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최근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매우 많다. 내지(일본) 및 구미의 문제는 제쳐두고 특히 내 고향 조선의 최근 사태 가운데 매우 유감스런 일이 많다. 우리들 동지가 이전부터 희망하던 동양의 평화를 핵심으로 하는 한일합병의 대사업은 사실 이토히로부미 공(公)을 중심으로 메이지천황의 성지(聖旨)를 도와 이뤄진 것이다. 더구나 유신(維新)의 공로자인 이토 공이 조선인에 의해 쓰러져 범상치 않은 희생을 지불한 것은 지금도 국내외인의 기억에 새로운 바다. 우리는 지금 무슨 얼굴로 지하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 공을 대할 것인가? 메이지천황의 재위 중 이토 공이 살아있을 때는 충성심이 인정되어 어쩌면 일한동화(日韓同化)의 공덕이 곧바로 이뤄질 것으로 마음속으로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십 수 년이 지난 지금 조국(일본)을 향해 반기를 드는 무리가 나타난 것은 정치가 황폐해진 까닭이 아닐까?”
▲ 오사카매일신문 1919.8.6 1면 기사 송병준의 (동경전화)대담 “조선의 제2 유신”
지하에서 이토히로부미를 볼 면목이 없다는 말을 한 사람은 친일파 송병준이다. 그는 1919년 8월 ‘오사카 매일신문’에서 위와 같이 조국 일본을 위해 피를 토하는 심사로 조선에 대해 분개했다. 최근 ‘친일‧미화’ 논란의 한 중심에 서 있는 교학사 교과서 문제를 바라보면서 아직도 이 땅에는 제2, 제3의 송병준 정신을 이어 가는 사람들이 살아있고 그도 모자라 교과서 집필까지 관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크다.
교학사 교과서의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지난 10일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등 4개 역사단체 학자들이 모여 발표한 내용을 보면 역사적 사실 오류와 왜곡 사례는 무려 298건에 달한다. 이들은 “3일간 500건 이상의 오류를 찾았는데, 큰 것 중심으로 60% 정도로 줄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편향을 얘기하기 전에 학문적으로 기초가 흔들려 있는 불량·날림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다”고 지적했다.
색인에 안중근 의사는 없고 이토히로부미는 두 번 나와
4개 역사단체 학자들이 지적한 몇 개를 살펴보자. 먼저 책 뒤의 색인 목록에 “안중근 의사”는 빠져있고 “이토 히로부미”는 두 번이나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207쪽에 “일본은 한국병합을 실현하기 위해 의병들을 소탕해야했다. 의병들을 토벌하기 시작했다.”는 부분을 들어 의병을 소탕이나 토벌 대상으로 보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247쪽에 “1938년 지원병령을 시작으로 1943년 학도지원병제, 1944년 징병제를 실시하여 30만 명이 넘는 한국청년들을 강제 징집하였다. 1939년 국민징용령을 공포하고 1944년 강제징용을 실시하여 70만 여명 이상의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강제동원규모를 일본의 공식 통계 80여 만 명보다도 적게 기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근현대사 부분 뿐만이 아니다. 교학사 교과서 46쪽에 신라 말에 “유교 정치 이념을 주장하는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전문가들은 이러한 기술을 학계에 전혀 검증되지 않은 새 학설이라고 지적했다. 대한제국의 모든 토지가 기본적으로 황제 소유(198쪽)라는 주장도 토지국유론에 입각한 것으로 역사학계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라고 평했다.
교학사 교과서는 헌법 전문도 읽지 않은 수준
또 256쪽에 “1948년 7월17일 공포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명시하였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제헌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돼 있다. 임정의 법통이 아니라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이고, 교학사의 서술은 헌법 전문도 확인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기술한 중대한 오류라는 지적이 나왔다.
하일식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은 “이 교과서에서만 새로운 학설이 나온다. 유교 정치를 주장하는 것이 신라 말의 새로운 사상으로 대두됐다고 썼는데, 실제 시험에선 이렇게 답하면 오답”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과서는 보수적이어야 한다. 자기 학설이 아니라, 수없이 많이 쌓인 논문 등을 수렴해서 가장 공감대가 큰 내용을 교과서에 쓰는 것”이라며 “수정·보완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고, 정부기관도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교과서의 시각이 일본시각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교학사 교과서는 관동대지진 부분에서 “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는 참사를 당하였다”고 간략히 서술했다. 그러나 일본의 극우 성향 후소샤 교과서가 “주민 자경단 등이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기술한 것과 단순 비교해도 교학사 교과서는 중차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관동대지진에서 “조선인 살해”사실을 빼고 기술한다는 것은 한국인의 입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러한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관동대지진을 다룰 까닭도 없는 것이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범 고바야카와 히데오 회고록의 원제목은 ‘민후조락사건’이고 본문에서도 ‘민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교학사 교과서는 이를 ‘민비조락사건’이라고 낮춰 부른 점도 지적되었다.
이준식 연세대 교수는 " 이 교과서는 이승만을 위한 교과서"라고 비판했다. 특히 5단원은 절반이 독립운동사인데 전체 68쪽 중 11쪽에 이승만의 이름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290쪽의 임시정부 승인운동과 이승만에 대한 서술 부분에서는 임시정부 승인운동의 주체는 이승만이 아니고 임시정부인데, 마치 이승만이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것처럼 왜곡 서술한 점이 지적됐다.
일제강점기를 식민지가 아니라 다민족·다문화사회라고?
그러면서 이 교수는 “뉴라이트 교과서 검정 통과는 제2의 국치”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일제강점기를 ‘융합주의’로 표현한 데 대해 “한국 근대사를 30년 이상 공부한 나도 처음 듣는 말”이라며 “뉴라이트가 보기에 일제강점기는 식민지가 아니라 다민족·다문화사회 정도인 것 같다. 자신들의 지론인 식민지 근대화론을 퍼뜨리겠다는 검은 속내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과 이승만이 임정 대통령으로 취임한 9월을 임시정부 정식 출범 시기로 구분한 것과 관련, “대한민국의 유일한 정통으로 이승만을 부각시키고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미화하기 위해 다섯 달 전에 이미 출범한 임시정부 역사를 마음대로 변조했다.”며 “한 사람의 행적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교과서는 공산주의 국가의 교과서 말고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역사적 사실 왜곡·오류 투성이, 서남수 교육부 장관도 시인
지난달 30일 최종 검정 결과 발표 직후부터 교학사 교과서는 친일 문제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띄우기 논란에 휩싸였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 왜곡·오류는 물론 학계에서도 검증되지 않은 학설이 담긴 내용이 무더기로 지적되었다. 또한 정확한 출처 표시 없이 마구 긁어 쓴 자료와 사진까지 더해 표절 의혹까지 불거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1일 서남수 교육부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부랴부랴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 대해 전면 수정·보완을 하겠다고 나섰다. 교과서 검정은 국사편찬위에 맡긴 위임사무라며 거리를 두던 교육부가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재검토를 발표한 것은 사회 각계에서 터져 나오는 교학사 교과서의 문제점과 의혹들, 비난 여론이 심각하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의 우선 전면 재검토 방침은 사실상 부실 검정을 인정한 것이지만 수백 개의 오류 부분을 10월 말까지 잡는 것은 역부족일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몇 백 개의 오류도 오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교학사 교과서 집필자들이 갖고 있는 편협되지 않은 역사관이이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 시대’를 보는 시각은 문제가 많다는 소리가 크다.
이준식 교수의 지적처럼 이번 교학사 교과서의 기술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퍼뜨리겠다는 검은 속내”라면 심각한 문제이다. 이것은 한일병탄의 주범 명치왕을 찬양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성인(聖人)으로 추앙하는 송병준의 사고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학사 교과서 문제를 보면서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숨져간 순국선열들께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오류투성이에다가 역사관 마저 없는 교학사 교과서는 수정보완이 아니라 폐기해야만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