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39년(1763년) 12월 22일자에 《자성록(自醒錄)》이 보입니다. 자성록은 영조임금이 지은 것으로 “설밑에 《자성록》을 펴낸 것은 스스로 깨달으려는 것뿐만이 아니라, 뭇 신하들이 나를 깨우쳐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지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절대군주인 임금이 이렇게 설밑을 맞아 자성하는 모습을 보이니 그 신하들은 어떠하겠습니까? 내일모레면 이제 신묘년 토끼해도 끝이 납니다. 여러분은 올 한해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 운수대통하신 분들도 계시고 또 반대로 운이 닿지 않아 전전긍긍하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누구에게나 태양은 골고루 비춘다고 합니다. 특히 운이 모자라 어려운 한 해였다면 새해에는 꼭 운수대통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행운이 넘친 분들은 어려운 이웃들을 생각해 주는 새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영조임금의 ‘자성록’이야말로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오늘 우리가 되짚어봐야 할 거울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부처의 속뜻과 예수의 바람은 모두 한 가지 / 세상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라는 것이지 / / 뎅그렁 뎅그렁 / 산사의 종소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보면 가 등장합니다. 초랭이는 여기서 양반의 하인으로 등장하는 인물인데 초랑이ㆍ초란이ㆍ초라니라고도 합니다. 이 초랭이는 무색 바지저고리에 쾌자((快子, 옛 군복의 일종으로 등 가운데 부분을 길게 째고 소매는 없는 옷)를 입고 머리에는 벙거지를 씁니다. 초랭이탈의 광대뼈는 입매를 감싸면서 왼편은 위쪽이 툭 불거져 있고 오른편은 아래쪽이 곡선의 볼주름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왼쪽 입매는 화난 듯 보이지만 오른쪽의 것은 웃는 모습이 되어 기가 막힌 불균형입니다. 또 앞으로 툭 불거져 나온 이마, 올챙이 눈에 동그랗게 파여 있는 동공(瞳孔-눈동자), 끝이 뭉툭하게 잘린 주먹코, 일그러진 언챙이 입을 비롯하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온갖 못생긴 것을 한데 모아 놓은 듯한 얼굴이지요. 그렇지만 놀이에서는 여인과 놀아나는 중을 비난하고, 양반과 선비를 우스갯거리로 만듭니다. 또 초랭이는 이런 못생긴 상과 함께 험악한 말씨로 양반을 공격합니다. 그러다가 양반의 호령이 떨어지면 얼른 웃는 입매를 짓습니다. 이 초랭이는 “하회별신
“조선 전기 문신인 허종이 함경도 일대를 수시로 쳐들어와 백성을 괴롭히는 오랑캐를 막으려고 의주에 도착합니다. 이에 백성은 허종을 환영하는 뜻에서 도미에 여러 가지 양념을 한 특별한 음식을 대접하였지요. 허종이 처음 먹는 음식이어서 백성에게 그 음식의 이름을 물으니 허종을 위하여 처음 만들었으므로 아직 이름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술과 미녀를 좋아하기로 유명한 허종은 음식의 맛이 매우 훌륭하여 술과 기생보다 더한 즐거움을 준다는 뜻으로 ‘승기악탕(勝妓樂湯)’이라고 불렀지요.” 위 내용은 1940년에 홍선표가 펴낸 ≪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에 나오는 승기악탕의 유래입니다. 이 승기악탕(勝妓樂湯)은 숭어 또는 잉어, 조기, 도미 따위의 생선을 구워 여러 가지 푸성귀(채소)와 ·고명을 넣어 함께 끓인 것으로 ‘승가기탕(勝佳妓湯)’ 또는 ‘도미면’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승기악탕은 책에 따라 조금씩 만드는 방법이나 재료가 다릅니다. 먼저 《규합총서》에 나온 ‘승기악탕’은 닭찜을 말합니다. 그러나 고종 때 잔칫상에 올라간 '승기악탕'은 숭어에 여러 가지 고기를 넣어 만든 탕
태종 5대손 단산수 이주경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가 황해도에 갔다가 구월산 도적에게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그 도적떼의 두목은 바로 임꺽정이었지요. 이때 끌려온 이주경이 명인임을 알아본 임꺽정은 이주경에게 피리를 불라고 합니다. 이에 이주경이 웅장한 우조부터 슬프고 처절한 계면조까지 불어 나가자 임꺽정과 부하들은 서로 붙들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주경은 무사히 풀려날 수가 있었다지요. 조선시대 음악 연주 형태의 바탕은 삼현육각이었습니다. 바로 김홍도의 그림 과 같은 모습이었지요. 그 모습을 보면 맨 왼쪽에 좌고, 그 오른쪽으로 장구와 두 대의 향피리, 대금,·해금이 연주합니다. 그런데 이 삼현육각은 향피리가 주도하는 형태입니다. 향피리는 한국 고유의 피리라는 뜻으로, 중국에서 전래한 당(唐)피리와 구분하려고 붙인 이름입니다. 향피리는 길이 27cm, 관의 안지름 1cm 정도인데 소리구멍은 앞에 7개, 뒤에 1개, 모두 8공(八孔)입니다. 전통음악 연주에 쓰는 피리는 향피리ㆍ세(細)피리ㆍ당(唐)피리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의 피리는 모두 관(管)에다 혀(속
“동지는 좋은 날이라 양기운(陽氣運)이 생기기 시작하는구나 특별히 팥죽 쑤어 이웃과 즐기리라 새 달력 널리 펴니 내년 절기 어떠한가 (중략) 사립문 닫았으니 초가집이 한가하다 짧은 해 저녁 되니 자연히 틈 없나니 등잔불 긴긴 밤에 길쌈을 힘써 하소 베틀 곁에 물레 놓고 틀고 타고 잣고 짜네” 11월령 일부입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스물한째 동지입니다. 동지(冬至)는 겨울에 이르렀다는 뜻인데 작은 설날 곧 아세(亞歲)라고도 하지요. 동지는 겨울의 중심으로 이날 밤이 가장 길다고 하는데 사실은 낮이 길어지면서 농가월령가 노래처럼 양기운이 점차 커지기 시작합니다. 눈이 오고 얼음이 얼면 모든 만물이 죽은 듯 잠잠하지만 슬슬 커지는 양기운과 함께 저멀리 봄기운이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지요. 추운 동지 즈음에 옛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만 돌본 것이 아니라 팥죽을 쑤어 이웃과 나누어 먹을 줄 알았음은 물론 그 팥죽을 고수레를 통해 가엾은 짐승들에게도 나눠주었습니다. 또 동지에는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나 시할머니에게 버선을 지어 선물하는 “동지헌말”이란 아름다운 풍속도 있었지요. 이날부
"물질하던 옷 벗어 말리며 / 가슴 속 저 밑바닥 속 / 한 줌 한도 꺼내 말린다 / 비바람 치는 날 / 바닷속 헤매며 따 올리던 꿈 / 누구에게 주려 했는가 / 오늘도 불턱에 지핀 장작불에 / 무명 옷 말리며 / 바람 잦길 비는 해녀 순이" - 김승기 ‘불턱’- “여기서 불 초멍 속말도 허구, 세상 돌아가는 말도 듣고 했쥬.” 제주 해녀는 붙턱에 대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불턱에서 불을 쬐면서 속에 있는 말들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말들도 얻어듣곤 했다는 것이지요. 제주 바닷가에 가면 불턱이라 하여 해녀들이 물질 하다가 물 밖에 나와 옷을 갈아입거나 쉬면서 공동체 의식을 다지던 곳이 있습니다. 보통은 제주에 많은 돌로 담을 쌓아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했지요. 예전 해녀들은 물소중이 또는 ‘잠수옷ㆍ잠녀옷ㆍ물옷’ 따위로 불렸던 옷을 입고 바다 속에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입고 벗기가 편하게 만들었던 이 물소중이는 자주 물 밖으로 나와 불을 쬐어 체온을 높여야 했지요. 그런 까닭으로 제주에는 바닷가 마을마다 여러 개의 불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고무잠수옷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고헌 박상진 의사의 일대기가 25분짜리 애니메이션으로 태어났습니다. 만화ㆍ애니메이션ㆍ게임분야 특성화고교인 울산애니원고등학교 2,3학년 학생 97명이 “고헌 박상진 의사, 이루지 못한 꿈”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어제(19일) 제작발표회를 열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학생들이 지난 2009년 11월부터 2년간 총 4만여 장에 담아냈지요. 박상진 (朴尙鎭, 1884∼1921) 의사(義士)는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사퇴한 뒤 1912년부터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세워 독립운동의 군자금 조달 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1915년 1월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고 이어 7월 15일에는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을 중심으로 결성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을 맡아 독립운동에 뛰어듭니다. 이후 그는 군자금을 모아 무기와 장비를 갖추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공화주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군자금 모금에 부호들이 협조하지 않자 이후로 강제모금을 추진하고 친일
“서울과 지방의 시소(試所, 과거를 치르던 곳)에서 보내온 낙복지(落幅紙)를 지금 서쪽 변방에 내려보내야 하겠습니다만, 겨울철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에 헐벗은 백성이 옷을 만들어 입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모든 벼슬아치에게 낙복지를 나누어 준 다음 옷을 만들어오도록 하여 변방에 보내도록 하소서.” 위 내용은 인조실록 19권, 6년(1628) 9월 17일 자 기록입니다, 낙복지란 과거 시험을 본 뒤 나온 불합격된 답안지를 말하는데 왜 변방에 보내라 했을까요? 예전 솜옷을 지을 때는 옷감과 옷감 사이에 솜을 넣고 꿰맸습니다. 이때 무턱대고 솜만 넣어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솜이 옷감 안에서 뭉치고 아래로 처집니다. 이를 막으려고 실로 듬성듬성 누비지만 이것으로 솜이 뭉치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낙복지를 활용하면 촘촘하게 누비지 않아도 솜이 미끄러지고 분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온 효과를 낼 수 있지요. 이는 닥나무 섬유가 여러 갈래로 켜켜이 얽혀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확실하게 막아 주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낙복지는 솜을 둔 표면이 울퉁불퉁해지는 것을 막아주
예전 황해도 장연군에 계림사(鷄林寺)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하룻밤만 자면 스님이 한 사람씩 사라지곤 해 절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고승이 이 말을 듣고는 닭 천 마리를 키우라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계림사는 닭 천 마리를 키웠는데 그 뒤론 스님이 사라지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천 마리의 닭이 스님들을 해친 한 발(길이를 잴 때, 두 팔을 잔뜩 벌린 길이)이나 되는 지네를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절의 이름이 계림사가 된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설화에서 옛 사람들은 지네가 대개 땅속이나 동굴, 오래된 절이나 사당 또는 대갓집의 대들보 속에 숨어 살면서 밤이면 슬그머니 나타나 독을 뿜어 사람들을 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네가 이런 악역을 맡게 된 것은, 옛 선인들이 지네가 안개와 구름을 일으키고 농사와 기후를 조절하며 인간의 생명과 질병을 다스리는 지하계의 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지네를 물리치는 동물이 왜 닭일까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닭이 어둠을 쫓고 새벽을 알
음식을 얹어 나르거나 방에 놓고 식탁으로 쓰는 상(床)의 종류를 소반(小盤)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전통집에서는 부엌과 밥을 먹는 방이 떨어져 있었고 식기는 무거운 놋그릇이나 사기그릇을 썼습니다. 따라서 소반은 나르기 쉽게 가볍고 튼튼한 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었지요. 그 소반은 모양과 만드는 방식에 차이가 있는데 나주와 통영 그리고 해주반이 유명했습니다. 이 가운데 통영반은 통영 특산물인 자개를 썼고, 해주반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조각을 했지요. 그에 견주어 나주반은 장식이나 화려한 조각을 자제하여 ‘간결하고 미끈한 다리’와 ‘견고함’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소반을 만들 때는 최소 10년 묵은 나무를 써야 합니다. 우리 전통 목공예는 나무의 진을 빼야 하는데 사람도 성질이 안 죽으면 살인도 나고 하듯이 나무도 성질이 안 죽으면 변형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진을 빼려면 나무를 베어다가 자연건조를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만든 소반에 옻칠을 해서 완성합니다. 나주반은 행자목과 춘양목이 가장 좋은 재료로 사용되었으며, 나무무늬를 살리려고 느티나무를 사용하기도 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