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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정도전, 왜구에 쫓겨 고향 영주를 떠나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11]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避寇難吾土(피구난오토)

도적을 피하기 어려워 내 살던 땅을 떠나

 

攜家走異鄕(휴가주이향)

식구들을 이끌고 낯선 고장으로 옮겨가누나

 

荊榛行目蔽(형진행목폐)

가시넝쿨 앞길을 가로막고 눈앞을 가리니

 

桑梓耿難望(상재경난망)

상재(고향)는 눈에 선해 잊기 어렵네.

 

世險憐兒少(세험련아소)

세상이 이리 험난하니 어린아이들 가엽고

 

家貧仗友良(가빈장우량)

집마저 가난하니 어진 벗을 의지할 수밖에.

 

乾坤空自闊(건곤공자활)

천지는 부질없이 넓기만 하니

 

獨立興蒼茫(독립흥창망)

나 홀로 창망하게 섰노라.

 

정도전의 ‘도적을 피하다(避寇)’는 시입니다. 정도전은 나주로 유배되었다가, 3년이 지나 유배가 완화되어 고향에서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고향 영주로 와서 4년을 지내는데, 이 때 왜구가 쳐들어와 왜구에 쫓겨 고향을 떠나면서 쓴 시입니다. 아니? 내륙지방인 영주까지 왜구가 쳐들어오다니요! 당시 고려의 국방과 치안은 엉망이라 왜구가 영주까지 쳐들어와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 충청, 호남, 영남 지방 중 왜구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요. 당연히 해안 지방은 멀리 평안도, 함경도까지도 왜구에게 짓밟히고요. 고려가 바다의 해적들에게만 당하였습니까? 중국의 홍건적이 침입해왔을 때는 공민왕은 경북 안동까지 피난가야 했습니다.

 

고려가 아무리 허약해졌다고 하더라도 일개 도적의 무리에게 이렇게 당하다니, 참으로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사실 군사가 있긴 있었지요. 그렇지만 대부분 권문세족의 사병이었고, 국가의 기간 병사들은 정권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하지 왜구들에게까지 나가 싸울 정도가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국가의 총체적 난맥상에서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며 신흥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기도 하였구요. 또한 그렇기에 정도전도 자신의 혁명사상을 실천할 수 있는 인물로 이성계가 적임자로 보고, 멀리 함경도로 이성계를 찾아간 것이기도 하구요.

 

 

조선이 건국하고 세종 때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하면서 왜구의 준동(蠢動)은 잦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막기만 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기에 부산포, 내이포, 염포를 열어 제한적으로 교역을 허락하고요. 그렇지만 조선은 고려가 소극적으로 취한 공도정책(空島政策)을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섬 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소탕할 자신이 없으니 아예 섬 주민들을 육지로 나오게 하고 섬을 비우는 것입니다.

 

이는 왜구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섬으로 도망가는 죄인들을 잡아들인다는 등 섬에까지 행정력을 미치게 하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고 아예 섬을 비운 것입니다. 울릉도 같은 큰 섬도 고종 때까지 섬을 비워두었으니까요. 그러니 일본놈들이 무인도인 독도를 자기들이 선점했으니 자기네 것이라고 떠드는 빌미를 제공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처럼 바다가 중요한 시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바다를 포기하고 오직 대륙의 중국만 쳐다보던 소극적인 조상들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장보고를 이어 이순신 장군이 있었습니다.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바다로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해양강국 대한민국의 미래를 꿈꾸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