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햇빛 아래 들판은 젊은이 것 깊어갈 더운 철을 아쉬워 않으련만 처녀의 젖가슴인양 붉게 돋은 근화(槿花)꽃 * 근화(槿花)꽃 : 무궁화
애국지사 이병희(李丙禧, 1918.1.14~2012.8.2) 여사가 94살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2012년 8월 2일 고통을 받아왔던 병마 탓으로 세상을 뜬 이병희 여사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서 영면에 드셨습니다. 이병희 여사는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던 열여섯 살 때 ‘종연방적’에 들어가 500여 명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잡혀 4년 반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것이 여사의 항일독립운동 시작입니다. 감옥에서 나온 뒤 1940년 북경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하고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아 활동하던 중 1943년 왜경에 잡혀 북경감옥에 구금되었습니다. 이병희 여사는 1944년 1월 11일 석방되었는데 그 닷새 뒤인 1월 16일 함께 옥살이를 하던 이육사가 옥중 순국을 하자 그 유품과 주검 수습을 이병희 여사가 맡았습니다. 이때 이병희 여사는 육사의 주검을 화장한 뒤 해방 후 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우리는 드디어 잉크와 펜을 쓰게 되었습니다. 교복과 더불어 잉크의 사용은 우리가 드디어 중학생이 됐음을 알려준 것이었지요. 자그마하고 네모난 잉크병에 스폰지를 넣고 거기에 잉크를 부은 다음 펜으로 잉크를 뭍혀 쓰던 글씨. 하지만, 잉크와 펜에 익숙하지 못했기에 책상과 교실 바닥 심지어는 교복까지 잉크로 범벅이 되곤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새 펜촉은 자꾸 공책에 구멍을 냈고. 낡아서 무뎌진 펜촉은 잉크가 잘 번져서 곤혹스러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은 연애편지를 쓸 양이면 정성스럼게 그리고 손에 잔뜩 힘을 주어가며 쓰고 또 쓰곤 했지요. 물론 당시 쓰기 편리한 만년필도 있었지만 만년필은 값이 비쌌기에 부잣집 아이들만 썼을뿐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쁜 글씨를 쓰려면 만년필이 아닌 펜으로 글씨연습을 해야 한다고 위안을 삼기도 했지요. 이제 학생들은 잉크와 펜이 아닌 볼펜을 쓰게되었으니 얼마나 편한 세상을 살게 된 것인지요? 잉크가 옷이나 손에 묻을 염려도 없고, 펜이 공책에 구멍을 내는 것을 걱정하지
지금은 무더위가 한복판에 놓여 있는 복중(伏中)입니다. 올해는 입추와 말복이 한날인 8월7일이지만 기온이 36도를 오르내리다 보니 연일 숨이 턱에 차오른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때 시원한 얼음골에 들어앉으면 뼛속까지 시원해지겠지요? 얼음골로 유명한 곳은 밀양 남명리 얼음골로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224호로 지정된 곳입니다. 이곳은 재약산(載藥山) 북쪽 중턱인 해발 600m의 계곡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밀양시청에서 동쪽으로 약 36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삼복더위에는 얼음이 얼고 삼동(三冬) 한겨울에는 얼음이 녹아 물에 더운 김이 오른다고 해서 ‘밀양의 신비한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여름에 얼음이 어는 지대는 약 3,000평쯤 되는 돌밭으로 해마다 6월 중순부터 바위 틈새에서 얼음이 얼기 시작하여 더위가 심해질수록 얼음이 더 많아지는데 삼복(三伏) 시기가 되면 그 절정에 이른다고 하지요. 따라서 얼음골 일대의 초목은 늦
서양 현악기의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바이올린입니다. 4줄의 바이올린은 음역이 넓어 독주, 합주, 관현악에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악기지요. 이와 비슷한 우리 악기는 해금입니다. 똑같이 줄을 문질러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이지만, 4줄의 바이올린과는 달리 해금은 오로지 두 줄만으로 기막힌 소리를 연주합니다. 오직 줄을 잡는 손의 위치와 줄을 당기는 강약에 따라 음높이가 정해지기에 연주하기가 까다롭지만 그 환상의 소리는 특히 요즘 현대인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해금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연주형태였던 삼현육각을 비롯하여 웬만한 합주 자리에는 빠지지 않지요. 그런가 하면 서양 현악기 가운데 비교적 거친듯하면서 낮은 음빛깔을 지닌 첼로가 있습니다. 첼로의 낮은 소리는 다른 소리를 감싸 안는 느낌을 주지요. 우리 국악에도 그런 악기가 있는데 바로 아쟁입니다. 다만, 아쟁은 명주실 현을 개나리 활대로 문질러 내기에 금속성 줄을 쓰는 첼로보다는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관악기 가운데는 대금과 플루트가 비슷합니다. 똑같이 가로로 부는 악기인데 음빛깔이 부드럽고 맑아 가락 연주
“멸종위기에 놓인 해오라비난초가 30일 오전 경기도 포천시 국립수목원에서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자생지에 울타리를 치고 이 식물의 개체수를 늘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국립수목원 식물보전복원연구실 관계자는 “개체수가 매우 적고 꽃이 아름다운 해오라비난초의 자생지 중 한곳은 사유지여서 보호에 어려움이 있다”며 “멸종위기 생물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30일 한겨레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해오라비난초 자생지를 발견하여 울타리를 치고 보호하고 있다는 얘기이지요. 이렇게 귀하신 몸 해오라비난초는 양지쪽 습지에 자라며, 15~40cm 가량되는 가느다란 줄기에 꽃만 달려있는 듯 합니다. 날아오르는 해오라기처럼 날개를 편 하얀 해오라비난초는 멸종위기종인데 해오래비란초, 해오리란, 해오라기란이란 별명도 있습니다. 들꽃 사진가들의 얘기를 들으면 해로라기난초 사진을 찍을 때 꽃 대부분이 흰색이라 조리개를 어느정도 조여도 살짝 날아가 버리고만다고 합니다. 반면에 전체를 선명하게 찍으려고 너무 조여버리면 뒷배경이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 그리 예쁘지 않다고 하지요. 역시 멸종위기종이어서 그 자태를 잘 보녀주지 않는 이 녀석은 사진으로도 흔적을
오늘은 중복, 뉴스에는 온통 불볕더위 가마솥더위, 폭염, 찜통더위 같은 말들뿐입니다. 어제밤도 열대야로 고생하신 분이 많을 테지요. 이때 우리는 “더위사냥”을 합니다. 그런데 “더위사냥”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지금이야 선풍기는 물론 에어컨까지 동원해서 비교적 시원한 환경 속에서 살지만, 예전 사람들은 더위가 심해지면 “이열치열”로 ”더위사냥"을 했습니다. 이열치열에는 음식으로 하는 이열치열과 일을 함으로써 다스리는 이열치열이 있지요. 먼저 음식으로 하는 이열치열은 뜨거운 삼계탕, 보신탕, 추어탕, 용봉탕(용 대신 잉어나 자라를 쓰고 봉황 대신 묶은 닭을 써서 만든 탕) 따위로 몸을 데워주어 여름 타는 증세를 예방해 줍니다. 그리고 일로 하는 이열치열은 양반도 팔을 걷어붙이고 김매기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밖에 옷을 훌훌 벗어버릴 수 없었던 선비들은 냇가에 앉아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으로 위안을 삼았고, 백사장에서 모래찜질도 했지요. 그러나 여기 철학적인 더위사냥도 있습니다. 9세기 동산양개 선사는 제자가 더위를 피할 방법을 묻자 “너 자신이 더위가 되어라.”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아닐
자신의 몸을 불태워 세상의 빛이 되는 양초가 있습니다. 그 양초는 이제 효용성이 줄어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지만, 예전엔 어느 집이나 꼭 있어야 하는 것이었지요. 지금과 같지 않고 심심하면 정전이 되던 그때 “얼른 초를 찾아 불을 켜라.”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아직도 제 귀에 생생합니다. 양초는 파라핀이나 밀랍처럼 적당한 온도에서 녹는 가연성(可燃性) 고체를 원통형 모양으로 만들어, 가운데에 무명 같은 심지를 넣은 불을 밝히기 위한 연료였지요. 양초가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옛날부터 밀랍이 알려졌으며, 뭄바이나 그리스의 유적, 중국의 옛 무덤에서 청동으로 만든 촛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기원전 3세기에는 이미 썼을 것으로 봅니다. 그 양초는 예전 60~70년대 까지만 해도 집들이나 개업 선물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촛불이 주변을 환하게 밝히듯 집이나 가게가 크게 일어서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최근엔 정전이 거의 없어서 양촛불을 켜고 자다 불이 났다는 뉴스 같은 것은 별로 없지만, 그대신 촛불집회 이야기는 한동안 자주 듣곤 했지요. 국외로 눈
“너를 열고 싶은 곳에서, 너에게로 닿고 싶을 때 아무도 모르는 저 은밀한 해제의 지점에서 쇠 나비 한 마리가 방금 날개를 일으켰다는 일이다 그의 차가운 두 닢이 바스락거리기라도 하듯이 한번은 펼쳐 주어야만, 나는 너에게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 ‘경첩’, 정윤천 - 예부터 우리 겨레가 써오던 목가구들은 튼튼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목가구를 더욱 목가구답게 하는 데는 두석장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나요? 목가구나 건물에 붙여서 이음새 부분을 더 튼튼하게 하는 부품 또는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 따위의 금속제 장식을 총칭하여 장석(裝錫)이라고 하는데, 이 가운데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황동(놋쇠)으로 장석을 만드는 장인을 “두석장(豆錫匠)”이라고 부릅니다. 장석은 그 자체가 완전한 하나의 물품이 되지 못하고 한갓 부품에 지나지 않아서 소목장의 주문에 따라 특별히 만들어지지요. 하지만, 장석은 아름다운 장식물에 그치지 않고 가구의 이음새를 견고하게 하며 여닫이 기능을 원활하게 해 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 때문에 두석장은 미적 감각과 함께 고도의 기술을
“연호(年號)”란 임금이 즉위한 해에 붙이던 이름이며, 해의 차례를 나타내려고 붙이는 이름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예수가 태어난 해를 원년으로 하는 “서기(西紀)”를 쓰고 있지요. 그런데 서기 이전에는 “정삭(正朔)” 곧 중국의 달력을 사용하여 중국의 연호를 같이 썼습니다. 신라는 물론 고려의 대부분과 조선에서도 중국의 연호를 썼는데 자주적인 생각이 강하던 때는 독자적인 연호를 쓰기도 했지요. 특히 강성한 나라를 세워 넓은 나라땅을 가졌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즉위한 391년부터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써서 문헌상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로 기록됩니다. 나라를 세워 멸망할 때까지 내내 독자적인 연호를 쓴 것은 발해가 유일하며, 신라는 진흥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 고려는 태조 왕건 이후 4대 광종까지만 독자적인 연호를 썼습니다.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명(明)나라의 제후국이라 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않다가 1895년부터 고종이 독자적인 연호 “건양(建陽)”과 “광무(光武)”를 썼는데 이마저도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독자적인 연호는 사라지고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제국의 연호를 쓰게 되었지요. 그러다 해방 뒤 1948년 9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