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손 나무 가랑잎은 늙었는데 몸내는 아가씨니 찾은 사람 발박아 님 사랑 돋우네 타거라 활활 타고서 마쪽 겨레 아뢰어라 *아기손 나무 : 단풍 *마쪽 : 남쪽
남나라 불여름(2) 어제는 아저씨 다음은 누가 갈지 간 넋은 갈 곳 없이 온밤을 흐느끼니 뒤와 마 왜 이렇게도 멀고 먼가? * 뒤 : 북쪽 * 마 : 남쪽 동포 모여 사는 곳에서 어제는 삼촌 돌아가셨으니 내일은 또 누가 갈지. 간 혼은 되돌아갈 고향도 없어 헤매어 줄곧 운다. 땅 이은 북한과 한국이 왜 이렇게도 멀고 마는가?
“바람이 불고 / 사나운 파도 몰아치는 섬 / 할멍의 손자 몸에 붙으려는 귀신 / 훠이훠이 물러가라 / 물러가라 / 마을의 액운을 막아내는 / 거욱대 너머 / 먼바다에서 들려오는 / 신의 울부짖음 / 파도소리 섞여 살로 파고드는 밤 / 오늘 밤 누가 또 죽어가는가 / 오 신이여!” -추성순 - 제주시 내도동은 반질반질하고 색이 다양한 조약돌로 이루어진 바닷가(알작지)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돌로 탑을 쌓아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거욱대[防邪塔]”가 있는데 사람 키보다 높은 크기로 돌탑을 쌓아 올린 곳에 언뜻 보면 남성의 상징물 같은 뾰족탑이 서 있습니다. 이 거욱대는 마을 어느 한 방향으로 불길한 징조가 비치거나, 풍수지리설에 따라 기운이 허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액운을 막으려고 세웠는데 거기에 더하여 마을의 안녕을 지키며 전염병과 화재예방, 바닷일에서의 안전과 아이를 잘 낳게 한다는 속설까지 섞여 있어 섬지방인 제주의 고유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도동 거욱대는 제주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밖에도 제주시 이호동, 북제주군 한경면 용수리
임진왜란은 왜군에 대비하지 못했던 우리 겨레에게 커다란 아픔을 주었습니다. 특히 조선 육군은 임진왜란 때 뭍에서 일본군의 조총에 밀려 연전연패를 거듭해 온 나라의 70%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었지요.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거북선과 판옥선에 우수한 성능의 대형화포를 설치하여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수한 성능의 대형화포란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별황자총통 따위를 말합니다. 당시 일본 수군은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이라 하여 배 위로 뛰어들어 개인 휴대무기 곧 칼 따위를 써서 적을 죽이는 백병전이었는데, 주로 배를 빼앗아 뱃사람들을 죽이고 물품을 약탈했던 왜구의 전술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후 16세기 중반 조총이 들어온 뒤 기존의 백병전 외에 조총을 활용한 싸움기술이 보태졌으나 전체적인 변화는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견주어 조선 수군은 적군의 배에 붙지 않고 멀리서 왜군 조총에 견주어 사거리가 월등히 긴 화포를 이용하여 싸운 덕분에 희생을 최소화하고 적을 대파할 수 있었지
요즘 같이 의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조류 인플루엔자나 사스 따위 신종전염병이 돌면 속수무책입니다. 하물며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는 어찌했을까요?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홍역도 조선시대엔 수많은 희생자를 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영조 임금 때인 1775년(영조 51) 이헌길은 한양에 갔다가 삼태기에 싣고 나가는 홍역으로 죽은 주검이 잠깐 동안에 수백 명이나 되는 것을 보고, 상주의 신분임에도 백성을 구해야 한다며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이헌길은 홍역에 관한 한 최고의 의술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의 비방을 얻은 사람은 죽을 지경이다가도 살아나고, 열이 오르다가도 내렸기에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가 홍역 환자를 치료하는 집 앞에는 사람들이 골목까지 줄을 설 정도였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병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가 명의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은 가난한 사람이나 권력자이거나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치료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헌길은 치료만 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연구하고 체득한 비방을 후세에 전하려 ≪마진기방(麻疹奇方)≫을 펴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학자
얼마 전부터 “느린 음식” 곧 슬로푸드가 건강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사실 한국 전통음식만큼 “느린 음식”도 세계에 드뭅니다. 우리 겨레의 느린 음식에는 된장, 고추장, 간장 말고도 발효음식인 김치, 젓갈, 막걸리 따위도 있습니다. 한국 전통음식 특히 장은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좋은 음식입니다. “친구와 장맛은 오래될수록 좋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지요. 1766년(영조 42) 유중림(柳重臨)이 쓴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는 “장은 모든 맛의 으뜸이다. 집안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비록 좋은 채소나 맛있는 고기가 있다 해도 좋은 음식이 될 수 없다. 설혹 시골에 사는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없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좋은 장이 있으면 반찬에 아무 지장이 없다. 가장은 모름지기 장 담그기에 신경을 쓰고 오래 묵혀 좋은 장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된장, 간장, 고추장 따위의 장담그기가 주부들만의 몫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음식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장을 만드는 데는 적어도 5~6달은 걸립니다. 특히 간장은 “
그제는 우리 겨레 가장 큰 명절 한가위였습니다. 오랜만에 온 식구가 모여 즐거운 한 때를 보내셨나요? 그런데 명절에 식구가 모이면 많은 가정에서는 화투로 밤을 샙니다. 흔히 고스톱이란 걸 치지요. 화투가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조선에 퍼뜨린 것이란 것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지금은 화투치는 사람들이 많지만 조선시대에는 투전이란 게 있었는데 무엇이든 돈을 걸고 하면 노름이됩니다. “투전이란 게 웬 놈의 물건이라 / 내 속을 이리도 끓인단 말이오. / 도둑놈처럼 내 치마를 벗겨가고 / 솥까지 팔아먹고 / 그때부터 연 사흘을 굶었는데 / 한 번 가더니 다시는 안 돌아왔소 / 밤중에 혼자 빈방에서 한숨만 쉬는데 / 어린 것들은 울면서 잠도 못 잤더랬소” 위 시는 정조 임금 때 문신이자 학자인 윤기(1741년 ~ 1826)의 책 ≪무명자집(無名子集)≫에 나오는 “투전자(投錢者)”란 시 일부입니다. 투전을 하다가 처의 치마를 다 벗겨가고, 솥까지 팔아먹으니 식구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투전의 폐해가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조 15년 9월 16일 조선 후기의 문신 신기경은 투전을 금하고, 투전을 팔아 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엄격히 벌을 줄 것을 상소
어제는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 명절이었습니다. 8월령에 보면 “북어쾌 젓조기로 추석 명절 쉬어보세, 신도주, 올벼송편, 박나물, 토란국을 선산에 제물하고 이웃집 나눠 먹세.”라는 하여 조선시대 한가위 명절 때 즐겨 먹던 음식들이 나옵니다. 여기서 “북어쾌”는 북어 스무 마리를 한 줄에 꿴 것이고, “젓조기”는 젓을 담그는 조기를 말합니다. 또 “신도주(新稻酒)”는 햅쌀로 빚은 술, “박나물”은 덜 여문 박을 얇게 저미고 쇠고기를 섞어서 볶은 뒤에 양념을 하여 주물러서 만든 나물을 말하지요. 특히 이 무렵엔 당질 ·인 ·염분 ·칼슘 등이 많이 들어 있어 영양가가 높은 토란국이 별미인데 예전엔 한가위 명절 때나 맛보던 귀한 음식입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시골에서 토란국을 끓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우리겨레가 토란국을 먹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때로 볼 수 있습니다. 토란(土卵)은 흙 속의 알이라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며 연잎같이 잎이 퍼졌다 하여 토련(土蓮)이라고도 합니다. 이 토란으로 만드는 토란국은 쇠고기 양지머리 육수에 토란을
수원시 조원동 보훈복지타운아파트에는 올해 86살의 애국지사 오희옥 여사가 살고 계십니다. 이 오희옥 여사를 한가위를 앞두고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 회원들이 찾았습니다. 좁은 방안에는 십여 명이 앉을 수가 없어 일부는 밖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방에 들어간 회원들은 모두 오희옥 애국지사께 먼저 큰절을 올렸습니다. “아이구, 절은 무슨…. 아이고 미안해서…. 고맙고….” 오희옥 여사님은 수줍은 새악시 모양 자꾸 부끄러워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 회원들이 오희옥 여사를 알게 된 것은 이윤옥 시인의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시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 20인)≫을 통해서였지요. 이 시집에서 오희옥 여사가 수원에 사시는 것을 알고 이 시인과 회원들이 한가위 명절을 맞아 선물을 사들고 찾은 것입니다. 수원지부(지부장 정명재)회원들의 숨은 봉사는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애국지사 조문기 선생님 댁을 명절마다 찾아가 인사를 드렸고 선생님 사후에는 병중의 사모님을 돌보고 명절 때마다 제사용품까지 마련하여 찾아다니는 등 보이지 않는 선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날 오희옥
일본도 체험박물관이 늘고 있다. 기존의 박물관이 건물 하나 지어놓고 그 안에 기념물이나 사진 등을 전시하는 공간이라면 체험박물관은 다양한 모형을 갖춰놓거나 시설물을 복원하여 방문자가 좀 더 체험으로 역사적 사실에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서 생동감이 있고 활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기존의 박물관이 흑백사진이라면 체험 박물관은 컬러풀한 동영상 속에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적합한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체험박물관의 하나가 기후현 후와군 (岐阜縣 不破郡 關ケ原町 關ケ原1701-6)에 있는 ‘세키가하라 워 랜드’이다. 우리에게는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로 잘 알려진 ‘세키가하라’는 기후현의 한 마을이름으로 고대부터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은 나고야를 중심으로 한 주쿄권(中京圈)과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권(關西圈)의 접점 지역으로 일본의 동서를 잇는 JR 도카이도 신칸선(新幹線)과 JR 도카이도 혼센(本線)이 마을을 지나고 있어 어디서나 접근이 쉽다. 이곳에서 벌어진 400여 년 전의 대규모 내전이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은 (1536-1598) 죽기 전에 후계자인 아들 히데요리를 부하들에게 부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