제시조
지난주까지 벽파가 어떤 분인가 하는 점을 정리하면서 벽파는 민속음악, 그중에서도 경서도 민요를 소리로 지켜온 명창이었다는 점을 피력하였고, 둘째로 선생은 학문을 즐겨 한 학자였다는 점을 말했고, 셋째로는 앞서가는 국악교육자였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으로, 벽파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선생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많은 분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온 대 사범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름난 명인 명창 중에는 스스로 자기의 음악성을 자랑하거나 목자랑, 소리자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위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지요. 오호의 결과나 평가는 듣는 사람들이 하는 법인데 스스로 자기 소리에 도취해 품위를 잃는 경우를 목격하게 됩니다. 같은 소리를 듣더라도 A가 부르면 천박해 보이고 B가 부르면 고상해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실기인이라 해서 소리만을 앞세워서는 훌륭한 음악인으로 대접받기 어렵다는 진리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예술인인가, 아니면 쟁이인가? 하는 점이 본인의 인격이나 교양과 직결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벽파 선생은 여타 명창과는 다른 품격을 지니고
“ 1955년 7월, 민요계의 거장 이창배는 인멸 위기에 있는 우리 고유의 가락들을 정확하게 보존전수하고자 <청구고전성악학원>을 개설하고, 일반인 및 정규 수강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동 학원에서는 일반 민요를 비롯하여 경기 및 서도의 입창 잡가 각 도의 속요들을 중심으로 교수하였고, 그 활동은 20여년 이상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민요 한 가락이라도 부른다는 사람들은 전문인이든 비전문인이든 간에 모두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동 학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에 이르고, 사사받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으며, 인간문화재급 국창들도 모두 이곳을 거쳤다. 개원 당시만 하더라도 민요계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부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고 식자층의 손이 닿지 못해 사설은 오류투성이로 전해질 뿐이었다. 어려운 고사나 한문구는 제 뜻을 바르게 새기지 못한 채 불러 왔기 때문에 사설 내용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된 발음이나 표현을 일삼는 예도 허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정 작업은 동 학원의 이창배 사범에 의해 하나 둘 정리되어 나
벽파 이창배 선생은 1921년 여섯 살이 되어 한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마침 집 옆에 교회가 있어서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의 영향으로 노래를 잘 따라 불렀다고 합니다. 경서도 소리와 만나게 된 계기는 일본인 선생들이 일본음악을 가르치고 일본 노래를 부르라는 지시에 그것이 싫어서 조선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고 하지요. 어린 벽파야말로 애국자 중에서도 애국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퉁소의 명인으로 알려진 고모부로부터 퉁소며 단소 등의 관악기를 배웠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서도의 명창들이 간혹 관산융마와 같은 시창을 부를 때면 선생이 단소로 반주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도 있었습니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8세 무렵, 한양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체신국의 전기과 측량기사가 된 이후라고 생각됩니다. 이 무렵 동네 공청에는 왕십리패나 뚝섬패의 선소리 명창들이 드나들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음악을 듣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원범산에게 경서도 잡가를 배웠으며 학강 최경식에게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학강의 <조
2012년, 6월 14(목요일) 오전 10부터 성동구 왕십리에 있는 소월 아트홀(성동문화원)에서는 벽파 이창배의 생애와 예술을 조명해 보는 학술모임과 기념공연이 한국전통음악학회 주최로 개최된다. 이 대회에서 발표될 필자의 기조강연 내용을 몇 회로 나누어서 매주 얼레빗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좌장으로부터 소개받은 전통음악학회 회장 서한범입니다. 이 행사를 주최하게 되어 영광스럽고 또한 보람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청을 높여 <전통예술의 진흥>을 부르짖고 있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전통음악은 구시대의 낡은 유산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 국가를 경영하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전통음악은 소수의 특수 계층이 그 명맥을 이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해서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전직 국회의원 한 분과 00감독원장, 기업체 회장을 지낸 분들과 담소하는 자리에서 한 분이 “거 서 교수가 쓴 책 추임새에 인색한 세상 있잖아,” 하니까 국회의원을 지낸 분이 “추임새요? 무슨 새의 이름입니까?” 하고 되물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경기민요의 대명사 이은주 명창의 제자인 노경미 씨가 경기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12좌창 전곡을 음반에 담아냈다. 좌창(坐唱)이란 글자 그대로 앉아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이다. 이는 서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의 입창(立唱)과 구별 짓기 위한 이름이다. 입창을 순 우리말로 선소리라 부르는 것은 한자의 입(立)이 설 “입”이어서 같은 의미이지만, 좌창을 달리 잡가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하여튼 좌창이나 입창, 이들은 줄곧 잡가라는 이름으로 전해 온 노래들로 상류 지식인 사회에서 즐겨 부르던 정가(正歌)의 대칭개념인 것이다. 좌창 중에서 12곡으로 선정하고 있는 곡들은 다음과 같다. 1) 유산가(遊山歌) 2) 적벽가(赤壁歌) 3) 제비가(燕子歌) 4) 소춘향가(小春香歌) 5) 선유가(船遊歌) 6) 집장가(執杖歌) 7) 형장가(刑杖歌) 8) 평양가(平壤歌) 9) 십장가十杖歌 10) 출인가(出引歌) 11) 방물가(房物歌) 12) 달거리(月令歌) 일반적으로 앉아서 부르는 연창형태는 적극적인 표현을 절제하는 노래들이다. 가곡이 그렇고 가사와 시조가 그렇다. 그래서 대부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줄기가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에서 지난 5월 26일(토)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의 풍습과 전통을 이어가고자 당산제 큰잔치를 열었다. 그리고 그 잔치에 이은관 명창에게 서도소리와 배뱅이굿을 열심히 익히고 있는 여성 소리꾼 전옥희를 초청하여 배뱅이굿 한마당을 펼쳐 큰 관심이 쏠렸다. 이러한 전통의식이나 놀이야말로 지역민들을 화합시켜 명랑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기본적인 정신이요, 원동력임을 생각할 때, 매우 의미 있는 행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전통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결속시켜 나가는 기본 질서라는 논리가 타당하다는 생각이다. 작게는 배뱅이굿을 통하여 함께 울고 웃는 재미있는 공연이 되겠지만, 크게 보면 이러한 행사를 통해 이웃이 하나가 되고, 그래서 지역민들의 화합과 나눔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행사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더욱 컸다. 전옥희 한국 사람으로 배뱅이굿 한 가락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은관의 배뱅이굿은 매우 유명한 서도의 창극조 소리이다. 배뱅이라는 처녀가 결혼 전에 죽게 되자, 그녀
시조창은 자연 그대로의 모양새를 나타내는 격조 있는 전통성악이다. 이러한 시조창이 시류에 밀려 점점 퇴색해 가고 있는 현실이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던 차에 경기도 파주에서 5월 26일, “전국시조경창대회”가 열릴 예정이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시조창의 부흥과 보급이라는 시대적 열망 속에 새로운 명창을 찾는, 그러면서도 시조인들의 결속과 화합을 다지는 파주의 이번 대회는 조옥란 명창이 다섯 번째로 주도하게 된 행사이다. 처음과는 달리 점차 지역민들의 관심 속에 지역의 특색사업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분위기여서 앞으로의 진행이 희망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시조시는 향가나 민요 등과 공존하며 성장하다가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 크게 발전한 분야이다. 이처럼 시조가 발전하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도 시조시의 형식이 간결 소박하다는 형태상의 특성이 당시의 유학자, 지식인, 선비층의 취향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러한 시조시는 조선전기만 해도 ‘대엽조’라는 시형에 얹혀져 불렸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가곡을 잉태시켜준 만대엽, 중대엽, 삭
지난주까지 율자보와 공척보, 악기의 소리를 흉내 낸 육보, 거문고나 비파의 악보로 율명(음이름)을 쓰지 않고 여러 개의 글자를 합해 놓은 합자보, 세조시대에 창안한 기보방법으로 5음으로 줄여 쓴다는 의미의 약보, 성악곡의 가락이나 창법을 잊지 않으려고 기호를 써 온 연음표의 이야기를 주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보법들은 부호 자체가 음높이를 지니고 있지 않고 박자의 표시가 없어서 악곡의 빠르고 느린 박자를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단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기존의 불편하거나 불합리한 점을 한꺼번에 해결한 기보방법이 바로 정간보(井間譜))보라는 것이다. 정간보는 조선조 세종임금 때 창안된 기보방법이다. 정간보의 정(井)은 우물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마치 원고지처럼 상하좌우의 네모 간을 만들고 그 안에 12율명의 첫 글자만을 적어 넣는다. 이 악보는 무엇보다도 음의 길이, 즉 음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조선조 세종시대의 음악이 지금까지 전해올 수 있었던 배경도 정간보 덕분이고 궁중음악 대부분이 정간보로 기록되어 온 점이나, 정리 채보 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국립국악원을 비롯하여 음악기관이나 연주 및 연구단체, 국악전공의 중, 고등학
지난주 속풀이 55에서는 우리음악을 기록해 온 방법으로 율자보를 소개하였다. 대개 각 음의 길이가 일정하거나 또는 빠르기가 일정한 음악에 쓰이고 있는데 현재까지도 성균관 안에 있는 공자의 사당, 문묘에서 연주되고 있는 음악이 율자보에 의해 연주되고 있다. 또한, 율명을 쓰고 읽는 것이 어려워 10개의 아주 쉽고 간단한 글자로 줄여 써 왔던 기보방법도 있고, 악기의 소리를 흉내 내 적어 놓은 구음(口音)의 육보도 소개하였다. 덩, 둥, 당으로 표현되는 현악기 육보가 있고 나, 리, 로 등의 관악기 육보가 오래전부터 쓰여 왔다. 이러한 육보에는 한글로 된 것과 한자로 된 것이 있으며 현재까지 많은 거문고의 악보가 육보로 전해온다는 점, 우리음악의 역사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 이 육보의 해독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번에는 합자보를 소개한다. 합자보란 거문고나 비파의 악보로 율명(음이름)을 쓰지 않고 여러 개의 글자를 합해 놓은 기보법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음 이름은 표시하지 않고 줄을 어느 손가락으로 집는가 하는 표시와 줄의 이름, 탄법(彈法, 타는 법) 등을 약자로 만들어 이들을 합해 놓은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거문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