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했던 외규장각의궤(外奎章閣儀軌)가 145년 만에 돌아와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에서는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을 7월19일부터 9월18일까지 엽니다. 이번 특별전에는 풍정도감의궤를 비롯한 돌아온 의궤 71점을 포함해 조선후기 강화도 지도와 외규장각 모습을 담은 강화부 궁전도 등 유물 165점이 선보입니다. 그동안 역사·학술·시민 단체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운동을 끈질기게 벌였지만, 프랑스 정부는 계속 협상을 지연시키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다 2010년 11월 12일 G20 정상회의에서 양국 대통령 간에 외규장각 도서를 임대형식으로 빌려준다는 합의를 했습니다. 그에 따라 2011년 4월 14일부터 4차에 걸쳐 297권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약탈해간 의궤를 빌려오는 형식으로 받아놓고는 귀환이라는 화려한 용어를 써가며 환영식을 하고 전시를 하는 데 있습니다. 분명히 합의 내용에는 5년마다 프랑스와 임대계약을 갱신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지요. 그것도 자동갱신이 아니라 5년 뒤 다
“할아버지가 / 담뱃대를 물고 / 들에 나가시니 / 궂은 날도 / 곱게 개이고 /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 들에 나가시니 / 가문 날도 / 비가 오시네.” 향수라는 시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 시인의 ‘할아버지’입니다. 농촌에서 여름날 비 오면 입던 옷 ‘도롱이’는 재래식 비옷입니다. 녹사의(綠衣), 사의(衣)라고도 하는데 띠나 그와 비슷한 풀, 볏짚, 보릿짚, 밀짚 따위로 만듭니다. 안쪽은 재료를 촘촘하게 고루 잇달아 엮고, 거죽은 풀의 줄거리를 아래로 드리워서 빗물이 겉으로만 흘러내리고 안으로는 스미지 않게 한 것입니다. 농촌에서 비 오는 날 나들이를 하거나 들일을 할 때 어깨, 허리에 걸쳤으며, 여기에 삿갓까지 쓰면 완전한 비옷이 되는 것이지요. 제주도에서는 이 도롱이를 비옷만이 아닌 추위를 막는 방한구로도 썼습니다. 도롱이는 지방에 따라 도랭이, 두랭이, 둥구리, 느역, 도롱옷, 드렁이, 도링이, 되렝이, 되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 비가 올 때 도롱이 위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대패랭이나 삿갓을 쓰는데 더운 여름날에 모자 대신 쓰면 시원하지요.
어제는 서울을 비롯하여 온 나라가 물폭탄을 맞아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으며, 큰 재산 손실이 났습니다. 천재지변이라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큰비를 뜻하는 “대우(大雨)”라는 낱말이 무려 960건이나 검색이 되며, 비가 오지 말게 해달라고 하늘에 비손하는 “기청제(祈晴祭)”라는 낱말도 225건이나 보입니다. 우선 큰비가 왔다는 예를 보면 세종 9년(1427년) 큰비가 내려 경북 상주에서 산사태가 나 묻혀 죽은 사람이 7명, 떠내려간 집이 43채이고, 선산ㆍ의성ㆍ함창ㆍ군위에서 떠내려가 죽은 사람이 23명, 산사태 난 곳이 무려 6,779군데나 된다고 나옵니다. 지금도 큰비가 오면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아수라장이 되지만 그때는 더욱 처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큰비가 계속해서 내리면 기청제를 지내지요. 특히 벼가 익어갈 무렵 오랫동안 내리는 비는 임금이 크게 걱정할 정도인 것입니다. 태종실록 36권(1418) 8월 7일 기록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백곡(百穀)이 결실할 때인 지금 오랫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리니, 8일에 기청제를 행
바야흐로 일본은 불꽃놀이 계절이다. 무더운 여름 밤 크고 작은 강가에서 쏘아 올리는 형형색색의 불꽃은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즐겁게 해준다. 십여 년 전 요코하마의 밤하늘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도쿄의 찜통더위에 파김치가 되어가고 있을 때 요코하마에 살고 있는 친구 우키코가 나에게 보여 줄 게 있다며 불꽃놀이에 초대했다. 항구도시 요코하마는 도쿄에서 전철로 1시간이면 닿는 곳으로 도쿄보다 집값이 싸고 주거환경이 좋아 도쿄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너무 늦지 않게 오라’는 우키코의 성화에 불꽃놀이 세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벌써 불꽃놀이 장소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불꽃놀이에도 명당자리가 있어서 유로석을 뺀 곳으로 불꽃을 쏘아 올렸을 때 가장 잘 보이는 곳은 아침부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고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이나 커피숍 역시 좋은 자리를 맡으려는 사람들로 자리 쟁탈전이 보통이 아니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서너 시간씩 불꽃을 쏘아대니 좋은 자리 쟁탈전이 날만도 하다. 한국에서는 한여름의 고정행사인 일본의 불꽃놀이를 하지 않기에 나는
지난주에는 어렵사리 연변예술대학과 첫 교류 음악회를 갖게 된 과정을 중심으로 소개하였다. 이번 주에도 연변의 조선족 음악 이야기를 계속해 보도록 하겠다. 어렵게 성사된 연변대학에서의 교류 음악회를 끝낸 그날 밤,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되어 목이 터져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우리의 만남을 서로 자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다음날 ‘들놀이’ 행사로 이어졌다. 연변대학의 교수와 직원들은 우리 일행을 위해 먹을거리를 다양하게 준비해서 강가로 나가 하루를 즐긴 것이다.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동포 음악인들이라 해서 그런지 너무도 따뜻하게 대해 주는 그들의 태도에서 순수한 인간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 7월, 연변 예술대학을 방문하던 그 해, 우리의 초청을 계기로 연변예술학원은 중대한 구조 조정을 단행하였는데, 바로 음악학부 내에 민족음악과, 줄여서는 민악과로 부르는 학과를 새롭게 신설한 것이다. 마치 한국에서의 국악과혹은 한국음악과와 같은 것이다. 한국은, 1959년도에 신설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를 제외한다면 70년대에 와서야 겨우 한양대, 이
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더위에 지칩니다. 그래서 여름을 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는데 냇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이나 복달임을 합니다. 특히 여름철 보양음식이나 별미는 더위를 물리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지요. 그 별미음식에는 원미죽(元味粥)이란 것도 있습니다. 조선 말기에 펴낸 글쓴이를 모르는 요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 이 장국원미죽과 소주원미죽이 나옵니다. 장국원미죽은 먼저 맷돌에서 쌀알이 반씩 갈라질 정도로 간 다음 체에 쳐둡니다. 이렇게 만든 싸라기에 곱게 다진 쇠고기와 표고버섯, 석이버섯, 느타리버섯, 파 등을 넣고 만들지요. 또 소주원미죽은 싸라기로 죽을 쑨 다음 약소주와 꿀 생강즙을 넣고 다시 끓입니다. 약소주는 소주에 용안육(龍眼肉, 영양가가 많고 단맛이 나는 과일인데, 식용약재로 씀)ㆍ구운 대추ㆍ인삼 등을 넣고 50여 일 우려낸 술입니다. 이 원미죽은 1938년 6월 17일 자 동아일보에 “여름철 별미인 조선음식 몇 가지”라는 기사에도 등장합니다. 원미죽은 시원하게 얼음을 띄워 먹는데 소화가 잘되고 식욕을 돋우며, 보양 효과가 있는 여름철 별
“날마다 일찍 일어나 이부자리를 네 손으로 개어 깨끗한 곳에 두어라. 이어 비를 가지고 자리를 깨끗하게 쓸고 머리는 얼레빗으로 빗고, 빗을 빗통에 넣어 두어라. 이따금 거울을 보며 눈썹과 살쩍을 족집게로 뽑고 빗에 묻은 때를 씻어 깨끗하게 해라. 세수하고 양치하며 다시 이마와 살쩍을 빗질로 매만지고, 빗통을 정리하고 세수한 수건은 늘 제자리에 두어라.” 위 글은 조선 후기의 서예가인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유배지에서 딸에게 절절이 쓴 편지 일부입니다. 자신은 유배를 떠나고 아내는 유언을 남긴 채 목을 매 죽었기에 부모가 곁에 없는 딸에게 이광사는 사랑을 담아 편지로 가르침을 주었지요. 여기에 두 번이나 나오는 살쩍은 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을 말합니다. 그런데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던 선비들도 망건 바깥으로 빠져나온 살쩍을 망건 안으로 밀어넣으려 “살쩍밀이”라는 빗을 썼지요. 살쩍밀이는 대나무나 뿔로 얇고 갸름하게 만듭니다. 깔끔한 선비들은 살쩍밀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머리를 가지런히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정한 차림을 중시하여 매일 아침 첫 일과는 빗질로 시작했으며, 살쩍밀이를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쌀쩍을 밀어넣을
올해도 또 찾아온 겨레의 얼이어라 더위를 이겨내는 너이기에 아름답고 먼길을 오는 갈빛도 너인가 하노라.
“아, 큰 난리 뒤에 백 가지 물건이 조폐(凋弊)하였으니 몸을 가리고 배를 채우는 것만도 다행이라 할 것인데 근년 이래로 풍속이 사치를 숭상하여 복식(服飾)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여 여염에 비단옷이 찬란하고 천한 창기들에게 주취(珠翠)가 현란합니다. 피차가 서로 숭상하여 절제할 줄을 모르니 이때가 어느 때이기에 사치의 심함이 감히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경계하지 않는데 어찌 하늘이 화(禍)를 뉘우치겠습니까. 사치하는 풍습도 천재(天災)를 부르는 하나의 단서가 됩니다.” 이는 선조실록 (212권) 1607년 6월 3일 2번째 기사에 보이는 ‘사간원 상소문’입니다. 여기서 큰 난리란 임진·정유재란을 말합니다. 이 상소문에서는 나라의 변란이 끝난 지 10여 년이 되어가는 데도 전쟁 중에 입은 종묘사직의 폐해도 다스리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대다수 백성은 굶주림을 모면하기도 바쁜데 일부 층에서 현란한 옷을 차려입고 구슬로 치장하는 사치가 심함을 우려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신하로서 임금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자신들에 대한 깊은 통찰이 이어집니다. “신들은
쇠를 녹일 무더위에 땀이 마르지 않으니 가슴 헤치고 맨머리로 소나무 난간에 앉았노라 옥경의 신선 벗이 나를 지성스레 생각해 주어 맑은 바람 한 줄기를 나누어 보내주었구려 -옥담 유고집 ‘부채선물에 화답’ 가운데- 무더위가 쇠를 녹인다는 말은 한여름 더위를 잘 표현한 말입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두 번째로 오는 “대서(大暑)”이며 내일(24일)은 중복입니다. 이렇게 이름난 더위가 하루 사이로 있는 것은 드문 일로 1929년 7월 23일과 24일도 대서와 중복이 하루 차이였습니다. 사무실 안에서야 에어컨이나 선풍기로 더위를 식히겠지만 들판에서 일을 하는 농부들이나 밖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서와 중복은 견디기 어려운 절기입니다. 더울수록 혀끝에서는 찬 것이 당기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운 음식으로 몸을 보양해온 게 선조의 지혜입니다. 흔히 이열치열로 먹는 먹거리로는 전설의 동물인 용과 봉황 대신 잉어(혹은 자라)와 오골계로 끓인 “용봉탕”, 검정깨로 만든 깻국 탕인 “임자수탕” 그리고 보신탕, 삼계탕, 추어탕 등을 예로부터 보양식으로 즐겨 먹었습니다. 그러잖아도 더운데 땀을 줄줄 흘리며 뜨거운 음식을 먹는 것은 여름철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막으려고 피부 근처에