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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보물 제639호 기사계첩 국보 지정 예고

왕실 하사품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궁중회화 첫 사례
「경진년 연행도첩」 등 5건은 보물 지정 예고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왕실 하사품이 완전하게 갖춰진 채 300년 넘게 풍산홍씨 후손가에 전래된 「기사계첩」(보물 제639호)을 국보로 지정 예고하고, 「경진년 연행도첩」 등 조선 시대 회화, 불경, 마애불 등 5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

 

보물 제639호 「기사계첩(耆社契帖)」(1978.12.7. 지정)은 1719년(숙종 45년) 59살이 된 숙종이 태조 이성계의 선례를 따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해 제작한 계첩(契帖)으로,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궁중회화다.

* 계첩(契帖): 행사에 참여한 관료들이 계를 조직해 만든 화첩으로, 보통 참석한 인원수대로 제작해 나눠 갖는 것이 풍습이었음. 오늘날 기념사진과 유사한 기능

* 기로소(耆老所): 70세 이상, 정2품 이상 직책을 가진 노년의 문관(文官)들을 우대하던 기관. 1719년 당시 숙종은 59살이었기 때문에 기로소에 들어갈 나이가 되지 않았으나, 태조 이성계가 70살 되기 전 60샇에 들어간 예에 따라 입소(入所)한 것임

 

 

행사는 1719년에 실시되었으나 계첩은 초상화를 그리는데, 시간이 걸려 1720년(숙종 46년)에 완성되었다. ‘기사계첩’은 기로신들에게 나눠줄 11첩과 기로소에 보관할 1첩을 포함해 모두 12첩이 제작되었다. 현재까지 박물관과 개인 소장 5건 정도가 전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 2017년도부터 실시한 보물 값어치 재평가 작업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 2019년 국보 제325호로 지정되었으며, 이번이 두 번째 국보 지정이다.

 

이번 예고 대상인 보물 제639호 「기사계첩」은 기로신 가운데 한 명인 좌참찬 임방(任埅, 1640∼1724)이 쓴 계첩의 서문과 경희궁 경현당(景賢堂) 사연(賜宴) 때 숙종이 지은 어제(御製), 대제학 김유(金楺, 1653∼1719)의 발문, 각 행사에 참여자 명단,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기로신 11명의 명단과 이들의 반신(半身) 초상화, 기로신들이 쓴 축시(祝詩), 계첩을 제작한 실무자 명단으로 구성되어 현재까지 알려진 다른 ‘기사계첩’과 구성이 유사하다.

* 계첩에 수록된 행사그림 순서:①어첩봉안도(御帖奉安圖): 경희궁 흥정당에서 기로소에 어첩을 봉안하러 가는 행렬②숭정전진하전도(崇政殿進賀箋圖): 이튿날인 2월 12일 기로신들이 경희궁 숭정전에서 진하례를 올리는 장면③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 4월 18일 경현당에서 임금이 기로신들에게 베푼 연회 광경④봉배귀사도(奉盃歸社圖): 기로신들이 경현당 석연에서 하사받은 은배(銀盃)를 들고 기로소로 돌아가는 행렬⑤기사사연도(耆社私宴圖): 기로신들이 기로소에서 연회를 행하는 모습

 

그러나 다른 사례에서는 볼 수 없는 ‘만퇴당장(晩退堂藏, 만퇴당 소장)’, ‘전가보장(傳家寶藏, 가문에 전해 소중히 간직함)’이라는 글씨가 수록되어 이 계첩이 1719년 당시 행사에 참여한 기로신 가운데 한 명이었던 홍만조(洪萬朝, 1645~1725)에게 하사되어 풍산홍씨 후손가에 대대로 전승되어 온 경위와 내력을 말해 준다.

* 홍만조: 조선 숙종 때 학자이자 관료. 호는 만퇴(晩退). 시호는 정익(貞翼). 본관 풍산(豊山). 1678년(숙종 4)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693년 강화유수, 동왕 2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형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거쳤음. 청렴하고 도량이 넓었다 하며, 묘소는 서산인 아산시 배방읍에 있음

 

 

 

이 계첩은 300년이 넘은 오랜 세월에도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이는 내함(內函), 호갑(護匣), 외궤(外櫃)로 이루어진 삼중(三重)의 보호장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화첩을 먼저 내함에 넣고 호갑을 두른 후, 외궤에 넣는 방식으로, 조선 왕실에서 민가에 내려준 물품의 차림새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는 왕실 하사품으로서 일괄로 갖추어진 매우 희소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제작수준도 높아 화첩의 완전성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보물 제639호 「기사계첩」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라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고 후에 고종(高宗)이 기로소에 입소할 때 모범이 되었다는 점,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하며, ▲기로신들의 친필(親筆) 글씨와 더불어 그림이 높은 완성도와 화격(畵格)을 갖추고 있어 현존하는 궁중회화를 대표할 만한 예술성도 갖추었다. 아울러 계첩과 동시기에 만들어진 함(내함, 호갑, 외궤) 역시 당시 왕실공예품 제작 기술에 대해서도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므로 함께 국보로 함께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 권상1의2(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諺解) 卷上一之二)》는 중국 당나라 승려 규봉(圭峰) 종밀(宗密, 780~841)의 초본(鈔本, 베낀 글)에 세조가 한글로 구결(口訣)한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1465년(세조 11년) 주자소(鑄字所)에서 금속활자인 ‘을유자(乙酉字)’로 펴낸 것으로 줄여서 ‘원각경(圓覺經)’이라고 부른다. 불교의 대승경전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 이후 절에서 수행을 위한 교과목 가운데 하나로 채택되어 널리 유통되었으며, 마음을 수행해 원만한 깨달음(원각, 圓覺)에 이르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을유자’는 을유년인 1465년에 주조한 금속활자로, 《원각경(언해)》을 펴내기 위해 한글 활자를 별도로 만들었으므로 이를 ‘을유한글자’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활자가 단정하지 못하다는 까닭으로 오래 쓰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1484년(성종 15년, 갑진년) 갑진자(甲辰字)를 새로 주조할 때 녹여서 사용했으므로, 종류와 현존 예가 극히 드물다. 더욱이 이 을유자와 을유한글자로 찍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은 완질(完帙)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전래본도 많지 않은 편이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 권상1의2》는 전래하는 판본이 적은 귀중본으로서, 15세기 국어학과 서지학, 금속활자 인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므로 보물로 지정할만한 값어치가 있다.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1(分類杜工部詩(諺解) 卷十一)》은 1481년(성종 12년)에 류윤겸(柳允謙, 1420~?), 조위(曹偉, 1454~1503) 등 홍문관 학자들과 의침(義砧, 15세기) 승려들이 왕명을 받아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두공부시(杜工部詩)’에 대해 여러 주석을 참고해 내용별로 분류하고 한글로 뒤쳐(번역) 편찬한 《분류두공부시(언해)》의 권11에 해당한 책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처음 펴낸 번역시집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 홍문관(弘文館): 조선시대 왕실의 경서, 서책의 처리 및 임금의 자문을 맡아보던 관청

 

 

1455년(세조 1년)에 주조된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로 찍었으며 같은 때 만든 한글 활자인 ‘을해한글자’도 써서 조선시대 금속활자 인쇄사에서도 중요한 자료다. 이러한 《분류두공부시(언해)》는 조선 전기 왕실에서 두보시(杜甫詩)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원작에 충실해 우리말로 정밀하고 아름답게 뒤친 조선 시대 한글번역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분류두공부시(언해)》권11은 을해자(乙亥字)와 을해자 병용(倂用) 한글금속활자로 펴낸 초간본으로서 그 가운데 권11은 기존에 알려진 자료에서 일부 떨어져 나간 부분을 확인할 수 있고, 반치음(半齒音, ㅿ), 방점(傍點), 아음(牙音, ㆁ) 등이 사용된 초기 한글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학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된다.

 

동일한 권차가 없다는 희소성과 한글 창제 이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값어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ㆍ관리할 필요가 있다.

 

「경진년 연행도첩(庚辰年 燕行圖帖)」은 경진년인 1760년, 11월 2일 한양에서 북경으로 출발해 이듬해 1761년 4월 6일 돌아온 동지사행(冬至使行)의 내용을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열람할 수 있도록 제작한 어람용(御覽用) 화첩이다. 사행단을 이끈 정사(正使)는 홍계희(洪啟禧, 1703~1771)가, 부사(副使)는 조영진(趙榮進, 1703~1775), 서장관(書狀官)은 이휘중(李徽中, 1715~?)이 맡았고 화원으로 이필성(李必成)이 파견되었다.

 

 

 

화첩에 수록된 홍계희의 발문에 영조가 사행단이 떠나기 전 홍계희를 불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잡혀있던 심양관의 옛터를 자세히 살피라는 명을 내렸다는 내용과 그밖에 참고할만한 사적(史蹟)도 그려서 올린 경위가 자세히 기록되었다. 그 결과, 이 화첩에는 그가 화가들을 데리고 직접 현장을 찾아간 심양관(瀋陽館)과 산해관(山海關)의 옛터, 북경의 문묘(文廟) 등 유교 사적의 그림이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 동지사행: 조선 시대 중국에 파견하는 사신(使臣) 중 하나로, 대개 12월 동지(冬至) 절기를 전후로 하여 파견했기 때문에 동지사(冬至使) 또는 동지사행이라고 하였음

* 심양관: 1637년(인조 15) 청나라 수도 심양에 건립되었던 조선의 해외 공관으로, 일명 고려관(高麗 館)이라고도 불렀음. 1637~1644년 동안 청에 볼모로 잡혀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거처했음

* 산해관: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교통ㆍ군사상 요지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중요한 관문 중 하나. 1644년 청나라 오삼계(吳三桂) 연합군이 이자성(李自成) 반란군과 격돌한 ‘산해관 전투’가 유명함

 

그림은 실제 경치를 그린 산수화와 건물의 배치를 그린 건축도로 나눌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한 부감법(俯瞰法)과, 평행사선형 투시도법 등 다양한 시점이 적용된 건물 형상은 입체적이고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달해주며, 명도가 높은 산뜻한 채색과 정교한 묘사는 18세기 궁중기록화의 수준 높은 면모를 잘 보여준다.

 

「경진년 연행도첩」은 제작 목적과 시기가 분명하고 영조의 어필(御筆, 임금의 글씨), 해당 유적지 장면, 그림과 관련된 도설(圖說), 설명식 발문 등이 일괄로 짝을 이뤄 사행의 일체를 이해할 수 있게 의도된 독특한 구성을 따르고 있다. 아울러 18세기 중반 궁중회화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작품의 성격 측면에서도 당시 시대상과 정치, 외교, 문화 등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자료로서 값어치가 높이 평가된다.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聞慶 鳳巖寺 磨崖彌勒如來坐像)」(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1979.1.25. 지정)은 1663년(현종 4)에 제작된 마애불로서, 경북 봉암사 옥석대(백운대라고도 함)에 있다. 제작 시기와 주관자, 존상(尊像) 이름은 풍계 명찰(楓溪 明察, 1640~1708)의 문집 《풍계집(楓溪集)》에 수록된 「환적당대사 행장(幻寂堂大師 行狀)」을 통해 확인된다. 명찰은 17세기 승려 환적당 의천(幻寂堂 義天)의 제자로, 이 책에 의천이 발원해 마애불을 조성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환적당 의천: 1603년(선조 36)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11세에 출가하여 88세 되던 1690년에 해인사 백련암에서 입적. 환적당이 봉암사에서 처음 수행한 것은 60세(1662년)부터 61세까지 로, 행장에 의하면 백운대에 이 마애미륵여래좌상을 조성하고, 사적비를 세웠으며 환 적암(幻寂庵)을 지었다고 함

 

 

 

좌상은 높이가 539.6cm, 너비가 502.6cm 정도며 머리 주변을 깊게 파서 광배 형상을 만들고, 위는 깊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얕은 돋을새김으로 처리했다. 둥글고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 부드러운 눈매, 단정히 다문 입 등이 자비롭고 인자한 인상을 풍긴다. 특히 얼굴과 자세, 착의법 등 세부표현에서 <나주 죽림사 세존괘불탱>(1622), <구례 화엄사 영산회괘불탱>(1653년) 등 17세기 괘불(掛佛) 표현요소를 찾아볼 수 있어 불화와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이 불상의 수인(手印, 불보살을 상징하는 손모양)은 미륵불의 수인 가운데 하나인 용화수인(龍華手印)으로, 두 손으로 긴 다발형의 꽃가지를 쥐고 있는 모양이다. 1663년이라는 뚜렷한 제작연대를 염두에 둘 때 마애불 도상이 확인된 기준작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은 문헌을 통해 제작 시기와 제작 동기, 주관자, 도상 등에 대해 고증이 가능한 몇 안 되는 마애불이라는 점, 조선 후기 마애불 연구뿐만 아니라 미륵불상의 도상 연구에서도 절대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ㆍ학술 값어치가 높다. 또한, 사실적인 조각수법과 당대 불화와 연관성이 있는 창의적 표현 등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값어치가 충분하다.

 

「‘미륵원’ 글씨 청동북(‘彌勒院’銘 金鼓)」은 측면에 오목새김으로 새겨진 글씨를 통해 1190년(고려 명종 20년) 미륵원(彌勒院)에 걸기 위해 제작한 금고(金鼓)임을 알 수 있다.

* 미륵원: 충남 공주에 있었던 절 인제원(仁濟院)의 후신(後身)으로, 고려 시대 잠시 운영되는 동안 쓰였던 절 이름으로 보이며,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펴낼 당시에 는 다시 원래의 이름인 인제원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됨

* 청동북: 절의 일상적 불교 의례에서 사용하는 불교의식구(佛敎儀式具)이자 범음구(梵音具)인 청동제 금고(金鼓)로서, 금구(禁口), 반자(盤子), 쇠북 등으로 불리며, 공양(供養) 시간을 알리거나 사 람을 모을 때 주로 사용함

 

 

 

현존하는 청동북은 공명구의 위치와 형태에 따라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누어지는데, 이중에서 「‘미륵원’ 명 청동북」은 뒷면이 뚫려 있는 형식으로, 이를 반자(盤子, 飯子, 半子, 判子, 般子)라고도 한다.

 

3개의 뉴(鈕, 손잡이)를 가진 전형적인 고려 시대 청동북으로, 안쪽에는 16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이 당좌(撞座)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당좌 안에는 14개의 연꽃 씨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데, 표면이 다소 마모되어 원래 금속색이 드러나 보이기도 하지만, 얕게 도드라진 돋을새김으로 표현된 연꽃잎들의 배치가 균형감 있게 잘 구성되어 있다.

 

「‘미륵원’명 청동북」은 12세기 청동북 가운데 비교적 큰 크기의 대형 청동북이며, 무늬의 조각 솜씨가 좋고 주조 기법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청동북의 제작 기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확실한 제작 연대와 명칭, 발원자와 절 이름 등이 확인되는 귀중한 작품으로서, 보물로 지정하기에 충분하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지정 예고한 보물 제639호 「기사계첩」 등 6건에 대해 30일 동안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ㆍ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