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는 기쁠거야 믿고장을 왔다갔다 겨레는 슬프네 못 오가는 믿나라니 빨리들 그날은 와라 늙어가는 이 몸이니. * 믿고장 : 고향 * 믿나라 : 조국, 본국, 모국, 고국 이전과 달리 오늘날 남과 북 사이가 쉽게 오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겨레보다 나라가 앞설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법이다. 북도 더 ‘겨레’를 앞세울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통일이 하루 늦으면 통일을 못 본 채 죽어가는 분들이 많아진다. 통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다.
갈 가는 밤 눈 감으면 어머니 뒷모습 뚝닥뚝닥 맑은 소리 속마음 가셔 주네 이곳은 아닌 남의 땅 믿고장은 돋고 솟네. * 갈 : 가을 돌아가신 어머니는 백의민족 자손이어선지 빨래(어머니는 ‘서답’이라 하셨다)를 쉰 일이 없었다. 그 빨래도 하얗게 될 때까지 양잿물로 삶았고 방망이로 치고 하였다. 선친은 하얀 샤츠가 아니면 안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빨래는 오늘날과는 달리 세탁기가 없어 중노동이었다.
가을은 가을내꽃 온몸에 받아 들여 오늘도 밤을 새워 술독을 소리하고 두둥둥 보름달 떴네 술맛이 으뜸이네. * 가을내꽃: 국화꽃 예나 지금이나 가윗날을 즐기는 일은 본국이나 나라밖이나 다름없다. 우리 선친은 국화꽃을 아주 싫어했다. 국화꽃은 일왕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을이면 국화주는 즐겨 드시었다. 드신 뒤에는 일왕을 삼켰다고 씽긋 웃으신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일본은 교포들에게 천대와 멸시와 차별의 지옥이었기 때문이다.
1956년 2월 11일자 동아일보에는 서울 남산초등학교학생들이 자신들의 도시락을 거둬와 불쌍한 이들에게 전해달라는 이야길 듣고 남산소재 ‘군경유자녀보육원’에 보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들은 4학년 여학생들로 60명의 도시락을 반으로 나눠 30명분은 교실에서 나눠 먹고 30명분의 도시락은 신문사로 직접 들고 온 것이지요.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여학생들의 “도시락 기부” 기사는 신선하다 못해 흥미롭기 까지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학교급식이라는 형태로 탈바꿈되어 당시 아이들처럼 자기 먹을 것을 줄여가면서 불쌍한 이를 돕는 일은 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도시락 시대에는 옆 친구를 생각해서 나눠 먹는 배려의 마음이 생기지만 급식 시대에는 똑같이 담아주는 음식을 먹기 때문에 옆 친구는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당시에는 날씨가 추워지면 교실에 조개탄을 때는 난로를 설치했는데 이 위에는 어김없이 도시락을 포개어 올려 두었습니다. 오늘날처럼 보온 도시락이 아니라서 차디찬 양은 도시락은 비로소 난로 위에서 따뜻하게 데워졌지요. 그렇지만 차곡차곡 도시락을 올려두기 때문에 자칫하면
우리 겨레는 한옥이란 주거공간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한옥은 앞에 마당, 뒤뜰엔 정원을 두었지요. 또 마당에는 잔디를 깔거나 꽃, 나무들을 심지 않고 빈 공간으로 놓아둡니다. 우리 겨레의 슬기로움이 담겨있는 그 까닭을 알아볼까요. 그렇게 구조를 만든 가장 큰 까닭은 바로 자연을 활용한 과학적 삶의 지혜입니다. 마당을 빈 공간으로 놔두면 여름에 햇볕에 달궈져 뜨거운 공기가 만들어져 위로 올라갑니다. 이때 마당과 꽃과 나무가 있는 뒤뜰 사이엔 기압차가 생겨 바람이 불게 되지요. 그 바람은 대청마루를 빠르게 통과함으로써 시원하게 여름을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빈 공간의 마당은 수시로 다양한 삶의 형태가 전개되는 곳으로 다시 태어나곤 합니다. 우선 마당은 평소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집안에 행사가 있으면 행사장이 됩니다. 혼례가 있으면 혼례식장, 상사가 나면 장례식장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또 가을철 추수 때가 되면 마당에서는 타작을 하기도 합니다. 한 가지 더 마당은 조명장치의 구실도 합니다. 한옥은 처마가 깊어 처마 아랫부분이 어두
그릇은 우리 삶에 필요한 먹을 것, 마실 것은 물론 살아가는데 요긴한 것들을 담는 도구이지요. 오늘 날에는 값싼 플라스틱 따위로 만든 것도 많고 도자기라 하더라도 공장에서 대량생산 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같은 것은 만든 이의 마음과 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고려청자 가운데 강진청자박물관에서 가장 귀한 작품을 꼽는다면 “꽃무늬참외모양주전자(청자상감모란국화연화문 과형주자)"가 있지요. 이름처럼 이 청자는 참외 모양의 몸통에 세로로 골을 파낸 뒤 손잡이와 물대를 붙인 주전자입니다. 참외 줄기 모양을 하고 있는 청자주전자의 손잡이도 재미있습니다. 또한 물을 따르는 물대는 연잎을 말은 것처럼 잎맥을 음각하여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꽃무늬참외모양주전자”는 13세기 작품으로 고려시대 귀족사회의 화려함과 서정적 취향을 엿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을 만든 이름 모를 도공의 뛰어난 미적 감각이 빚어낸 멋스러움을 느낄 수 있지요. 강진청자박물관은 한국 청자의 변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설립한 국내 유일한
아들아 옥중의 아들아 목숨이 경각인 아들아 칼이든 총이든 당당히 받아라 이 어미 밤새 네 수의 지으며 결코 울지 않았다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 그보다 더한 영광 없을 지어니 비굴치 말고 당당히 왜놈 순사들 호령하며 생을 마감하라” - 이윤옥, “조마리아 애국지사를 기리며” 시 일부- 이 시인은 사형을 앞둔 아들을 둔 어머니 조마리아의 심경이 되어 이 시를 썼노라고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에서 말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조선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한 날입니다. 이러한 거사를 감행하기까지에는 당당한 어머니 조마리아 애국지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마리아 애국지사는 자식이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음에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아들에게 말합니다. 왜놈 순사를 호령하며 당당하게 생을 마감하라고 말입니다. 평범한 어머니라면 울고불고 했을 테지만 조마리아 애국지사는 “밤새 자식의 수의 지으며 결코 울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예전 시골집 천장에서는 밤이면 쥐들이 달리기를 했습니다. 그러니 천장은 으레 쥐 오줌으로 얼룩져 있었지요. 그러다가 쥐가 방으로 들어오면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은 혼비백산 하고 아버지와 형은 몽둥이와 부대자루를 들고 쥐를 잡으려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그런데 이 쥐들은 병을 옮기는 것은 물론 한해에 예닐곱 번, 한번에 6~9마리의 새끼를 낳아 곡식을 먹어대니 식량이 모자랐던 우리에겐 그야말로 “박멸”의 대상이었지요. 그래서 50~60년대에는 학생들에게 쥐를 잡아 그 꼬리를 잘라 오라는 지시도 있었습니다. 또 쥐약 놓는 날을 정해 반상회 또는 가두방송을 통해 온 나라가 일제히 쥐약을 놓도록 독려했습니다. 쥐약 말고 쥐덫과 쥐끈끈이도 쥐 잡는 도구로 활용되었지요. 그런데 그놈의 쥐는 얼마나 영리했던지 쥐끈끈이는 건너뛰고, 쥐덫은 피하고 약을 버무린 음식은 먹지 않아 사람 인(人) 자를 써서 “人쥐”라 하기도 했습니다. 쥐에
예전 한자로 쓰인 편액(현판)들을 보면 모두 글씨가 오른쪽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 예로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은 물론 순천 선암사 뒷간 한글편액도 역시 오른쪽부터 쓰였지요. 그런데 한양 성곽 4대문의 하나인 숙정문과 4소문의 하나인 혜화문은 왼쪽부터 쓰였습니다. 최근 한양 성곽나들이를 다녀온 분들이 이에 대해 의문을 던졌지요. 원래 문화재 복원은 원형대로 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1396년 완공된 숙정문이나 혜화문의 편액도 당연히 오른쪽부터 쓰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숙정문은 1976년, 혜화문은 1992년 복원하면서 편액도 새로 만들어 달았습니다. 그때 복원의 주체들과 편액을 만들었던 장인들이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라 현대에 맞춰 왼쪽부터 쓰기로 했다고 합니다. 상징성을 고려해서 한글로 달자며 한글단체가 강력히 주장했는데도 광화문 편액은 굳이 원형대로를 고집하며 한자로 써 달았는데 숙정문과 혜화분 복원 때는 왜 이
대궐에서 임금이 부르시던 날 紫極承恩日 누런 꽃을 술에 띄어 놓았네. 黃花泛酒時 이제 대 여섯 친척과 함께 모여 一堂親五六 태평세월을 지내자고 기약하네. 同樂太平期 위는 조선 중기의 문신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이 선조 8년(1574) 중양절에 친지, 식구들과 함께 잔치를 하면서 읊은 시입니다. 을사사화로 십 수 년 귀양살이를 한 그가 이제 평안하게 말년을 지내니 감회가 새로워 쓴 것입니다. 미암은 16세기 후반 사회상을 특히 선비들의 세상살이를 잘 알게 하는 미암일기(보물 제260호)를 남겼는데 조선시대 일기의 백미로 꼽힙니다. 그런데 이 미암의 시에 뛰어난 여류시인이었던 그의 부인 송덕봉이 화답하는 시를 짓습니다. 지난날 남과 북으로 갈리었을 때 어찌 이런 날이 있을 줄 알았겠소. 맑은 가을 좋은 시절에 만나니 천리길이라도 함께 하기를 기약합니다. 역시 미암의 부인도 귀양에서 풀린 남편을 맞아 기쁨을 노래합니다. 오늘은 24절기의 하나로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며, 명절의 하나인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입니다. 중양절은 양수 9가 두 번 겹친 날로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