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공자는 정(鄭)나라의 음악을 미워했다 지난주 속풀이 17에서는 정악(과거 아악이라고 부르던 음악)과 민속악의 용어를 설명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상하의 개념이나 우열의 대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음악적 환경이나 성격, 또는 표현방법에 따라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 한국 전통음악의 양대 산맥을 이루어 온 상대적 관계로 마치 자전거의 앞, 뒷바퀴와 같은 존재임을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아악이란 무슨 말인가? 아악이란 말은 세 가지 의미가 있는 용어이다. 첫째는 아정(아담하고 바른)하고 고상한 음악이라는 의미, 둘째는 중국 고대의 음악으로 고려조에 들어온 이후 국가의 각종의식에 쓰였던 음악, 셋째는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아악, 당악, 향악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아악이라 함은 세 번째 경우를 뜻하는 말이다. 과거 임금이 거처하던 궁궐 안에서는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온 아악도, 당악도, 그리고 고려나 조선을 통해서 작사 작곡된 향악도 연주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국가 조정에서는 중국에서 들여 온 아악을 쓰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자연스레 기존의 아악, 당악, 향악을 묶어 넓은 의미로 아악이
17. 정악과 민속악의 관계는 자전거의 앞 뒤 바퀴와 같다. 지난 금요일, 독자가 쓰는 얼레빗은 서도소리를 전공하는 학생의 글로 정악과 민속악에 관한 개인의 의견이 재미있게 소개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이를 자칫 잘못 이해하게 되면 정악은 바른 음악, 존귀한 음악이고 이에 반해 민속악은 바르지 못한 음악, 저속한 음악으로 이해하는 독자가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양자는 우열의 개념이 아니다. 정악은 음악을 표출하는 방법이 민속악에 비해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단아하게 들린다. 그래서 예부터 아정하다는 의미로 아악(雅樂)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아악이라는 용어 대신 정악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이는 아정(雅正)하다는 말에서 아악이나 정악을 동의어라 보기 때문이다. 민속악은 속된 음악이라는 뜻이 아니다. 원래 ‘속(俗)’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풍속, 바램, 이어감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의 풍속이며 백성이 이어가는 순수한 음악을 뜻하는 말이다. 얼레빗 독자들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보다 구체적으로 국악용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중국 당 나라에서 당의 악기나 음악이
지난주에는 어렵사리 연변예술대학과 첫 교류 음악회를 갖게 된 과정을 중심으로 소개하였다. 이번 주에도 연변의 조선족 음악 이야기를 계속해 보도록 하겠다. 어렵게 성사된 연변대학에서의 교류 음악회를 끝낸 그날 밤,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되어 목이 터져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우리의 만남을 서로 자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다음날 ‘들놀이’ 행사로 이어졌다. 연변대학의 교수와 직원들은 우리 일행을 위해 먹을거리를 다양하게 준비해서 강가로 나가 하루를 즐긴 것이다.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동포 음악인들이라 해서 그런지 너무도 따뜻하게 대해 주는 그들의 태도에서 순수한 인간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 7월, 연변 예술대학을 방문하던 그 해, 우리의 초청을 계기로 연변예술학원은 중대한 구조 조정을 단행하였는데, 바로 음악학부 내에 민족음악과, 줄여서는 민악과로 부르는 학과를 새롭게 신설한 것이다. 마치 한국에서의 국악과혹은 한국음악과와 같은 것이다. 한국은, 1959년도에 신설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를 제외한다면 70년대에 와서야 겨우 한양대, 이
필자는 얼마 전, 중국 연변예술대학에서 열린 한ㆍ중 학술 및 실연 교류회에 37명의 회원과 함께 참가하였다. 국악속풀이 이번 주에는 올해로 13회를 맞게 된 한ㆍ중 실연교류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볼까 한다. 한ㆍ중 학술 및 실연 교류회는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의 전통음악학회와 공동으로 주최하고 있는 연중행사이다. 말 그대로 한국의 전통음악과 중국 연변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조선족 음악에 대한 학술적인 강연과 토론을 통해서 학문적 교류를 하고 그리고 겸해서 양쪽에서 연행되고 있는 전통음악의 실연을 통하여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는 연구모임이다. 이 교류행사는 200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최초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1990년 7월에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체결되기 직전, 필자는 국내 저명 국악인 20여 명과 함께 처음으로 연변 예술학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중국은 죽(竹)의 장막이어서 조선족 음악에 대한 정보는 접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조선족들이 어떤 악기로 어떤 노래를 부르며 지내는지? 또한, 어떤 음악인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더욱이 민족음악을 지도하고 있는 대학이 있는지? 있다면 교육체계는 어떠한
가곡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시조 이야기로 흘렀다. 향제시조의 한 갈래인 충청 지방의 내포제시조이야기도 했고, 이어서 시조에 명창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설명하면서 시조의 일반적 이야기도 잠시 하였다. 이번 주에는 가곡, 시조와 함께 정가(正歌)에 포함시키고 있는 가사(歌詞)이야기를 잠시 해 보기로 한다. 남창 가곡의 예능보유자인 김경배 명인의 아호가 소하(韶荷)이다. 그가 이번에 가곡이 아닌 12가사 전곡을 한 장 음반으로 담아냈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축하의 의미를 담아 축사를 보내면서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은 서초구 우면동에 자리 잡고 있는 국립국악원이 1950~60년대 말까지는 종로구 운니동 비원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1960년대 말, 지금의 국립극장이 서 있는 장충동 남산 중턱으로 옮겨가기 전까지가 운니동 시대이다. 이 당시 국립국악원은 일반 시민들을 위한 월례국악강습회를 10~15일간 치른 다음, 반드시 국악감상회를 원내의 작은 공연장에서 열곤 하였는데, 그 공연장의 이름이 바로 춤일(佾), 풍류소(韶)의
“시조에는 명창이 없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시조창이 너무 어려워서 경지에 오른 사람이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반대로 너무 쉬워서 모두가 명창이기 때문에 없다는 뜻일까. 시조창이라 해서 명창이 없을 리 있겠는가마는 이 말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필경 무슨 곡절이 있을 법하다. 조선조 전기부터 불리던 전문가의 노래가 가곡이라면, 이를 일반인들이 부르기 쉽도록 고쳐 만든 노래가 곧 시조창이다. 시조창을 부르기 시작한 시기를 학계에서는 대략 영조 무렵으로 보고 있다. ≪유예지≫를 비롯한 시조창의 악보는 순조 무렵부터 보이고 있는데, 이 악보를 분석한 결과 현행의 경제 평시조-京制平時調로 알려졌다. 경제란 서울 경기지방을 말함이고, 시조는 3장6구체의 시형에 가락을 얹고 장단을 붙여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경제시조의 대칭개념이 곧 향제시조-鄕制時調이다. 향제에는 지난주 소개되었던 충청지방의 내포제를 비롯하여 경상도의 영제시조와 전라도의 완제시조가 대표적이다. 그런가 하면 이미 고인이 된 석암 정경태 명창이 완제를 바탕으로 발전시킨 시조가 전국적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어 이를 석암제시조로 부르고 있다. 어느 지방의 시조가 되었든 간에 시조는
내포제 시조란 내포지방에 전해오는 노래를 말한다. 내포지방이란 충청남도 서해 바닷가와 인접해 있는 홍성, 당진, 서산, 보령, 연기, 부여, 청양, 논산, 예산, 서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시조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창이 밝았느냐” 또는 “태산이 높다하되”처럼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형식을 취하고 있는 3~4조의 시형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포제 시조는 서해 바닷가에 살고 있는 충청 지역민들이 즐겨 불러온 고유한 시조가 될 것이다. 참고로 경상도 지역의 시조를 영제, 전라도 지방의 시조를 완제, 서울 경기지방의 시조를 경제라고 부르는 것처럼 지역에 전해오는 시조를 분류하는 이름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충청남도는 내포제 시조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존과 계승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시조인들은 《충남통합시우회》를 조직하여 해마다 강습회를 열기도 하고 전국 시조창대회를 열기도 한다. 그 중심에 김연소, 이규환, 김영숙 등과 같은 시조인들이 있다. 충남문화재로 지정할 당시에는 소동규 명인이 초대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고 그 뒤로 김원실 명인이 2대 보유자가 되어 도내에 각 지부를 조직, 세를 확산해 오면서 선생의 유지를 충실하게 이
국악속풀이 이번 주 이야기는 가곡에서 잠시 벗 어나 가야금병창에 대해 얘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가야금병창이란 창자 스스로 가야금을 뜯으며 단가나 민요, 판소리의 눈대목 등을 부르는 연창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기존의 노래뿐 아니라 새롭게 창작된 노래도 가야금을 뜯으며 부른다. 우리의 전통성악 가운데 반주악기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성악은 가곡이 유일하다. 반주악기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 부분이나 간주 부분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음높이를 지정하고 유지해 주는 역할에서부터 선율의 흐름, 빠르기, 음악적 분위기를 반주진이 이끌게 마련이어서 창자가 도움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때로는 이러한 틀이 장애가 되어 오히려 창자의 기량을 발휘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88서울 올림픽 전야제 행사로 고 박동진 명창이 판소리 한 대목을 관현악 협연으로 부른 다음, 무대 뒤로 나와서 “ 나는 다 필요 없어, 북 제대로 치는 놈 하나만 있으면 된단 말이여~” 불평 섞인 실토를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가곡을 제외한 여타의 노래들은 반주가 있으면 좋고 여의치 않으면 장고나 북을 반주 삼아 부르는 노래가 일반적이다
가곡이야기 4. “삭대엽의 순 우리말은 자진한잎이다.” 《대악후보》나 1580년대의《금합자보》에 실려있는 만대엽이 가곡의 원형임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러한 만대엽은 늦어도 17세기 후반까지는 화려하게 각광을 받았던 것이 확실하지만 그 이후로는 점차 중대엽에게 자리를 내 주기 시작하는 모습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다. 1680년대에 제작된《신증가령》이라는 악보에는 중대엽이나 삭대엽이 각각 1, 2. 3으로 확대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18세기 초엽부터는 만대엽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가 하면 위세를 떨치던 중대엽 역시 평조의 음계를 잃는 등, 점차 그 기세가 꺽이기 시작하면서 가곡의 중심은 가장 빠른 템포의 삭대엽으로 옮겨지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삭대엽(數大葉)이란 무슨 뜻일까? 삭(數)은 자주 혹은 잦게(빠르게)라는 의미이다. 수로 읽기도 하나 그럴 경우에는 세다의 의미가 된다. 대(大)는 크다는 뜻으로 옛날에는 ‘한’으로 읽었다. 대전(大田)을 ‘한밭’이라고 했던 것처럼 크다는 뜻을 우리말로는 ‘한’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엽(葉)은 잎이나 갈래 등의 뜻을 지닌 글자이기 때문에 음악용어로는 ‘악곡’이 될
《산타령》에는 경기산타령, 서도산타령, 남도산타령 등이 있다. 남도는 다르지만, 경기와 서도의 산타령은 전반적인 악곡의 구성이나 선율의 진행이 유사한 편이어서 이들 노래가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쪽의 산타령이 다른 지방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927년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는 경기산타령은 불규칙리듬이 많고 서도산타령은 비교적 규칙적인 점, 서도는 템포가 빠르고 요성이 격렬한데 비해 경기는 비교적 느리고 매끈하다는 점을 들면서 “서도 산타령은 경기산타령의 변형”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북한 학자들이 서도의 사거리를 주장하는 것과 대조를 보이는 대목이다. 경기나 서도 할 것 없이《산타령》은 오랜 역사와 음악적으로 다양한 특징들을 지니고 전승되어 오는 전통의 소리이다. 자칫 이에 대한 보존정책이나 전승과정을 소홀히 했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소중한 자산을 잃을 뻔했던 종목이기도 한 것이다. 국가에서는 1969년, 《산타령》을 무형문화재 19호로 지정하면서 뚝섬패의 한인학 후계자인 김태봉, 과천패 소완준의 제자 정득만, 왕십리패 이명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