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 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
이는 이봉창 의사가 상해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가 한 유명한 말이다. 오늘은 이봉창 의사가 1932년 1월 8일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진 날이다. 이날 거사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선생의 장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본 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폭탄을 던져 타격을 가하려 했던 일은 한국 독립 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었다.
▲ 고려문을 통해 들어 가면 이봉창의사가 거사를 일으킨 사쿠라다문이 있다.
▲ 벚꽃 천지라해서 붙은 사쿠라다(櫻田)에 세운 문이라 사쿠라다문이라 부르며 이 문을 다른 말로는고려문이라 부른다. 이 앞에서 이봉창 의사가 일왕의 귀가를 기다리다 폭탄을 던졌다.
이봉창 의사의 도쿄 거사는 중국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에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했다. 일본이 일으킨 이른바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야기된 한중 양국민의 감정 대립도 깨끗이 씻겨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일본 도쿄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의 길을 걸었다. 이봉창 의사의 유해는 1946년 서울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제83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일을 맞아 8일(목) 오전 11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문국진) 주관으로 열리는 기념식을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서는 그의 독립의지를 추모하는 기념식이 열린다.
▲ 이곳 일왕이 사는 황거 앞 이중교(니쥬바시) 앞에서는 김지섭 의사도 폭탄을 던졌다(1924년 1월 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